[칼럼] 그녀에게 바람이 불었다 - 영화 '곡성' 패러디 소설

글 입력 2020.09.14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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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 <싱글맨>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잠에서 깨는 것은 있다와 지금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니 나는 잠에서 깬다. 나는 여기, 나의 집에 있다. 지금은....... 지금 몇 시지?

 

방광을 비우고 찝찝한 구취를 제거하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한다. 나 같은 야행성에게 아침은 물 한 잔으로 족하다(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세상은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브런치'라는 것을 개발해 주었으니). 문득 시선이 닿은 책상은 마치 폭격이라도 얻어맞은 양 암담하다. 밤샘 작업의 폐해다. 차마 치울 엄두가 나질 않아 노트북만 쏙 빼온다.

 

차분히 부팅을 기다리며 전날 작업을 위해 꺼두었던 핸드폰을 켠다. 지잉, 지이잉. 시끄럽게도 울려댄다. 내 인간관계가 이렇게나 두터웠던가? 별로 충실했던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한 번에 62통이나 되는 메시지들을 읽는 건 별로 유쾌할 것 같진 않다.

 

조용히 핸드폰은 구석에 던져두고 노트북에만 집중한다. 습관처럼 SNS 창을 띄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나의 연인은 내가 없는 어제에 어떤 하루를 보냈으려나. 수많은 팔로워들의 목록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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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근두근, 지이잉. 두근두근, 지이잉. 두근두근, 지이잉.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 <싱글맨>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잠에서 깨는 것은 있다와 지금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잠에서 깬 나는 여기, 나의 집에 있다. 그리고 지금...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바람이 불었다.

 

 


 

 

<1일째>

 

뚜르르. 뚜르르. 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다. 보낸 카톡은 여전히 확인하고 있지 않다. 아침이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면서 나는 이해해야 되는 걸까. 아님 그저 나를 피하기 위한 그녀의 임시방편 책략인 걸까. 이른 아침부터 핸드폰을 들뜨게 한 문자들을 훑는다. 나의 친구들부터. 그녀의 친구들까지.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지금 이 노란 창 안에 한데 모여 있는 것만 같다. 우려와 불신에 탄식과 애도까지. 갖가지 감정들이 뒤엉켜 있으나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다시 전화를 건다. 일곱 번째 전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받지 않는다. 드라마를 보면 이럴 땐 보통 핸드폰을 집어던지던데. 그리고 절규하고 울면 되는 건가. 하지만 나는....... 아니다. 다만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나를 두고서 뻔뻔하게 다른 남자와 ‘연애 중’을 걸어놓는 그녀의 의중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납득할만한 이유다. 그녀가 내 전화를 받질 않겠다면, 나에겐 그녀의 친구들이 있다.

 

한지민양.

아, 이쪽이에요. 오랜만이에요, 정오씨. 저기... 괜찮아요? 저도 잘....... 저도 많이 놀라서요. 아뇨, 모르는 사람이에요. 네... 수연이요? 글쎄요. 저도 수연이랑은 연락을 잘 안 해서. 그렇긴 하죠. 셋이서 자주 만나긴 했죠. 근데 제가 수연이한테 연락을 먼저 한 적은 거의 없어서요.정오씨랑 같이 볼 때도 수연이가 먼저 불러줘서 나간 거예요. 사실 학교 다닐 때도 같이 대화한 적도 별로 없는걸요. 네... 미안해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네... 그럼 들어가세요.

 

정윤아양.

여보세요? 정오씨? 수연이요? 글쎄요. 지금쯤이면 가게에 있지 않을까요? 병가요? 이상하네. 어젠 별로 아파 보이지 않았는데. 근데 수연이는 왜요? 네? 아... 두 사람 헤어진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수연이가 요즘 정오씨 이야기를 잘 안 해서... 그래서 어제 수연이 SNS 보고 둘이 헤어졌나 싶었죠. 설마요. 수연이가 그런 얘는 아닌데....... 혹시 둘이 싸웠어요? 수연이한테 한 번 전화해보세요.

 

김가영양.

