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주인공이고 지금 퀘스트 깨는 중이야

미쳐버린 시국에서 인생 공략하기
글 입력 2020.09.0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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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시험을 봤다. 이 날씨, 이 시국에 광화문에서는 집회가 있었고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렸다. 나는 시험을 치렀다. 장소는 중학교였다. 감상에 젖을 법도 하지만 길게 늘어진 수험생 줄, 수험표와 고사장을 확인하는 무리, 반복되는 안내방송들에 정신없이 떠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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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한 습기와 따가운 햇볕에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마스크까지 썼다. 간격을 두고 느릿느릿 입장했다. 손소독하고 체온을 쟀고, 굽이굽이 들어간 교실에서 시험을 치렀다. 시험 종료 방송에서는 층마다 차례대로 퇴실하라는 안내를 전했다. 단연 코로나 때문이었다.


10여 분을 기다려 퇴실했다. 각 교실에서 우르르 쏟아지는 무리는 좀비 영화 한 장면을 연상했다. 날씨와 마스크의 환상 콜라보 덕분에 숨 쉴 수가 없었다. 수분을 머금어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사이를 걸어나갔다.


빽빽한 수험생들 사이에서 길을 걷자 온 생각이 다 났다.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코로나로 잠시 묻어뒀던 이전의 고민들이었다. 연이어 터지는 나쁜 소식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저런 일들로 전 세계에서는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고 나도 거기에 휩쓸렸다. 그동안은 드문드문 떠오르는 현실을 외면했지만, 이제는 코로나가 삶 일부분이 되었고 될 거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럴 때면 두 배로 착잡해진다. 못 본 사이 낯설어진 학교에 가고 취업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물을 아주 잔뜩 머금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취업난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의 취준생 인터뷰이가 된 기분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워낙 핫한 소재가 많아 취업난은 거들떠도 안 볼 테다.


더운 날씨에 눈만 내놓은 수험생들이 빽빽했고 그 한가운데를 차들이 헤집어놓으며 지나갔다. 수험생들은 다시 차가 지나간 자리를 채웠다. 여기저기서 클락션이 울렸고, 골목 구석마다 담배 연기가 올라왔다. 사람과 차를 피하는 일은, 균형대 위에 서듯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그들과 닿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헛디뎠다. 버스도 두 번이나 잘못 타서 한 시간 걸리는 집까지 두 시간 반이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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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내내 지근거리는 두통이 있었다. 당장 공부와 시험은 어떻게 쳐내더라도, 어떻게 취업이라는 과업을 달성할 수 있을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가라앉은 기분에서 금방 건져질 수 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못 봤던 사람들이라 더욱 반가웠다. 나와 다른 시간을 살아갔던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성장과 근황, 추억들을 얘기하면서 위로받았고 자극받기도 했다. 내심,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고 옹졸하게 안도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의 고민이 있었다. 또래의 사람들에게 지금은 고민과 선택이 많아지는 시기고, 비슷한 고민에 오히려 풀어내기가 망설여지는 시기다. 대화 주제는 돌고 돌아 결국 이야기 끝은 고민 품앗이, 위로 품앗이가 된다.

 

멋있다고 생각하는 한 친구는 낯선 환경에서의 위치, 적응에 대해서 사유했다. 모두 입을 모아 소위 '인싸'라고 말했던 친구는 오히려 범람하는 인간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다른 친구는 나아갈 길에 대해서, 또 다른 친구는 자신을 이루는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나도 치렀던 시험으로 귀결되는 고민 서사를 풀어냈고 위로를 받았다.

 

관광지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다. 성수기라서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올 정도였다. 12시간 내내 사람들을 감당해야 했다. 가장 힘든 건 손님 응대였다. 이때, 정말 바쁜 가게의 직원이 대체로 까칠한 이유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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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처럼 몰아치는 손님들을 일일이 응대하고 계산하고 포장했다. 광대가 떨리고 팔다리가 저렸으며, 밥맛 떨어질 정도로 진이 다 빠졌다. 문제는 정신적으로 바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오늘만큼의 감정노동을 내일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아찔했다.


가끔 이상한 곳에서 위로를 얻을 때 기분이 좋다. 알바로 지쳐서 늘어진 채 좋아하는 게임 영상을 내리 봤다. 그때 나를 저기 퀘스트를 내어주는 NPC라고 롤 플레잉 해보자며 웃긴 생각을 해봤다. 으레 사람들이 카페 직원을 NPC처럼 여기고 어디 가서 말 못 할 수다를 떨어대는 것처럼 못할게 뭐가 있나라고 생각했다. 손님들이 직원을 감정 없는 NPC처럼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반쯤은 NPC였다.


'나는 타이쿤 류 게임을 한다. 나는 음식을 파는 플레이어다. 레벨업 하기 위해, 적당히 매뉴얼을 지켜 손님들을 응대한다.' 아주 좋은 발상이 됐다. 물론 무례에서 오는 불쾌함과 스트레스는 여전했지만, 금방 나쁜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 있어 다음날이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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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방법이라서, 간혹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무례한 사람들에 응대해야 할 때 종종 이 방법을 쓴다. 체력이 달리는 나에게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고된 일이다. 롤플레잉은 감정노동을 덜어내는 탁월한 방법이었다. 물론 가식 없이 친절하게 대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런 사람들을 선망하면서도 각자의 삶이 있겠거니 싶어 최적화된 방법을 찾았다.


갑자기 아르바이트와 게임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각자의 삶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게임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퀘스트를 깨는 플레이어의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현실의 축소판에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첨가한 게 게임이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너무나도 흔한 말처럼,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고 지금도 하나하나의 퀘스트를 깨고 있다. 당장 내가 인생에서 큰 과업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취업은 메인 퀘스트, 스펙 업은 메인 퀘를 깨기 위한 서브 퀘스트.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사람인 이상, 저마다 고민이 없을 수 없다. 이전에는 접하지 못했던 난관을 마주했을 때 당연히 어떻게 대응하고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더 크고 어렵게 느껴진다. 해결한 고민들과 갈등들은 이미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고민보다 아주 사소해 보인다. 이미 해결한 퀘스트를 다시 클리어해도 보상도 감흥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현재의 고민에 전전긍긍할 뿐이다.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계속 클리어해 나간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도 없이 많은 고난을 마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겪어보지 못한 난관들은 우후죽순 생겨나고 언제나 대응하기 어렵다. 지인이 나름 충고와 조언을 해준다 해도 지인과 나는 본래 다른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쉬이 수용할 수 없다. 공감가지 않는다.


고민과 굴곡 등이 퀘스트라면, 해결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서의 성숙과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퀘스트를 해결하면서 성장하는 캐릭터와 일평생 사유하고 고민하며 성장하는 우리의 모습은 유사하다. 게임은 짧은 시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고 인생은 리셋은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직업을 정하고 장비를 구하며 퀘스트를 클리어한다. 게임에는 공략법이 있지만 정답은 없는 것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즐길 수 있다.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하는 건 결국 나를 어떻게 성장시킬지 방향을 정하고 인생을 설계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고민과 걱정에 대해서 생각해보다가 이상한 결론이 나왔다. 흔하고 일방적으로 긍정적인 말이긴 하지만, 고민이 성장을 동반한다는 말을 던져본다.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 내게 말하는 글이다. 나같이 유약한 사람들, 개복치 인간들에게 이런 셀프 위로도 있다고 소개하는 글이기도 하다.


 

[오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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