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그 영화, 그 책을 봤다는 걸 까먹지 않기 위해서 해야할 일 [문화 전반]

"어, 나 그 영화 봤어. 헉, 무슨 내용이었지"는 이제 그만.
글 입력 2020.08.3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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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를 본 다음엔 질문을 하자

책을 본 다음엔 필사를 하자.

좋은 작품을 봤다면 배경화면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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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최근에 영화 중경삼림을 잘 봤다고 이야기한다. 왕가위 감독의 홍콩을 배경으로 하는 그 영화는 유명해서 나도 몇 년 전에 찾아본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니 몇 개월 전에 한 번 더 봤다. 그 영화에 대해 생각나는 거라곤 아주 짧은 머리의 길고 마른 여자가 창백한 빛 아래에서 크게 노래를 틀고 움직이던 그 장면하나밖에 없어서. 중경삼림의 이런 저런 장면에 대한 감상을 말하는 친구 앞에서 나는 맞장구만 쳤다. 하, 두 번이나 봤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

 

친구 세 명과 함께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친구의 왓챠 계정을 빌려 왓챠를 보고. 밥을 먹을 때면 맛있는 녀석들을, TV채널을 돌리다가 챙겨보지 못했지만 재방송으로 마주하게 된 놀면 뭐하니를. 어디 그뿐인가. 읽어야 하는 책, 읽고 싶어서 사둔 책, 인스타그램에서 마주하는 친구의 근황소식, 틱톡에서 보게 되는 온갖 동영상 콘텐츠들. 와, 쓰다보니 정보의 홍수가 아니라 거의 쓰나미에 휩쓸리고 있는 거 아닌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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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봤는지는 기억도 못하고, 봤다! 만 기억해버리는 나.

 

 

그만큼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기도 하고, 내 머리는 쉽게 까먹는 기능을 탑재하고 있어 최신 정보를 넣으려면 아주 오래된 정보는 지운다. 결국 나는 ‘무언가를 봤다’는 팩트밖에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그것을 봤을 때 내가 느낀 그 감상은 정말로 장난 아니었는데. 무엇을 봤는지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 때 나 정말 좋았던 것 같은데? 내가 본 것, 내가 느낀 것을 까먹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이라도 붙잡아 보기 위해 여러 방안을 탐구한 결과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을 몇 가지 공유해 본다.

 

 

 

다큐멘터리를 본 다음엔 질문을 하자.


 

2018년 8월 나는 을지로에서 다큐멘터리 감상 모임에 참여했다. 진행자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모두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 진행됐다. 동그랗게 놓인테이블에 둘러 앉아 벽 쪽을 바라본다. 영상을 다 본 후에는 ㅂ메모였는지, 워드 프로그램이었는지를 띄워놓고 흰 화면에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을 진행자가 받아 적었다.

 

 

다큐멘터리룸.jpg

당시 영상을 보면서 적은 필기 (좌) 그 당시 모임에서 나온 질문들 (우) 

필기 사진 오른쪽 위에 생각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써 놓은게 보인다.

나보다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생각을 꺼내는 일이 부담스러웠었나.

 

 

영상을 보고 난 후에 생각들을 그대로 남기는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 앞에서 꺼내야 하는 식이라 굉장히 정제된 조심스러운 생각들을 꺼냈다. 사실 그 때 본 영상들이 속속들이 기억 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왜일까? 음. 꼭 하나의 질문을 해보자는 내가 세운 원칙때문이었을까. 질문을 해야하니까 계속 왜 저러지, 저게 뭐지하는 물음표를 띄운 채 감상했으니까 더 깊게 박힌 게 분명하다.

 

창작자의 의도를 생각하라. 비판적 사고로 보자. 국어 수업시간에 귀에 박히도록 들은 말이지만 그 말을 이제야 실감한다. ‘창작자의 의도’, ‘비판적 사고’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때문에 좀 어려워 보인다. 쉽게 가자. 영화든 드라마든 보고, 질문을 던져보자. 보는 내내 생각을 하자. '나 질문해야 하는데 무슨 질문하지.' 강박을 가지진 말자, 살짝 더 힘을 빼서. '왜 저러지?'정도로만 생각을 해보자. '왜 저렇게 찍었지?' 대학 강의로 50명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긴장해서 볼 필요까진 없다. 힘을 빼자. 내가 떠올리는 생각이 단순한가 주저하지도 말자. 내 생각에 부끄러워하지 말고 무엇이든 좋으니 질문을 만들어보자.

 

 

 

책을 본 다음엔 필사를 하자.


 

책 하나만 추천해 줄래. 살다보면 이런 질문도 종종 받는다. 그럴 때 턱 내놓을 수 있는 자신있는 답. “이거 너무 좋아서 나 필사까지 했어.” 필사까지 했다니. 정말 믿을만한 추천글 아닌가.

 

 

책추천.jpg

실제 대화를 기반으로 구성한 픽션 이미지

 

 

필사. 신뢰도 100%의 추천글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내게도 깊게 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모든 책을 다 필사하진 않는다. 필사는 그대로 받아적는 매우 단순한 노동이지만 상당히 귀찮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니까, 내가 까먹고 싶지 않은 책을 위주로 필사를 한다. 책을 읽다가 한창 빠져드는 와중에 진짜 이거다 싶은, 이게 진짜 쩌는장면이구나하는 그 장면을 볼 때! 그 장면이 좋아서 두 번 세 번 더 읽게 될 때! 이 생각이 든다. 이건 까먹으면 안 돼. 필사하자. (주섬주섬)

 

그러면 다이어리를 펴서 맨 뒷장으로 간다. 시간순으로 채워넣는 다이어리의 앞 부분 말고, 뒷 부분에. 내가 좋았던 낙서, 흔적, 글을 남기는 공간이니까. 필기감이 좋은 펜을 꺼내서 좋아하는 음악을 잔잔하게 틀고. 레디 셋 고.

