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질문하며 존재하는 삶에 대하여 - 소르본 철학 수업

"눈치는 없고요, 질문은 많습니다!"
글 입력 2020.09.0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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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본 철학 수업』

_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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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질문하며 존재하는 삶에 대하여

 

 


 

 

“눈치는 없고요 질문은 많습니다!”

 

 

‘아, 나인가?’ 마우스로 책 정보를 스크롤하고 클릭하기를 반복하던 내가 멈춰선 순간이었다. 여느 자기소개 글에서 질문에 질문한다는 걸 좋아한다던 사람이, “좋아하면 그냥 좋아하는 거지”라고 하지 못하고 좋아한다는 게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 질문하던 사람이, 그러니까 그런 사람인 내가 이 문장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그런 우연 아닌 우연을 계기로 찬찬히 책의 소개를 읽어내려가던 나는 이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어진 나의 사적인 독서 연대기를 살펴보면 최근부터 철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철학에 관심이 가기 시작한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가지게 된 삶을 향한 질문 때문이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정의한 모든 것을 지운다면 나는 무엇으로 남는 걸까, 나는 왜 사는 걸까, 내가 살아갈 방식을 내가 어떻게 정해야 옳은 걸까, 같은 질문들.


정해진 조건이나 방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존재, 그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삶 혹은 세상이란 것에 대해서 망망대해에 대책 없이 떨어진 기분으로 고민할 때마다 철학은 잠시나마 기대어 볼 수 있는 학문이었다. 적어도 내게 철학은 나의 단발적인 떠올림보다 훨씬 견고한 어떤 이론에 이른 것이었기에, 막연하지만 정말 알고 싶은 질문에 대한 어떤 실마리 하나 잡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따질 틈도 없이 무조건 주어진 공부를 하라고 요구하는 한국 사회 특유의 학교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의문을 가졌다는 저자가 철학으로 손꼽히는 프랑스로 가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무릇 타인의 마음은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많은 개인이 각자 다른 인생을 산다면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일 테다. 그러니 당신 또한 ‘왜 인생이 이 모양이지’라는 한탄을 해봤다면 정답 없는 문제의 답을 찾으러 떠나보자. ‘현재의 나를 만든 요소들은 무엇이고 어떤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실존적 물음을 앞에 두고. 왜, 혹시 모르지. 운이 좋으면 다가올 미래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범 답안도 아니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답을 찾기 위한 내 방법을 시험대에 올려보고 싶은 까닭이다. 삶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는 방법을 비교 대상으로 선보이는 작업은 《고백록》을 쓰던 루소의 다짐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고백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의 고백과 이어져’ 있으니까.

 

- “프롤로그” 중

  


<소르본 철학 수업>은 책 소개로 만난 첫인상보다 훨씬 더 깊고 진솔했다. 프랑스에서의 배움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행착오 속에서 이유와 상황을 온전히 판단하기도 전에 겪어야 했던 저자의 삶 속 이야기가 켜켜이 담겨 있었다. 주어진 세상 속에서 겪어야 했던 여러 사건들, 그것을 향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질문, 그것을 직접 겪고 고민해야 했던 저자의 사유가 프랑스에서 배운 철학과 한데 어우러져 쓰인 글들이었다. 그렇게 나타난 글은 저자만의 담담하고 위트 있는 문장에 어렵지 않게 읽히다가도 나 역시도 겪었던 순간,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어디선가는 분명 일어나고 있을 순간들에 대한 선명한 기록이었기에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다양성이 무색하게 편견 어린 차별이 횡행하는 프랑스. 그리고 경험 부족으로 인한 경계심이 만들어낸 배타적 한국. 두 나라가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이유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바로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는 게으름과 무지다. 내 몸의 가격을 물었던 프랑스의 남성들은 동양 여자에 대한 편견을 고쳐먹을 생각이 없었다. (...) 그리고 언행을 지적할 때마다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 그치만...’이라며 자기변호를 일삼던 프랑스인들. 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민족주의에 갇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갈등을 덜 겪은 한국이라고 다를까? 같은 반 다문화 가정의 친구를 은근히 조롱하던 분위기를 기억한다. 얼굴에 검은 칠을 한 개그맨을 보고 즐거워했던 한국에서의 유년 시절까지. 가장 비웃음을 살 만한 것은 생각 없이 터져나왔던 웃음임을 모른 채.