그래서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저 금방 들어가 봐야 해요. 용건만 말해요. 수연이요? 글쎄요. 일하고 있지 않을까요? 근데 수연이는 왜요? 아, 그거요? 봤어요. 근데 정오씨가 그걸 왜 신경 쓰는데요? 남자친구요? 두 사람 사귀었어요? 수연이한테 그런 말은 못 들었었는데. 설마요. 이래 봬도 10년 지긴데....... 정말 둘이 사귄 거 맞아요?

 

이예진양.

미안해요. 정오씨랑은 별로 통화하고 싶지가 않네요. 솔직히 수연이... 정오씨가 많이 부담스럽데요.

 

김연미양.

....... .......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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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도대체 누구니.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람은 정말 네가 맞는 거니. 바깥은 벌써 어스름한 저녁이다. 다시 전화해봤자 그 지겨운 수신음만 들을 게 뻔하다. 내가 보낸 메시지 옆의 숫자 ‘1’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혹시 너는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거니. 그래서 훌쩍 사라져 버린 거니.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핸드폰 좀 그만 봐. 그래봤자 네 속만 버려.”

 

승민이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챈다. 나 대신 쓰게 웃으며 그는 잔에 술을 따른다. 고기를 구우며 가만히 내 눈치를 살피던 녀석들의 얼굴엔 아침에 메시지에서 보았던 감정들이 제각기 떠 있다. 우려와 불신. 탄식과 애도.

 

누군가 ‘짠’을 외친다. 마치 갓 전입 온 이등병마냥 다섯 개의 손들이 일사분란하게 모였다가 흩어진다. 나는 가만히 고기가 타들어가는 걸 보지만 딱히 의도한 건 아니다. 다만 시선이 갈 길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혀를 적신 소주는 쓰기만 하다. 잔을 내려놓고 승민이 내게서 가져간 핸드폰을 도로 집어온다.

 

“바람, 뭐 그런 건가”

“난 솔직히 수연씨가 그럴 줄은 몰랐어. 나쁜 년. 정오가 그동안 얼마니 잘해줬는데.”

“그만해.”

“수연씨한테는 아직 연락 없디?”

“........”

“와, 수연씨 완전 악질이네. 바람에 이젠 잠수까지?”

“그만하라고! 여기서 제일 힘든 사람 정오다. 가뜩이나 심란할 텐데 자꾸 건드릴래?”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그리고 침묵. 그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 잔들은 다시 빠르게 채워진다. 그리고 다시 한 잔. 탄식을 닮은 소리가 각자의 입에서 쏟아진다.

 

“근데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수연씨는 갑자기 왜 그랬대? 니들 별로 싸우지도 않았잖아.”

“맞아. 혹시 서운하게 한 거라도 있어?”

 

그러게.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그래서 그녀는 지금 자기만의 방식으로 내게 벌을 주고 있는 걸까. 문득 출입구를 바라본다. 저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오는 상상을 한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우리 테이블을 향해 다가온다. 그녀는 바로 내 앞자리에 앉는다. 새로 주문한 소주를 까면서 그녀는 내게 해맑게 묻는다. 반성은 좀 했어?

 

“아니....... 너야말로 나한테 왜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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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째>

 

그러니까 그 날, 그녀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특별히 싸운 일은 없었다. 오히려 마감에 쫓기느라 연락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내게 서운함을 토로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같이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었다. 불과 전날만 하더라도 맘에 드는 호텔을 찾았다며 좋아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혹시 내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그런 걸까? 하지만 애초에 지금의 회사를 추천해준 건 그녀가 아니었던가. 매번 마감에 쫓길 때마다 연락 한 번 하지 못하는 나를 두고서 오히려 능력 있는 남자 같아 멋있다면서 좋아해주던 그녀가 아니던가. 혹시 여자의 변덕, 뭐 그런 건가? 뚜르르. 뚜르르. 이제는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래,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거지. 그렇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아아, 유미씨. 오랜만이에요. 요즘 장사는 잘 되요? 저요? 제가 화장품 가게에 화장품 사러 오지 왜 오겠어요. 수연이 줄 선물 좀 고르려구요. 근데 오늘은 수연이가 안 나왔나 보네요. 병가요? 오늘도요? 아... 혹시 그럼 전화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제께 고장이 나서... 네? 뭐라구요? (수연이 좀 그만 괴롭히라구요!) 제가 수연이를 언제 괴롭혔다고... 그냥 걱정 되서 그래요. 아프면 약이라도 들고 찾아갈까 하고. 뭐요? 제가 뭘 모르는데요. 헤어졌다고요? 도대체 누가 그래요? 저기요, 유미씨. 유미씨!