 

나중에 시간이 더 흐르고 그 책을 떠올렸을 때, 내가 본 책이라는 기억 한 줄에 필사까지 할 정도로 좋았던 책이라는 한 줄을 더 얹게 된다. 문장 보다는 장면을 필사하는 것을 추천한다. 문장은 여러 번 해봤는데 남는 건 키워드나 단어 밖에 없는 듯. 문장만 짧게 남기며 필사했던 시절의 책 상실의 시대. 이와 관련해선 봄날의 곰밖에 기억이 안 난다. 대체 무슨 맥락에서 그 책에서 이 단어가 나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봄날의 곰? 물음표 만 개. 누가 왜 이 말을 했던 거지?

 


필사 다이어리.jpg

왼쪽은 작년 다이어리. 위화의 형제.

오른쪽은 올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조금 더 길게 내가 찡했던 부분을 기록하자. 그 장면의 서사를 살리기 위한 시작점을 잘 찾아서 그 지점부터 시작하는 게 제일. 여기부터야 하는 곳. 그러면 기억이 조금 더 세밀해질 수 있다. 적어도 그 장면에 대해선 묘사를 할 수 있게 된다.

 

 

 

좋은 작품을 봤다면 배경화면으로 하자.


 

좋아하는 그림작가들의 인스타를 팔로우하거나 블로그를 보면 종종 핸드폰 배경화면용 공유글이 올라온다. 이나스피퀘어@Inapsquare, 서오키@okixspace 등등.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골라 배경화면으로 딱. 어떤 작품을 기억하고 기린다기 보단, 이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에 가깝다. 한창 선이 굵고 키치한 그림을 좋아했을 때 팔로우를 시작한 서오키 작가의 그림. 통영의 낮이라는 제목으로 공유된 이 그림은 내가 생각하는 여름의 이미지에 딱이라 여름이 시작한 이래 내 폰 배경화면으로 자리잡고 있다. 보고 있으면, 그래 나 이런 그림 좋아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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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그 배경화면

 

 

이런 식으로 배경화면에 최적화된 이미지들 말고 전시회에 가서 찍어놓은 사진도 좋다. 굳이 배경화면이라고 지정하는 이유는 하루 중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화면이니까. 시간을 확인 할 때, 친구 연락에 답할 때 등 정말정말정말 자주 보니까. 더 자주 보고 기억하자는 의미이다. 볼 때마다 주는 감상이 다르기도 하다. ‘이 사진 찍을 때 옆에 누가 있었는데, 누구랑 같이 간 전시였는데.’, ‘이 구조가 마음에 들어서 찍었지’. ‘액자가 신기하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등등. 기억을 차차 일깨우게 되는 것.

 

 

 

영화를 봤는데 왜 봤다고 말하질 못하니.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몰아치는 감정을 꾹꾹 담아 왓챠피디아로 간다. 영화에 별 점을 주고 한마디를 꼭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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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먼 훗날 우리에 남긴 평

영화가 끝난 직후에 쓴 글이라 아주... (생략)

 

 

쓰다보면 주절주절 한마디보다 길어지긴 하지만. 나중에 이 영화 봤는데 나 어떻게 봤지? 하는 궁금증이 생길 때 그 코멘트가 큰 도움이 된다. 내가 이 영화를 이렇게 봤단 말이야? 다시 봐도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재탕삼탕하게 되기도 하고.

 

이런 경우도 있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 여기 저기에 추천을 한다. 즉시 카톡으로 친구들에게.

 

"야 이거 꼭 봐라 !!!!!!!"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낸다. 하루이틀 시간이 흐르고. 한 삼사주 지나면 반응이 온다. 너가 추천한 거 봤는데 좋더라. 잘 봤어. 그러면 나는 음? … 그 영화가 무슨 내용이었더라하며 가물가물한 기억을 겨우겨우 끄집어 낸다. 분명 내가 감명 깊게 보고 추천한 영화인데, 추천을 받고 본 친구와의 대화를 길고 깊게 하지 못하는 해프닝.

 

내가 추천한 영화에 입 한마디 벙긋 못하는 일은 이제 그만.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루고 난 후 몇 개의 단어들만 남기고 텅 비어버린 머리를 붙잡고 허탈해했던 건 진작에 안녕. 하기 싫은 공부는 억지로 쑤셔 넣었던 거라서 잊었던 셈 치고. 수동적으로 배우고 외워야만 했던 것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배우고 감상하자.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은 어떻게든 더 오래 가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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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제일 좋았다고 말하는 영화에 깊게 공감하게 대화할 수 있게. 그 당시 영화를 봤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게. 당시 그 영화에 집중하며 여러 감정을 느꼈던 내 자신이 아깝지 않도록, 다시 생각날 수 있도록. '그 영화 나도 봤는데' 가 아니라 '그 영화 나도 봤어 + a '로 말할 수 있도록.

 

 

[우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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