 

- “평범한 인종차별” 중

 

 

<소르본 철학 수업>은 그저 넘어갈 수 없는 상황과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세상의 면면을 향한 저자의 경험과 그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긴 에세이였다. 글을 읽으며 나의 삶, 거창한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나에게 언어란 무엇이었는지, 내가 경험했던 배움과 돈의 관계란 무엇이었는지, 서로의 취향이란 건 무엇이었고, 여전히 일어나는 인종차별, 여전히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자리 잡고 있는 폭력,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선택들... 나열하자면 정말 난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 둘러싸인 나란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무엇보다 책에서 공감의 기저를 이루는 지점은 저자도, 독자인 나도 겪어야 했던 한국 사회 특유의 학교생활이었다. "무조건 공부, 목표는 ‘좋은’ 대학, 그러면 인생이 술술 풀릴 것이다"가 모든 목적이었던 학교생활. 숫자로 좌지우지되는 건 성적인데 왠지 모르게 나라는 사람과 삶의 등급이 매겨지는 것 같았던 시간. 나로선 공부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이해하기 전에 경쟁을 위한 수단으로 공부해야 했던 한국 사회 학생1로서의 삶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TV는 바보상자라며 보지 못하게 하는 부모님 덕에 다양한 전집을 섭렵했고, 영어 카세트테이프를 배경음악 삼아 지내는 날이 많았다. 여기에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뿐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저자는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과학 영재 대회, 백일장, 구연동화 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부모님께 상장 수집의 즐거움을 안겨드렸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아무리 다양한 종류의 책을 탐독하고 수업을 열심히 들어도 시험 문제의 답을 골라내는 스킬은 쉽게 늘지 않았다. 저자는 그제야 21세기의 용은 개천이 아니라 오지선다형의 예상 문제를 먼저 접할 수 있는 자본에서 나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학교 수업에 충실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좋은 점수는 곧 좋은 대학과 ‘좋은 삶’으로 이어진다는 인생의 기본 진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세계가 뿌리째 흔들리게 된 저자가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와중에도 어른들은 ‘네가 유별난 거니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두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해라’라는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 출판사 서평 중 

 


나 역시도 고등학교 때는 왜 그렇게까지 공부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꾸역꾸역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못 보고 같은 자리에 앉아 공부하던 고3의 내가 떠올랐다. 비인간적인 일정이었나 생각도 들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정을 충실히 해나가는 나와 동기들은 대학을 준비하는 학생이란 신분과 그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학생이었으니까. 고등학생은 그렇게 하는 게 ‘맞으니까'. 나라는 존재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조건적인 공부가 정말 옳은 방식인지 충분히 생각해보기도 전에 학교생활이 그렇게 흘러갔던 것 같다.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이 이런 모습이라면, 지금까지 충분히 해보지 못했던 나와 나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지금의 삶에 이르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 삶은 단지 의미 없는 우연의 연속이었나? 우연에 몸을 맡기고 '당첨'과 '꽝'을 오가는 순진한 얼굴이 우리네 인생이라니. 그건 좀 섬뜩하단 말이지. 그래서 대답을 찾는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삶을 연대순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건 어떨까? 무지에서 시작하지 않고 현재의 앎이 드러내는 '앎이 없던 자리'를 되짚어 가는 식이다. 명화 복제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눈에 보이는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그림의 붓 터치를 하나하나 지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그려졌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 "프롤로그" 중

 

 

 

*

 

세상을 바꾸기엔 벅차지만

자신을 바꾸기엔 충분한 나에게


저자가 겪어야 했던 삶의 이야기를 읽고, 내가 겪은 삶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나로서 존재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가 부여한 모든 프레임을 지우면 나는 무엇이 남는 걸까. 한편으론 한 사람을 정의하는 젠더, 인종, 나이, 여러 사회적 조건은 그것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아무렇지 않게 외면하는 사회의 단상도 여전히 존재한다. 당장 나로서도 여전히 일어나는 소식들에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안전하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나 자신, 타인, 사회가 맞물린 사이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충돌을 마주하며 나로서 존재하기를 생각한다는 건 꿈을 꾼다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안전하게 고정된 삶이란 무엇일까. 시행착오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가득한 삶과 반대의 척도에서 다가가 보았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그런 삶이 있을까? 내가 사는 삶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런 시행착오가 결국 삶인 게 아닐까. 언젠가 생각했던 것처럼 정답 없이 매 순간과 나를 향해 질문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사람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저자가 이야기한 하이데거와 파스칼의 주장이 한층 더 가까운 거리에서 이해된다.

