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할리우드와 시월드 사이에서 [영화]

<우먼 인 할리우드>와 <B급 며느리>
글 입력 2020.08.2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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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해야 하는 일과 여자라서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이제 지겨울 정도로 익숙하다. 여자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불평등에 대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는 성차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지했던 것이고, 이제는 성차별과 성범죄를 인식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전보다 쉬워졌기 때문에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관행처럼 답습되어 온 성차별을 하나하나 묻고 따지는 것은 때로는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변화를 요구하는 정당한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귀찮은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정작 변한 것은 없다는 생각에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동하는 이가 있다면 변화도 있다. 행동하는 여자들이 등장하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는 무력감의 구덩이에 동아줄을 내려준다.

 

우먼 인 할리우드와 B급 며느리는 너무 당연시되어 문제를 인식하기부터가 쉽지 않은 성차별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다큐멘터리다. 2018년 제작된 톰 도나휴 감독의 우먼 인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의 배우, 작가, 감독 등 영화인 96명의 인터뷰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 수집된 데이터를 통해 스크린 안과 밖에서 여성을 억압해온 성차별 문제를 지적한다. 2017년 제작된 선호빈 감독의 B급 며느리는 한국의 며느리인 김진영 씨와 시어머니 간의 갈등을 다룬다.

 

우먼 인 할리우드는 할리우드 미디어 산업 전반을 다루고 있고, B급 며느리는 선호빈 감독의 주변 인물에게 초점을 맞춘 사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편의 영화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편의 영화 모두 행동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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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할리우드는 전 세계의 영화계를 장악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여성은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성적으로 대상화된 모습으로 등장했다는 점을 역설하며 시작한다. 느와르, 액션, 판타지, 히어로 영화는 대개 ‘강한 남자’의 욕망과 고뇌를 다루며 여성은 그런 남자 주인공을 서포트하는 역할로 등장하곤 한다.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조차 메인 캐릭터는 남성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의 대본이 여성 캐릭터를 설명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섹시한’, ‘예쁘지만 자기가 예쁜 줄 모르는’. 캐릭터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오로지 매력적인 외모에만 초점을 맞추고, 매력적인 신체를 드러내는 방식은 영화를 보는 여자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영화 <레옹>(1994)으로 데뷔한 배우 나탈리 포트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객체가 되는 느낌을 받아왔다’고 말한다. 객체가 되는 느낌을 받고, 그 느낌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은 스크린 밖의 관객도 마찬가지이다. 남성 중심의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보며 자란 여자아이들에게 ‘롤모델’로 삼을 여성 캐릭터의 부재는 곧 꿈꿀 수 있는 세계의 폭이 좁아짐을 뜻한다. 최근에는 여성 주인공을 필두로 한 영화가 비교적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는데,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의 대표 지나 데이비스는 <헝거게임>과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개봉한 이후 양궁 수업을 수강하는 여학생의 수가 대폭 증가했다고 말한다. 이는 미디어에 여성 주인공이 더 많이 등장해야 할 필요성을 증명한다.

 

스크린 밖의 영화 산업에서도 성차별 문제는 만연하다. 남성 주인공 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물론이고, 2018년 미국 개봉 영화 상위 250편의 감독 중 92%는 남성이며, 2018년 흥행작 상위 100편 중 85%는 남성 작가가 집필했다. 그러나 이 극단적인 수치가 남성 중심 영화가 더 좋은 성적을 내기 때문은 아니다.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의 통계를 따르면 2017년 흥행작 상위 100편 중 여성 주인공 영화의 평균 수익이 남성 주인공 영화의 평균 수익보다 38.1%나 높다. <겨울왕국>, <히든 피겨스> 등의 영화가 꾸준히 좋은 결과를 얻고 있는데도 영화 산업이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시스템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감독, 제작자까지 남성 중심으로 구성된 할리우드에서 여성 창작자는 자리를 얻기 어렵고, 어렵게 자리를 얻어 영화를 성공적으로 제작한다고 해도 그다음 영화를 제작하는 데 또다시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이 있다. 지나 데이비스는 할리우드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2004년 연구 기관을 설립했다. 어린이 미디어연구를 시작으로 1990-2005년 전체관람가 흥행작 101편 중 대사가 있는 역할의 72%는 남자이며, 내레이터 5명 중 4명 이상이 남자라는 정확한 통계를 얻었으며 제작자들에게 이 데이터를 제시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구글의 지원을 받아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성별과 대사 시간을 분석할 수 있는 자동 분석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고 이를 사용한 연구에서 2017년 흥행작 상위 100편에서 남주인공은 여주인공보다 화면에 두 배 더 노출되었다는 결과를 얻었다.

