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정한 음악적 성취란 무엇일까

글 입력 2020.09.0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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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음악계의 판도를 좌우하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놀면 뭐하니?’의 ‘싹쓰리’가 가져온 복고 유행과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등이 가져온 트로트 유행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마냥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선풍적인 인기와 별개로 그것이 궁극적으로 음악의 성공을 나타내거나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들의 음악이 음원 차트를 점령하고 방송가를 휩쓸고 있어도 거기서 음악적 성취를 발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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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면 뭐하니?’의 ‘싹쓰리’ 기획이 비판받는 지점은 크게 이러하다. 첫째, 미디어를 휩쓸고 있는 ‘깡’ 밈(meme)과 더불어 톱스타의 기용, 1990년대 레트로라는 유행에의 편승으로 이루어진 실패할 수 없는 안전한 시도를 취했다는 점에서 기획의 신선함과 특별함이 보이지 않는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질이 높지 않다. 셋째, 안전한 방향 설정과 신선함 없이 높지 않은 질의 음악이 최종적으로 향하고 있는 회귀 정서의 표방이 하나의 흐름으로 지속되다 보면 새로운 시도는 어려워질 것이고 결국 대중음악의 질은 저해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지적이 ‘싹쓰리’가 쓸고 간 음악계를 향한 우려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방송의 성공일 뿐 음악의 성공은 아니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의 흥행에 힘입어 우후죽순 등장한 트로트 예능에 관해서도 비슷한 종류의 지적이 가해진다. 대중음악계에 찾아온 회귀 정서 유행에 대한 경계 섞인 우려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향하며 정도가 더해진다. 신곡의 활발한 출현 없이 이전에 발매된 트로트를 리메이크하거나 커버하는 데서 그치는 작금의 형국으로 유행이 지속된다면, 새로움에 대한 고민과 발전 없이 장르 자체가 퇴화되고 자연히 대중의 흥미도 사라질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방송가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트로트 예능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반응이 이미 적지 않게 표출되고 있다.

 

대중음악웹진 이즘(izm)의 김도헌 편집장은 싹쓰리의 ‘쉬운 성공’이 차트 상위권을 휩쓰는 것은 현재 대중음악의 ‘허약한 현실’을 반증하는 현상이며 이에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지적한다. 매일신문 이화섭 기자는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기 힘든 트로트의 음악적 환경에서 ‘물 들어올 때 노 젓자’ 식의 근시안적 마인드로 일관하는 지금의 유행법이 공들여 쌓은 한국 대중음악의 성취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예능과 방송이라는 음악 외적 콘텐츠에 귀속되어 독립적 성취가 아닌 의존적 성취를 도모하는 음악의 연이은 흥행이 대중음악계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해당 비판들은 어느 정도로 유효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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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지 않은 음악의 완성도와 이를 상쇄하는 회귀 정서, 그리고 이것이 주류가 되도록 지탱하는 콘텐츠의 조합이 내용물의 부실함에 비해 비대한 몸집으로 음악계 한가운데 자리하는 것에 대한 위험은 실재하며, 제기되고 있는 비판 역시 현 상황을 음악계의 발전으로 끌고 나가기 위해 필요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것을 방송이 음악의 판도를 좌우하는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적절한 통찰인지 다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음원 차트 순위가, 유튜브 조회수가, 시청률이 그들이 대중음악의 기준점이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지표라고 볼 수 있을까? 여기서 밀려난다는 이유로 기존의 대중음악이 ‘허약한 현실’을 지적받아야 하는가?

 

방송을 타고 나온 음악들이 그 홍보 효과에 힘입어 차트를 석권할 때 유사한 비판은 늘 등장했다. 2013년 ‘무한도전’을 통해 발매된 ‘강북멋쟁이’가 당시 음원 차트를 석권하자, 한국연예제작사협회는 공식적인 보도 자료를 통해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방송국이라는 대기업이 ‘인스턴트 음악’으로써 기존 음악 시장을 교란하는 독과점 행태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과도하게 비대한 몸집을 가진 방송국이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견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스턴트 음악’이 상위를 차지하는 차트에서 음악 시장의 교란을 읽어내는 것은 비약이다. 차트는 차트다. 좋은 음악을 판별하는 거름망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 순간 많이 듣는 음악이 무엇인지 산출된 결과에 불과할 뿐이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인스턴트 음악‘이 홍보 효과를 보고 차트를 휩쓴다고 해도 그게 대중음악의 ‘허약한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진 못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숱한 차트 조작 논란은 차트에 큰 의미를 부여할 가치가 없음을 거꾸로 증명한 바 있다. 대중음악의 허약한 현실은 ‘인스턴트 음악’에도 밀리는 음악들이 아닌 그럴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시장을 향하여 비판적으로 목도되어야 한다.