 

“수연이, 남자친굽니다. 좀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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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그녀의 남자를 만난다. 사람들로 가득한 카페에서 그 개새끼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겐 그의 사진이 있으니까.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그의 이름을 입에 넣어 발음해본다. 그가 나를 올려다본다.

 

“반갑습니다. 수연이 남자친구, 신정오입니다.”

 

무심하게 손을 내민다. 얼결에 악수에 응하는 그의 입가가 뒤틀려 있다. 불쾌함이다. 그는 그걸 굳이 내게서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렇게 나와 줄 수밖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수연이랑 어떤 사이시죠?”

“.......남자친굽니다.”

 

이것 봐라?

 

“재밌는 분이시네요.”

“........”

“서로 바쁜 몸이니까 길게 잡아 두진 않을게요. 수연이 어디 있나요?”

“그걸 왜 저한테 찾으시죠. 수 연씨라면 집에 있겠죠. 아님 가게에 있거나.”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이 병신아.

 

“그럼 다른 걸 묻도록 하죠. 이틀 전에 수연이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가 본데...”

“대답해요.”

“.......수연 씨랑은 두 달 전에 처음 만났습니다. 저희 회사랑 수연씨 가게가.......”

“말 돌리지 말고. 이 새끼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거나 설명하라고.”

 

그가 아니꼽게 나를 노려본다. 근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여기서 가장 패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거든.

 

“제가 고백했습니다. 수연씨는 받아줬구요.”

“내가 있다는 거, 알았을 텐데?”

“몰랐습니다.”

“거짓말.”

“사실입니다. 수연씨는 당신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거짓말하지 말랬지. 수연이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 2달 전에 만났다고? 나랑 수연이, 함께 한 시간만 자그마치 2년이야. 당신 말이 사실이더라도 그게 수연이 진심일 리가 없...”

 

하아... 그가 한숨을 쉰다. 감히 사람을 앞에 두고서. 기분 나쁘게.

 

“이제야 알겠네요. 수연씨가 전 남자친구에 대해 말하긴 했었죠. 항상 자기 멋대로인 데다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믿고 싶은 대로만! 그게 누군가 했는데 바로 당신이었어. 수연씨가 그럴 만도 해.”

“뭐요?”

“당신이 수연씨 남자친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더는 수연이 괴롭히지 마세요. 만약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그땐 이렇게 말만으론 끝나지 않을 거야.”

“내가 뭘 마음대로 믿어! 먼저 건드린 사람이 누군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르는 새끼랑 사귄답시고 자랑하는 그년이 문제지! 그것도 나랑 사귀고 있으면서 변명 한 마디 없이! 근데 그것이 어떻게 내 탓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놈의 멱살을 잡는다.

 

“말해, 이 새끼야. 니들 두 년놈이 도대체 무슨 작당을 벌인 건지 말하라고, 이 새끼야!”

 

그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른다. 멀대 같은 녀석이 그대로 나가떨어진다.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누군가의 비명과 고함, 경찰을 운운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까지. 그러나 뒤집어진 눈은 오로지 그 개새끼만 보인다. 감히 남의 여자를 넘보는 파렴치한 씹새끼.

 

그날 저녁, 수연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얼한 주먹의 와중에도 하루 종일 기다린 그녀의 목소리는 혼곤한 낮잠처럼 반갑다. 그러나 수화기의 너머에서 그녀는 가만히 침묵한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려나. 불안이 저 밑에서부터 일렁거리기 시작할 즈음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게 시간을 묻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내일 좀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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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째>

 

커피는 천천히 식어가고 있다. 내가 너에게 고백했던 그 카페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몰랐던 그 시절을 향해 천천히 거슬러 올라간다. 너와 그 남자의 사이에는 ‘연애 중'이 걸려 있다면, 너와 나 사이에는 ’침묵 중'이 걸려 있다.

 

“석원씨 찾아갔다면서? 내 친구들도 만나고 다니고. 도대체 사람이 왜 그레?”

