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실패의 역사 속에서 나아가는 사람들 [TV/드라마]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Mrs. America)
글 입력 2020.08.2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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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스 아메리카>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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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수 진영 극우 활동가 ‘필리스 슐래플리’를 다룬 정치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가 지난 19일 왓챠에서 독점 공개됐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미세스 아메리카>는 1970년대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 이하 ERA)’ 통과를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과 해당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나선 인물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독특한 건, 드라마가 ‘혁명’이 아니라 필리스 슐래플리를 중심으로 한 ‘반혁명’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미 헌법 제5조에 따르면, 헌법에 수정을 가하려면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연방 상하원에서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수정헌법안이 발의될 수 있다. 그다음은 주 의회의 비준이다. 전체 50개 주 가운데 4분의 3 이상, 최소 38개 주 의회가 비준할 경우에 수정헌법안이 효력을 가진다.

 

ERA는 참정권 운동가인 앨리스 폴이 1923년 처음 발의했다. 50여 년만인 1972년에 연방 의회가 압도적인 표차로 해당 법안을 승인했지만, 입법 시한인 1979년까지 효력 발생에 필요한 38개 주 이상의 비준을 얻지 못했다. 연방 의회가 비준 시한을 1982년까지 연장했지만, 마지막까지 비준 동의안을 처리한 주는 모두 35곳이었다.

 

1970년대는 여성운동의 ‘제2의 물결’을 비롯해 인권운동 등 전반적인 사회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때다. 사회운동가들의 정치적 입김은 강했고, ERA 비준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던 때였다. 특히,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을 통해 여성 자신이 낙태 여부를 정할 권리를 인정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리스 슐래플리가 반대 여론을 만들어내지만 않았어도 ERA는 1975년 또는 1976년에 비준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필리스 슐래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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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스 슐래플리는 1952년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도전장을 냈지만 낙선한다. 1970년 다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민주당 후보에게 패한다. 정치적 경력을 쌓는데 실패한 필리스는 진보와 보수 진영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ERA에 대해 알게 되고, 이를 정계 진출의 기회로 삼아 발 빠르게 움직인다.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반공’에서 ‘반페미니즘’으로 수정한 필리스는 다른 주부들로 구성된 주소록을 이용해 ERA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는 ‘우리의 특권을 빼앗지 말라’(Stop Taking Our Privileges)는 구호에서 철자를 따 ‘STOP ERA’란 단체를 만들고 ERA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1975년 ‘이글 포럼’으로 이름을 바꾼 이 단체는 가족중심주의와 반여성주의를 기저로 활동하며, 거대 보수단체로 성장한다.

 

필리스는 ERA가 비준되면, 여성에게 부여된 ‘특권’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ERA가 남편이 부양하는 집에서 전일제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갈 여성의 경이로운 법적 권리를 빼앗아갈 것'이라는 거다. 또한 가정주부에게 보장되는 각종 사회복지 혜택 등의 ‘권리’가 박탈당하고, 여성이 군 징집 대상이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그는 ERA가 전문직 여성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문직 여성과 가정주부의 대결구도를 강화했다. 여성을 보호해온 법 조항이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중년 여성, 저소득층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ERA 부결 이후 필리스 슐래플리는 보수 진영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오른다. 공화당 후보 레이건은 1980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리스에게 지지선언을 요청한다. 필리스가 구축했던 주소록이 레이건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필리스는 레이건 내각 아래에서 일하지 못한다. 레이건이 필리스에게 원했던 건 '주소록'뿐이었다. 레이건은 필리스 슐래플리의 영향력을 강탈했고, 결국 필리스는 자신이 원했던 것을 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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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스 슐래플리의 삶은 자신이 내세운 가치와 모순적이었다. 여성이고 가정주부였지만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고, 워싱턴 대학 로스쿨을 졸업한다. 레이건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기까지 했다. <미세스 아메리카>의 핵심은 벨라 앱저그의 대사에 담겨있다. “필리스 슐래플리의 진실을 알려줄게요. 그중에 최악은 망할 페미니스트라는 거죠. 미국에서 제일 해방된 여자라니까요.” 맞다. 필리스 슐래플리는 페미니스트였다. 단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기로 한 거다.