 

비평가 모린 라이언은 방송계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방송국 고용 실태를 조사했고, 방송국별로 데이터를 정리하여 고용 불평등 문제가 가장 심각한 FX방송국에 2012-2013년에 고용된 감독 중 89%가 백인 남성이라는 통계를 냈다. 모린 라이언의 연구에서 고용 불평등 문제점을 지적받은 FX방송국은 89%였던 백인 남성 감독의 비율을 2016년에는 49%로 대폭 줄인다. 지나 데이비스와 모린 라이언의 연구, 그리고 그로 인한 영화계의 변화는 너무 견고하게 형성되어 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스템에도 균열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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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며느리에는 ‘시월드’라는 이름으로 이미 한국의 문화로 자리 잡은 고부 갈등이 등장한다. ‘B급 며느리’ 진영은 시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 시댁을 찾지 않는다.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여느 ‘시월드’ 이야기와 같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집안 대소사’, 특히 시아버지의 생신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고 믿고,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1등이라고 생각한다. 진영이 시동생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식구들이 일하는데 아이스 커피를 먹고 있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진영은 그런 시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결혼하기 전부터 직장에 전화를 걸어 ‘고양이를 키우면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한다거나, 시동생에게 존댓말을 쓰게 하는 것이 진영에게는 스트레스다. 사실 진영이 겪는 문제는 한국의 수많은 며느리가 겪고 있는 문제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여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불려가서 집안일을 하고, 시부모님께는 종종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한국의 ‘시월드’다. 오죽하면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 주부들을 겨냥한 ‘가짜 깁스’ 같은 상품이 나올 정도이니.

 

하지만 진영에게 ‘가짜 깁스’는 필요하지 않다. 진영은 용감하게 시댁에 가지 않는 것을 택한다. 시동생에게 존댓말을 쓰게 하는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진영의 모습은 고부 갈등을 겪는 여성들, 또는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준다. 왜 한국의 며느리는 남의 집안 행사에서 가사노동을 전담해야 하는 걸까? 왜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도 ‘한 식구’라면서 아들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는 걸까? 그리고 대체 왜 이런 갈등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걸까? 진영은 이 싸움에는 복잡한 관계들이 얽혀 있다고 말한다.

 

‘손발 멀쩡한 어른이 넷이나 있는데 왜 나랑 어머니만 그걸 네가 했니, 내가 했니 싸우고 있어야 돼. 엄청 우스운 일이야 사실은.’ 고부갈등이 일어나는 동안 집안의 남자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영화에서 시종일관 소극적인 자세로 등장하기를 자처하는 선호빈 감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몸소 보여준다. 이는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문제이며 남성은 항상 이 문제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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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진영은 이렇게 말한다. ‘난 이다음에 내 위인전을 만들고 말 거야. 내가 불의에 저항한 여자 위인으로 남겠지.’ 어떻게 보면 B급 며느리가 김진영의 위인전인 셈이다. 긴 세월 답습되어 온 시댁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스크린 밖의 여성들에게 진영은 영웅이나 다름없다.

 

할리우드의 여배우와 한국의 며느리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두 이야기의 배경과 스케일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불평등, 부당함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힘, 용기. 또 그녀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되고 그것을 보는 관객이 생긴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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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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