“너랑 연락이 안 되니깐. 남자친구라면 그런 거 당연한 거야.”

“남자친구....... 웃긴다. 그래서 나는 왜?”

“아픈 건 좀 어때?”

“말 돌리지 마. 두 번 말하는 거 싫어.”

 

그렇게 직진이 좋으시다면야. 기꺼이.

 

“SNS 봤어.”

“그래서?”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 안 드니?”

“내가 뭘 설명해야 하는데? 오빤 이미 그렇게 확신하고 있잖아. 오빠 널 두고 내가 다른 남자랑 바람 핀 거라고. 그래서 석원씨 찾아간 거잖아. 내 친구들도 들쑤시고 다니고. 아냐?”

“아냐.”

“거짓말. 오빤 내가 바람 폈다는 의심을 확인하러 온 거야.”

“아니라고 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냥 납득이 안 되서 그래. 너랑 나 뻔히 사귀고 있으면서 SNS에 그런 걸 올린 널 이해할 수 없을 뿐이라고!”

 

그녀가 날 바라본다. 저 투명한 눈동자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에 대한 애정? 아님 그 사람에 대한 애정? 혹은 둘 다 아니라면 나에 대한 경멸일까. 설령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래서? 내가 설명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만약 니가 그런 게 아니라고, 그날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제대로 설명하고 오해를 푼다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우리가 다시...? 뭐를? 사랑을?”

“그래. 다시 돌아갈 수 있어.”

 

고요하다. 잔굽을 긁던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이기를 멈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선 전등 빛이 일렁인다. 슬그머니 접힌 그녀의 손가락은 손을 따라 그녀의 무릎에 도달한다. 내가 보이지 않는 책상의 밑에서 그녀는 손톱을 뜯고 있을까. 서로를 부딪혀 뚝뚝 소리를 내는 손톱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무렵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린다. 폭소? 황당? 아니면 혹시 눈동자 뒤에 숨어있던 경멸일까? 입을 가리고서 그녀는 쿡쿡거린다. 그 조용한 웃음을 나는 좋아했었다.

 

“웃긴다. 그래, 오빤 늘 그런 식이었지.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믿어버리고.”

“.......?”

“여보세요, 신정오씨. 착각하셨나본데 나 여기 오빠한테 사과하고 용서 빌러 온 거 아냐. 헤어지자고 말하려고 온 거지.”

“뭐?”

“어떻게 말할 지 고민 많이 했는데, 덕분에 쉽게 해결됐네. 잘 가. 어차피 구질구질할 거 서로 피차 피곤할 일 없게 더는 연락하지 마. 오빠 집에 있는 내 짐은 버려도 좋아. 그걸로 오빠 기분이 풀린다면야.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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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를 떠난다. 마치 꿀이라도 목구멍에 던져놓은 양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안쓰럽게도 나는 그녀의 발자국을 좇아 허우적거릴 뿐이다. 비틀거리면서 그녀를 따라 카페를 나선다. 그녀는 벌써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신호가 바뀌고 그녀가 길을 건넌다. 길의 끝에는 그 남자가 서 있다. 그 남자를 향해서 그녀는 환하게 웃는다. 안긴다. 손을 잡는다. 가지마. 기어코 터져 나온 목소리는 바람 빠진 튜브마냥 질척거린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영영 떠나 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다’라고 말한 이는 아마도 이승우였던가. 그렇다면 그렇게 자라 성체가 된 사랑은 어디로 가는가. 사랑하는 이를 홀린 사랑받는 이에게로 향하던가. 만약 그런 거라면 남아있는 이는 어떻게 되는가. 모든 양분을 사랑에게 주느라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그는 어떻게 되는가. 타인의 열망이 빚어낸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리던가. 그래서 어떤 가수는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며 노래했던가.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너는 내게서 완성된 그 사랑을 챙겨 홀로 떠났다. 빈껍데기가 되어 가슴을 풀어 해친 채 나는 답을 구한다. 사랑의 본질이란 원래 그러하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모르는 어딘가에 이유는 분명히 있다. 너는 그걸 틀림없이 알고 있다. 내가 사랑을 모를 리 없다.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나쁜 건 너다. 그러니까 대답해. 도대체 이유가 뭔지. 이 악마 같은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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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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