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애슐리는 애슐리가 아니다 [문학]

글 입력 2020.09.1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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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우리 삶에서 가장 불합리한 것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태어나기 전에 자의로 이름을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는 이름을 받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이름’ 아래 그물처럼 줄줄이 엮인 삶 속으로 선택권 없이 밀어 넣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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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슐리'라는 이름


 

‘섬의 애슐리’의 주인공은 섬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이름은 애슐리, ‘슈’하고 내뱉는 본토의 발음이 든 이름이다. 사람들은 본토의 이름과 본토인 같은 얼굴을 한 애슐리가 왜 본토로 떠나지 않는지, 왜 작고 낡은 유람선에서 춤이나 추는 일에 만족하고 마는지 궁금해한다.

 

사실 애슐리가 섬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섬에 대단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토인처럼 생겼고 본토에서 온 어머니를 두었다는 이유로 섬에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본토에 정착할 수 있을 만큼 어딘가 특출난 사람도 아니었다. 게다가 새엄마와 이복동생, 아버지로 이루어진 완벽한 가족 안에 애슐리의 자리가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애슐리는 그야말로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 있는 섬이었다.

 

섬처럼, 더 정확하게는 해파리처럼 물결에 몸을 맡기는 것이 더 익숙했던 애슐리는 그래서 춤을 추었다. 그는 본토의 관광객들을 위해 전통이란 없는 가짜 민속춤을 추는 일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그러나 리가 찍은 본토의 난민을 씻기는 애슐리의 사진이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애슐리의 이름은 특별해진다. 356명 중 하나일 뿐이었던 평범한 애슐리는 본토의 아이를 위해 눈물 흘리는 섬의 소녀, 난민을 자애롭게 돌보는 그 ‘애슐리’가 된다.


 

눈물을 흘리는 섬의 애슐리. 캡션을 보니 기가 막혔다. 이 사람들아, 이건 아무리 봐도 땀이잖아. 애가 너무 무거웠다고! - p.41

 

 

의도치 않게 ‘섬의 애슐리’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게 된 애슐리는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이내 받아들인다. 위에서도 말했듯 그에게는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또 사진 속의 애슐리로 사는 일이 제법 괜찮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잿가루처럼 부유하는 삶에 익숙했던 애슐리는 사진으로 유명해진 뒤에야 비로소 섬에 속한 듯한 기분을 느낀다. 모두가 그를 알아보고, 섬의 권력을 잡고 있는 아투는 그에게 프러포즈를 한다. 애슐리가 처음부터 리의 사진이 만들어낸 ‘애슐리’의 이미지를 떨쳐낼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비록 자의로 만들어낸 이미지가 아닐지라도, 진실이 아닌 허상일 뿐이라도 거기에 순응하면 모든 것이 꽤 괜찮게 느껴지니까.

 

 

 

사진, 이름: 끝없는 타의


 

후반부에서 애슐리는 위기에 처한다. 누군가 그를 구하려고 하지만, 애슐리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아투와 함께했던 ‘애슐리’, 섬과 본토의 모두에게 사랑받는 ‘섬의 애슐리’는 그 자리에서 죽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애슐리는 애초부터 진짜가 아니었으므로, 애슐리는 결국 살아남는다.

 

애슐리의 사진, 그리고 애슐리의 이름. 사람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애슐리’는 결국 사람들의 시선 아래서만 유효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진짜 애슐리가 누구인지 사람들은 아마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 애슐리, 그러니까 다른 모든 섬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쩌다가 섬에 태어나 그곳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섬과 본토를 아우르는 나이팅게일인 애슐리이기 때문이다.

 

애슐리뿐만 아니라 섬의 모든 것은 그 종잇장 같은 이미지에 부지하고 있다. 민속적이고 이국적이라는 모호한 분위기를 파는 섬에서 사람들은 근본 없는 민속축제를 즐긴다. 한 우두머리가 나머지를 꼬리에 끌고 기어 다닌다는 묘한 거북이는 ‘앞서가는 거북이’라는 이름으로 섬의 명물이 되고, 섬사람들은 본토인들이 여기에 근사한 해석을 붙이도록 내버려 둔다.

 

그럴듯한 사진 몇 장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란 얼마나 얄팍한가. 하지만 그것이 무게를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결국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섬과 거북이, 그리고 애슐리는 모두 사람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꾸며진 희미한 허상일 뿐이지만, 가려진 당사자들은 그 이름에서, 정확히는 그 이름이 가진 프레임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그 프레임에 충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진과 이름이라는 두 가지 도구는 그래서 같은 성격을 가진다. 카메라로 포착되어 새롭게 이름 붙여진 애슐리는 진실과는 상관없이 종내에는 박제되어버린다.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이 노출된 애슐리의 삶과 선택에 숭고한 이유란 없었는데도 애슐리는 ‘애슐리’로 남아야만 했다.

 

 

 

우리가 마주 봐야만 하는 폭력


 

포토라인 앞에서 또 다른 이미지로 소모되고 말까 봐 두려워하던 애슐리는 한 선수의 인터뷰를 보고 자신을 괴롭히던 섬의 폭력과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카메라를 피하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똑바로 마주 서서 폭력을 고발하기로 한다.

 

작가 정세랑은 이 소설이 은은한 폭력에서 어렵게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름 붙이는 행위가 그 자체로 하나의 프레임이자 폭력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폭력이 맞는다면, 우리는 폭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어떻게 보면 삶은 이름 없는 조그만 무언가가 이름표 달린 유니폼을 갈아입는 과정에 불과하다. 유니폼은 무명의 생명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몇 살인지에 따라, 그리고 또 많은 기준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 유니폼에 불과하다. 유니폼 아래 누가 숨 쉬고 있는지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없거나, 아주 극소수이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아마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양자역학처럼, 서로의 시선과 해석이 부딪힐 때만 만들어지는 껍데기가 우리라는 존재의 표면 아닐까? (이 비유를 맞게 사용한 것이길 바란다)

 

마지막에 애슐리에게 자유를 준 것은 ‘애슐리’라는 본토의 이름도, ‘아투’라는 섬의 이름도 아닌,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선 곳의 언어였다. 결국 누군가를 전혀 모를 때야말로 그를 완전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은 ‘이름 없음’에 있으니까. 은은한 폭력이란 외부가 규정하는 모든 이름들이며, 그래서 폭력은 ‘애슐리’라는 이름만큼이나 평범하고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모든 이름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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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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