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라는 울타리가 남긴 상처 - 연극 '미래의 여름'

글 입력 2020.08.1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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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 나와 함께 따돌림당하는 친구가 있었다. 비리비리하고 맹한 인상의 남자아이였는데, 그 맹해 보이는 구석 때문에 바보라고 불렸다. 반 아이들은 나와 이 애를 연결해주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당연히 그건 치욕을 주려는 행동이었다. 나를 둘러싼 다수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갔지만, 이 친구만은 기억이 난다. 나는 얘를 그 누구보다 싫어했다.

 

물론 그 애는 나를 공격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 부류였다. 오히려 걔는 나를 어울릴만한 친구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도 조금은 그랬었다. 최소한 우리는 아이들의 야유 없이 우유박스를 옮길 때는 웃기도 하고 대화도 나눴다. 하지만 나는 그 애랑 어울리는 행위 자체가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친구들과 지내려고 노력했다. 나도 똑같이 그 애를 바보라고 부르곤 했다. 나는 어쨌건 그 애보다는 `더 나은 왕따`에 속했다.

 

나는 그 애의 얼굴과 함께 나를 향한 선생님의 말씀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애를 멀리하는 나를 보면서 선생님은 "그래도 너만은 그러면 안 된다. 힘들 때는 서로 이해하고 아껴줘야지."라고 말했다. 온정적인 말? 글쎄, 나에게는 무척 잔인한 말이었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선생님은 그 애에게 내가 가지고 있었던 개인적인 공감대와 호감을 칼처럼 벼려냈다. 나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는 그 말을 하는 선생님은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나를 버려뒀던 부류 중 하나였다.


연극을 감상하고 나오면서 뭐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 애의 모습과 선생님의 말씀이 잡음처럼 연극을 바라보는 내 눈에 어른거렸다. 나를 괴롭히거나 방관하던 다수, 나의 나약함을 평가하듯 이야기한 선생님, 그 애를 밟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내 모습. 나를 어떤 말로 평가하려 했던 선생님을 포함해 누가 감히 그것들이 옳고 그른 행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기준에서 비겁자로 불릴만한 행동을 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하건대, 이 일상적인 비겁한 행동에 대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울타리 안에서 내리는 평가는 근본적으로 안도감이 뒤섞인 위선에 가깝다. 애당초 내가 말한 상황의 모든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모두 이겨내고 감수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리뷰에 앞서 주구장창 내 혼란스러운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내 경험이 <미래의 여름>의 주제와 맞닿기 때문이다. 연극이 저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울타리다. 울타리 안 사람들은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고, 울타리 밖 사람들에게 약간의 온정을 베푼다. 하지만 울타리 밖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경멸을 피할 길이 없다. 울타리 안 사람들은 울타리를 부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울타리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소외를 낳을 수밖에 없다. 주인공 미래는 한때 울타리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계를 형성했다. 미래가 고모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미래에게 울타리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나는 이것을 일종의 PTSD라고 부른다-으로 미래는 울타리 안에서 사는 것, 즉 평범한 삶을 선택한다. 평범한 삶이라는 환상은 비전이라는 이름 아래에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내달림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

 

경계의 밖 무언가를 남겨놓고 정신없이 달려온 삶에는 완성되지 못한 퍼즐처럼 듬성듬성 빠진 부분이 있다. 그 퍼즐 조각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가 어린 시절 잃어버린 가능성, 사랑했지만 버려야 했던 것, 저 멀리에서 벗어난 후에야 가까스로 기억해낼 수 있는 것. 연극 <미래의 여름>은 관객들에게 우리가 놓치고 달려온 것들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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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국민학생 미래는 시골의 고모를 무척 좋아한다. 고모는 어른들한테 주눅이 들지 않고 똘똘한 미래를 친구처럼 대한다. 미래는 영어 노래를 많이 알고, 만화도 많이 보여주는 고모를 동경한다. 연극의 초반에는 고모와의 즐거운 추억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연극이 중반으로 달려갈수록 고모의 고단한 현실이 묘사된다.

 

고모는 특별한 직업도, 관계도 없이 집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이나 미래의 아버지는 고모에게 찌짐도 보내고 조언도 하지만 그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미래와 보내는 여름의 세계를 벗어난 고모는 나약하고 불안불안하다.