 

드라마는 필리스가 '여성'이기 때문에 공적, 사적 공간에서 어떤 차별을 당하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필리스 스스로 모순을 느끼는 순간들을 탁월하게 포착한다.

 

필리스는 성공적으로 ERA 반대 운동을 이끌었고, 이를 통해 권력에 가까워지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레이건 내각의 각료 자리를 얻지 못하고, 결국 가정주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레이건은 필리스에게 전화해 '당신에게 내각 자리를 줄 수 없다'라고 통보하고, 실망한 필리스에게 남편은 묻는다. "저녁 먹을까?" 이에 필리스는 답한다. "6시에 먹을 거야. 항상 그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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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꿈꿔왔던 기회에서 박탈당하고, 정치적 보상을 받지 못한 필리스는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부엌에 앉아 사과를 깎는 필리스의 모습은 여태까지 그가 이루어왔던 모든 일이 허무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결코 응원할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필리스의 실패와 패배에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샹탈 아커만 <잔느 딜망>의 '감자 깎는 장면'을 오마주한 해당 장면은, 가부장적 구조 아래 단조롭게 반복되는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극 중, 그 누구보다도 공적인 일을 하기 원했던 필리스 슐래플리는 결국 가부장이 규정한 성역할에 머무르며 사적 공간에 갇힌다. 자신이 옹호해 온 사회의 여성혐오적 요구를 내면화했기 때문에, 그는 '여성'이 될 수밖에 없다.

 

 

 

여성해방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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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스 아메리카>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필리스 슐래플리이긴 하지만, 드라마는 9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다양한 인물들을 비춘다.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이자 잡지 <미즈>의 창간자 글로리아 스타이넘, 법률인이자 정치인인 벨라 앱저그, <여성성의 신화>의 저자 베티 프리단, 미국 의회 최초의 흑인 여성 의원 셜리 치점 등이 있다.

 

드라마는 단순히 페미니스트 VS 안티 페미니스트의 구도를 내세우지 않는다. 7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 내부의 갈등을 다루는 동시에, 이들이 '교차성'을 수용하기 위해 어떻게 투쟁하고 있는지를 묘사한다.

 

페미니즘 제2의 물결, 여성해방운동은 여성의 연대와 자매애를 강조하면서 출발했지만 갈수록 여성들 사이의 차이가 도드라졌다. 유색인 여성은 백인,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목소리를 내고자 했고, 성적 지향에 관한 입장 또한 분분했다. (베티 프리단은 레즈비언 운동을 비난하며 이를 '연보라색 골칫거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드라마는 이에 관한 일화도 다루고 있다.)

 

특히 에피소드 초반 여성운동의 다른 회원들이 조지 맥거번에게 힘을 싣기 위해, 1972년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셜리 치점을 지지하지 않는 대목은 상당히 흥미롭다. (여성 활동가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정책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후보를 지지했지만, 맥거번 진영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이렇듯, <미세스 아메리카>는 여성 활동가 안에서 각자의 정치사회적 입장이 어떻게 달랐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소수자가 어떻게 배제되는지 보여준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페미니즘 내의 다층적인 면모를 세심하게 포착한다. 각자의 신념과 우선하는 가치가 제각각이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다. 페미니즘이라는 큰 틀 아래 치열하게 논쟁하고, 싸운다. 때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일하며 한 발자국씩 나아간다. <미세스 아메리카>에서 여성해방론자들은 완전무결하지 않다. 하지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연대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존재다.

 

"다 안고 가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자고. 전부 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떠드는 게 무슨 혁명이야."라고 말하는 글로리아의 마음이 유독 와 닿는 이유다.

