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여름의 방황과 사랑 - 여름이야기 [영화]

글 입력 2020.08.2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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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장마가 지나가고 쨍쨍한 햇볕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낮의 땡볕 속을 걷고 나면 ‘비 오던 때가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야 말로 가장 ‘여름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뜨겁고 너무 밝아서, 동시에 모든 것이 너무 쨍쨍하게 빛나고 있어서 이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여름 이야기》 역시 요즘 같은 여름의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름을 맞이해 프랑스 브르타뉴 주의 휴양지에 머물게 된 한 남자가 세 여자 사이에서 벌이는 갈등과 고민들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영화는 여름의 바다, 여름의 산등성이, 여름의 카페, 여름의 산책로에서 전개되는 사랑의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계획되지 않은 만남들이 반복되고 남자는 고민한다. 이 고민과 여름 휴양지의 풍경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일까. 인물들의 대화와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에릭 로메르 감독 특유의 연출과 프랑스 휴양지의 여름 풍경이 아름답게 조화된 작품, 영화 《여름 이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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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이야기》는 7월 17일부터 8월 6일까지 순차적으로 3주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가스파르는 여름을 맞이해 브르타뉴로 여행을 온다.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8월 15일부터 한 연구실에 출근하기로 되어 있고, 그 전까지 휴양을 즐기려는 것이다.

 

한편 이곳 브르타뉴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인 레나의 사촌이 사는 동네다. 스페인으로 친언니와 휴가를 떠난 레나는 얼마 후 이곳으로 올 예정이다. 레나가 7월 20일 즈음에 이곳으로 오기로 했고, 그래서 가스파르는 17일부터 이곳에 머물며 그녀를 기다린다. 먼저 와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레나와 만나 ‘우에상 섬’으로 함께 떠날 계획인 것이다. 가스파르는 휴양지의 경치를 즐기며, 또 방에서 작곡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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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레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일상에 다른 여자 두 명이 등장한다. 한 명은 카페의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마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던 가스파르와 마고는 다음날 해변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다. 마고가 먼저 말을 걸어 주고 그 기회로 둘은 서로의 처지를 알아가게 된다. 20일 쯤 오기로 했던 레나가 나타나지 않는 동안 가스파르는 마고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점점 더 알아가게 되고, 소심하고 비관적인 가스파르는 마고와의 대화를 통해 마고가 자신을 이해해 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고는 주말에 가스파르를 클럽에 데려가고 이 기회를 통해 가스파르는 솔렌이라는 여성을 알게 된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솔렌은 뭇 남성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사람이다. 또 다시 며칠이 지나 가스파르는 산책을 하다 솔렌과 재회하고 솔렌과, 솔렌의 제안으로 가스파르와 솔렌은 생 말로 섬으로 즉흥여행을 떠난다. 둘은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방으로 들어오는데 가스파르는 자신이 작곡하던 곡을 솔렌에게 선물한다(그리고 이 곡은 원래 레나를 위해 작곡하던 곡이었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 솔렌은 가스파르에게 우에상 섬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원래는 레나와 함께 가려고 했던 곳이다)

 

가스파르는 솔렌의 제안을 수락하고 솔렌과 여행을 떠날 날을 기다리는데, 그러던 중에 레나가 (드디어) 등장한다. 레나를 다시 만난 그는 고민에 빠지고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레나와 솔렌, 그리고 마고(심지어 마고와도 계속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사이에서 가스파르는 갈등하고 영화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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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쌍의 남녀(여자는 계속 바뀌지만)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가스파르는 갈등한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들이 계속 반복된다. 가스파르는 소심하고 감상적이라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한다. 그는 스스로를 지키고 싶어 하고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자신은 먼저 사랑을 받아야만 그제야 상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힘들다고, 우연히 찾아오는 일대일의 만남들이 자신에게는 소중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영화가 전개되면서 계속 관철된다. 레나는 이곳에 오기 전 스페인에서의 여행이 최악이었다고 투덜되지만 가스파르는 그녀의 말을 성심껏 받아준다. 그리고 생 말로 섬으로 솔렌과 여행을 떠났을 때 그곳에서 만난 솔렌의 친척들 사이에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전개되고 이런 모순적인 장면들이 차례로 배치될 때마다 가스파르의 말들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어쩐지 우리들이 관계를 맺으며 사랑하는 모습을 닮아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일상생활 혹은 사회생활에서 벗어나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확고한 관계와 확고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를 맺게 되면 상대에 대해 기대를 가지는 동시에 기대가 좌절될까 스스로를 방어하기도 하는 것이다. 가스파르는 한 사람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좌절된 기대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충족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여름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상황들이 물 흘러가듯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연속적인 고민과 갈등은 가스파르가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스파르에게서 나타나는 ‘확신 없음’의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나타난다. 산책을 하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는다든가, 혹은 어느 날은 자신감을 보이는 모습이라든가,하는 그런 모습들이 굉장히 그럴 듯하게 그려진다. 학위를 마치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전까지의 마지막 휴가 동안 한 소심한 젊은이가 살아가는 짧은 휴가의 시간들이 오히려 아름답게 포장되는 순간들이다.

 

그리고 그런 연유에는 ‘풍경’이 있다. 이러한 상황이 도심의 치열한 일상 속에서 그려진다고 상상해보라. 잘 재단된 양복을 입고 수트케이스를 들고 다니는 한 남자가 퇴근 후 매일 서로 다른 여자들과 만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바람둥이의 형상으로 보일 뿐이다. 에릭 로메르 감독은 흔들리는 사랑의 단상을 잡아내기 위해 적절한 날씨와 풍경 속에서 인물 간의 대화를 그리고 있다. 섬세한 선택들을 통해 완성된 각각의 장면들은 사랑의 다양한 면들, 더 나아가 불편한 면들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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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영상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여름 이야기》에서는 프랑스 한 휴양지의 풍경들, 그리고 젊은이들의 모습이 이국적인 매력을 펼치고 있다. 깔끔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카페의 외양. 파도 속에서 놀거나 비치발리볼을 하거나 태닝을 하며 누워있는 해변가의 풍경. 산들바람 불어오는 해안 언덕의 풍경. 이러한 것들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더 나아가서 주인공들의 패션도 굉장히 볼만하다. 휴양지 분위기에 어울리는 편안한 옷차림이면서도 멋스럽게 입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옷차림들이다. 특히 소심한 남자 주인공인 가스파르마저도 흰색 바지에 얇은 벨트를 하고 있는 멋스러운 하고 있어, 20년도 더 된 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러한 요소들은 눈을 즐겁게 해주고, 반드시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에 깊은 조예가 없어도 영화를 즐길 수 있게끔 해준다.


*

 

《여름 이야기》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이야기’ 중에서 《봄 이야기》와 《겨울 이야기》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이다. 각 계절마다 에릭 로메르의 작품을 한 편씩 감상하는 것도 한 계절을 즐기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한여름의 태양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올해는 코로나의 공포 때문에 어딘가로 떠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집 밖을 나서기 꺼려지는 시간 속에서 여행 대신에 이러한 여름 영화를 즐겨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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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이야기》의 감독 에릭 로메르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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