 

고모가 균형을 완전히 잃기 시작한 것은 그의 옛 연인인 찬우가 등장하고 난 이후부터다. 미래는 번듯한 모습의 찬우를 보면서 고모와의 산뜻한 미래를 꿈꾸며 둘을 이어주려 한다. 사실 찬우와 고모는 연인 사이였으나, 찬우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결별한 사이였다. 찬우는 자신을 삶 전부로 생각하는 고모와 장애인 형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을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로부터 도피하듯 서울로 상경하고, 서울 여자와 결혼하고 난 후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

 

고모는 찬우를 잊지 못했는지, 유일하게 믿었던 인간관계에서 느낀 배신감이 컸는지 집에 틀어박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살아간다. 찬우는 그런 고모에게 그만 자신을 잊으라 이야기하고, 어른들의 자세한 속사정을 알아챈 미래는 큰 충격을 받는다. 우상이었던 고모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추락하면서, 미래는 자신의 애정을 애달프게 요구하는 고모의 손을 무시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고모와 연락이 끊기고, 미래는 고모와 달리 일반적인 삶을 살아간다. 고모와 사귀면서 유치하게 느껴졌던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적당한 직업도 가졌다. 여전히 고모와 연락이 닿지는 않지만, 어른이 된 미래는 고모를 떠올린다. 고모를 떠올린 어른 미래는 흐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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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고모를 떠올리는 미래에 대한 연출이 인상 깊었다. 미래는 극 내내 국민학생처럼 옷을 입고 고모와의 기억을 회상하는 서술자 역할을 맡는다. 연극은 하나의 무대장치에서 이루어지는데, 현실과 구분하려는 듯이 녹색 덩쿨이 무대를 휘감는다. 이곳이 현실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무대 오른편에는 창문 하나가 있는데, 연극이 끝날 때 가장 오래 빛을 가지고 있다.

 

고모에 대해 회상하던 미래는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곧 간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따라 가기 전 미래는 조금 오랜 시간 동안 창문을 바라본다. 그 후 자리를 떠난다. 개인적으로는 이 창문이 `미래의 여름`과 `현실`을 연결하는 매개체라는 생각을 했다.

 

고모와 달리 미래는 울타리 안쪽의 삶을 살아간다.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부르고 속해있는 곳은 아마 미래가 앞으로 살아갈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미래는 울타리 밖의 사람이었던 고모를 사랑한 기억이 있다. 녹색 덩쿨이 휘감긴 국민학생 시절의 여름은 삶의 주 공간이 아닌 추억에 해당한다. 창문을 통해 기웃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고모와의 기억, 미래의 여름 시절은 울타리 안 사람인 미래가 울타리 밖 사람인 고모를 사랑할 가능성이다. 앞서 기술했던 우리가 잊고 있었던 퍼즐 조각, 달려오느라 무시해왔던 삶의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울타리의 경계 없이 웃고 떠들던 어린 미래, 어쩌면 애달프게 내밀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미래 말이다. 당시에는 버겁고,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잠재력은 어른이 되어 다시 회상한 순간 회복될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미래는 미래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쩌면 이 답답한 세계를 조금씩 허물어갈 용기의 원천을 회복한 것이다. 누군가의 관점에서는 미약한 변화지만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뒤늦게 흘린 고모의 삶에 대한 공감과 회한은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석우가 어설픈 방법으로 한 위로가 고모에게는 유일하게 매달릴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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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여름>이 정말 매우 좋았던 점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고모와 석우는 답답하게 느껴지고, 미래와 미래 아버지, 찬우의 선택은 이해가 간다. 이 작품의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고모와 석우는 관심 밖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래의 아버지는 소외된 고모에게 서울로 오면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하고, 동네 사람들은 찌짐을 보낸다. 찬우는 불편하게 여길지언정 형을 사랑하고 책임지려 노력한다. 석우를 기관으로 보내려는 모습을 이기적이고 비정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석우처럼 진심으로 그녀의 아픔을 공감하지 않는다. 다만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이런 `우리`에게는 온정이지만 `그들`에게는 상처일 수 있다는 연출은 우리가 지켜온 울타리가 한편으로 얼마나 넘기 어려운 벽이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동정에 대한 철학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몇몇 철학자들은 동정이 가진 위선을 비판했다. <미래의 여름>은 그것이 위선인 이유를 우리와 너희 사이에 갈라진 울타리 때문이라고 답한다.

 

연극의 메시지는 오늘날에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는 살아가기 위해 투쟁해왔다. 새로운 세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가부장적인 구조와 성공 제일주의는 그들이 살아가기 위한 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때는 경멸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그들의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돌아볼 틈 없이 달려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시절이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대적인 풍족을 누리게 된 우리는 그들이 남긴 유산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미래가 고모를 떠올리듯, 나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울타리 안에서 많은 안도감을 얻어왔지만, 그만큼 모순과 통제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문득 그 애의 삶이 궁금해진다. 어른이 된 그 애는 여전히 우유를 나르면서 농담을 던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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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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