 

 

 

앨리스 매크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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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스 아메리카>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필리스 슐래플리의 친구로 등장하는 앨리스 매크레이다. 그는 필리스를 따라다니며 ERA 반대 운동을 진행하지만, 점점 이들의 논리에 모순을 느끼고 변화하기 시작한다. 필리스에게 직언을 날리고, 모두가 웃는 상황에서 웃지 않는다.

 

나가서 일하기 싫다며, 우리가 아는 건 다 필리스한테 배운 거라고 말하는 'STOP ERA' 회원들과 앨리스에게 벨라 앱저그는 묻는다. '뭘 배웠나요? 의원들한테 로비하는 법도 그 여자가 가르쳐줬나요? 보도 자료나 연설문 쓰는 법도 가르쳐줬어요? 기자 질문에 대답하고 TV 인터뷰하는 법도요? 예산 편성하고 수지 맞추는 법은요?' 이에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벨라는 마지막 한 방을 날린다. “다들 잘만 일하고 있네요.”

 

이후 앨리스는 1977년 전국여성회의에서 길을 잃고, 자신이 두려워하던 사람들과 마주친다. '낙태를 당했다'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여성, 호신술 워크샵을 하는 여성들, 성 소수자들, <잔느 딜망>을 단체로 시청하고 있는 여성들 등. 여태까지 만나보지 못했고, 막연히 혐오하던 이들의 실제 모습을 본 앨리스는 결국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앨리스는 정장을 입고 운전대를 잡는다. 전화 교환원으로 취직했다며, 남편에게 용돈을 받지 않아서 좋다고 말하면서 이를 '힘이 실리는 기분(Empowering)'이라고 표현한다. 당황한 필리스 곁을 떠나는 앨리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다.

 

앨리스는 여성해방운동가가 아니다. 단지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엿보고,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쓸 수 있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한 것뿐이다. 이는 앨리스의 첫걸음일 수도, 마지막 걸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앨리스 매크레이'에게 달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가상의 인물 앨리스를 내세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세스 아메리카>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담고 있는 인물은 아마 앨리스가 아닐까. 모든 역사의 출발은, 각자의 발걸음으로 시작된 여정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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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집권과 함께 신자유주의, 보수화의 시대라고 불린 1980년대에는 페미니즘 운동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끝났다는 진술이 종종 나타난다. 또한, 이후의 페미니즘과 백래시의 싸움에서 페미니즘은 주춤했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실패와 패배의 기록이다. 여기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리스 슐래플리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 '여성'이라는 이유로 패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패자, 혹은 패배자라고 부를 수 있는 당시의 주역들은 각자의 시간에서, 각자의 공간에서 저마다의 흔적을 남기며 움직였다. 멈추지 않았다.

 

실패의 역사 속에서 누군가는 움직이고 행동했다. 7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 활동가들은 과거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 이상 행사하지 못했지만, 80년대에도 계속해서 성평등 운동을 이어갔다. 이 가운데에는 분명히 앨리스 같은 사람들 또한 존재했을 것이다.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들 말이다.

 

그랬기에 40년이 지난 2017년에 네바다가 ERA를 비준했고, 2018년 일리노이가 ERA를 비준했다. 그리고 2020년, 버지니아가 38번째로 ERA를 비준한다.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하원에선 비준 기한을 폐지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상원에서는 해당 결의안을 채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과거의 이야기와 혁명은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투쟁할 일들은 아직도 남아있고, 여전히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세스 아메리카>를 보며 희망을 엿본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미국의 역사 한 귀퉁이를 다루고 있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이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이슈들을 담고 있다. 지금의 한국과 오버랩되는 장면이 많았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갈 길이 멀어 보이긴 하지만, 뒤돌아갈 수는 없다. 혁명은 이미 궤도에 올랐다.

 

극 중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연설로 글을 맺는다. “변화를 꾀하려면 긴 시간이 걸리겠죠. 하지만 파동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우리와 주변 사람들의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이죠. 그동안 강요당해온 불리하고 억압된 환경을 벗어나려 합니다. 이제야 막 알아가고 있죠, 우리의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의 혁명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되돌아갈 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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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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