 

 

존재 물음이 꾀하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묻지만, 궁금해한다는 사실만으로 존재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얘기했던 파스칼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자신의 나약함과 비참함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우주보다 위대하다. 사유의 가능성이 곧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파스칼의 주장은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물을 수 있는’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닮은 것 같다. 단순해 보이지만 각자의 삶으로 끌고 오려면 어렵게 느껴질 테다. 우리는 자신의 ‘있음’이 성별, 직업 등으로 완성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있음’을 문제 삼아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펼쳐낼 때 본래적 존재 양식을 갖는 게 아닐까.

 

- “마초맨의 수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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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본의 철학 수업>은 두 개의 큰 카테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배움의 시간 - 나에게 가장 좋은 삶” 그리고 “배움의 재구성 - 모두가 덜 불행한 세상.” 두 말이 주는 무게는, 책을 읽은 후에 더욱이나 묵직하게 다가왔다. 나와 나의 삶에 대해 사유하고, 그 사유로 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타인과 그렇게 이루어진 세상을 바라보는 것. 나에게 가장 좋은 삶을 고민하며 모두가 덜 불행한 세상을 생각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벅차지만 자신을 바꾸기엔 충분한 우리가 삶에서 할 수 있는 사유에 대한 것이었다.


늘 도서를 리뷰할 때마다 이 책은 내게 무엇을 전해주었는지에 대해 고민하곤 하는데, <소르본 철학 수업>은 단번에 요약할 수 있는 하나의 문장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지 말라는 강한 메시지의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지 프랑스로 유학을 하게 된 저자의 이야기만이 낭만적으로 읊어지는 것도 아닌, 정말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통해 던져졌던 존재와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 그런 질문을 던져야 했던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어떤 내가 될 것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끊임없는 성찰의 과정이자 결과였다.

 

 

내가 지금까지 에세이에서 다루어온 건 단지 개별적 사건들이 아닐지도 몰라. 숨길 수조차 없었던 진실은 오히려 사건을 불러내는 방식에 있는지도 모르지. ‘무엇을 얘기하는가’가 아닌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 하는가’가 진짜 자신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과 숨기고 싶어하는 것은 욕망의 방향을 그대로 보여주니까. 이건 거짓말쟁이조차도 속절없이 드러내는 진실이겠지.

 

- “걸려온 전화” 중

 

 

그 에세이를 읽는 독자인 나. 그러니까 저자처럼 삶과 나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했고, 어떤 세상에 공존하며 여러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던 나 역시도 글을 읽으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경험과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 어떤 선택이 지금의 순간까지 오게 했는지. 무엇보다 나는 저자의 글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사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험, 기억, 선택을 가져야 했던 나라는 존재를 넘어서, 나의 주변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말이다.

 

책의 시작 즈음 “여러분, 명품 인간이 되십시오!”라고 외친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말에 의문을 품었었다는 저자는, 책의 마무리 즈음에서 자기 극복을 완전히 멈춘 고정된 상품이 아닌 일시적인 마침표 후에도 다음의 것을 준비하고 창작하는 창작자가 남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창작자는 상품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겐 이 지점이 "어떤 내가 될 것인가"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기 위해선, 고정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나와 세상을 향해 질문하며 존재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아마 나에게 가장 좋은 삶을 위해 힘껏 내달리는 원동력은, 모두가 덜 불행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한 움직임은 결국 그런 끊임없는 질문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문득 전통적인 미술가의 역할을 비판하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하며 현대 미술 흐름에 영향을 끼친 예술가 그룹 플럭서스에 영향을 끼친 존 케이지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어떤 세계가 존재한다고 할 때 세계가 완성된 오브제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으며, 세계는 만들어지는 것이자 움직이는 것이고 오브제가 아닌 과정으로서 존재한다고 했던 그의 말이.

 

나는 존 케이지의 말속 대상인 "세계"가 "사람"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미 완성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과정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여기에 이번에 <소르본 철학 수업>을 통해 얻은 것을 덧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과정으로, 끊임없는 질문으로 존재해야 앞으로 내가 되고 싶은 나 자신과 나를 위한 더 좋은 삶을,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도서 정보]


"눈치는 없고요, 질문은 많습니다!"

 

세상의 당연함을 납득할 수 없어 떠난

자유와 낭만의 공간에서 찾은 내 인생의 답

 

『소르본 철학 수업』

 

소르본철학수업_표지_입체.jpg

 

지은이

전 진

 

분야

한국에세이

 

가격

15,000원

 

쪽 수

336쪽


출판사

나무의철학

 

출간일

2020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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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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