 

회귀 정서의 반복에 대한 우려 역시 일리 있으나 대중음악의 후퇴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적어 보인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선택이란 허구적 개념에 가까우나, 어찌 됐든 여전히 케이팝 등 대중음악 시장의 거대한 파이를 소유하고 있는 장르가 존재하는 현 상황에서 ‘싹쓰리’의 음악과 예능으로 인해 재조명된 트로트는 어떤 종류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이며 여기서 대중음악 전반의 뒷걸음을 읽어내기엔 유행하는 맥락이나 시청자를 중심으로 한 소비 주체의 특수성 역시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싹쓰리’와 트로트 유행이 현재적인 문법을 아예 상실했다고 보기에도 어렵다. ‘싹쓰리’는 현재 케이팝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와 아이돌, 주목받지 못했던 인디 뮤지션과의 협업을 시도한 결과이며, 트로트 같은 경우 신곡이 주목받을 정도의 단단한 기반이 마련된 것은 아니지만 새롭게 발견된 음악들의 재조명은 신곡의 출현에 준하는 음악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잊혀가던 과거의 음악을 새로운 세대가 듣고 이를 자양분 삼아 그들의 문법으로 또 다른 시도를 가한다. 송가인이 힙합과 창이 접목된 음악을 가창하고 EDM에 기초한 김연자의 트로트를 학생들이 즐기며 SNS에서 원로 가수들을 '덕질'한다. 재발견으로 인해 확보된 그라운드 내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보편화된 움직임은 아니지만, 회귀 정서의 유행이 음악의 후퇴로 직결된다는 주장을 바로 그 회귀적인 흐름의 주체들이 반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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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쓰리’와 트로트 예능을 향한 비판이 음악 내적인 발전과 변화를 위한 지적이라면 분명 필요하며 온당한 고민이다. 그러나 비판의 방향은 대부분 방송에서 파생된 음악들이 대중음악 전체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는 관점에 기초하여 제기된다. 이는 음악의 성공과 방송의 성공을 철저히 분리해서 보는 시선에서 기인한다. 의문이 드는 것은 이 지점이다. 음악의 성공과 방송의 성공을 분리하여 ‘진정한 음악’의 성취를 가리는 것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유튜브가 음원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영상과 음악이 만나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창조하는 것이 시장의 당연한 관행이 된, 음악이 방송이 되고 방송이 음악이 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말이다.

 

‘싹쓰리’와 트로트 예능의 성공이 90년대 레트로 음악과 트로트의 음악적 성질만으로 이뤄진 것은 물론 아니며, ‘놀면 뭐하니?’와 ‘미스트롯’, ‘미스터트롯’이 끝난 지금 이에 대한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이 아직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음악이 아닌 방송의 성공이라고 하는 편이 가깝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싹쓰리’의 성공은 콘텐츠의 예능적 요소뿐 아니라 이전 세대의 대중음악을 포괄하거나 상징하는 아티스트와 레트로 기반의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와 함께 이뤄졌다. 트로트 예능의 재미는 누구나 쉽고 즉흥적으로 따라 부르거나 감상할 수 있는 트로트의 장르적 특성에서 상당 부분 기인한다. 방송을 배제하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흐름이나 그 중심에는 여전히 음악적 성질이 자극한 향수와 흥미가 있다. 음악의 성공과 방송의 성공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관점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까지가 음악인지, 그 경계의 바깥과 내부를 탐구하고 고찰하는 것이 음악을 평하는 이들의 역할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음악의 순수성을 가리는 과정에서 대중음악의 현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어떤 가능성을 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기우일까. 진정한 음악, 순수한 음악을 가리고 차트에 올라야 할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을 분류하는 이분법적 시각 역시 거대 매체를 통하여 끊임없이 반복되는 콘텐츠 못지않게 편협한 것처럼 보인다. 다양한 음악의 출현을 위한 고민의 과정에 왜 어떤 경로의 음악은 배제되는 알고리즘이 개입되어야 하는지, 그 모순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그 오래된 의문에 대해 성실한 논의를 통한 대답을 기다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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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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