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여자들 [도서]

반다나 싱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김보영 <역병의 바다>
글 입력 2020.08.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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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영역의 이야기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몫이다. 오직 상상으로만 실현 가능한 세계라는 점에서 SF 소설은 선구자적인 성격을 가지며, 그 주인공이 여성일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억압으로부터 탈피하는 여성의 모습이 모험가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험하는 여자들이 등장하는 반다나 싱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와 김보영의 <역병의 바다>를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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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싱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는 한국에서 2018년 출간된 동명의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소설이다. 자애로운 어머니이자 조신한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온 카밀라는 어느 날 자신이 행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남편 람나스에게 선언한다. 자신은 행성이며, 행성에게는 옷이 필요 없고 태양이 필요하다고.

 

40도가 넘는 뜨거운 날씨에도 정원에 나가 작열하는 태양을 온몸으로 맞고 작은 곤충들을 토해내는 아내의 기행에 람나스는 충격을 받는다. 병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으나 의사는 카밀라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하고, 카밀라는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한다.

 

카밀라는 람나스가 보지 못하는 것, 지구 바깥에 있는 것들을 보고 있다. 그러니 람나스가 카밀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카밀라가 자신이 행성이라고 선언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람나스 뿐만이 아니다. 반다나 싱의 소설에서는 객관적,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물리학을 전공해 물리학 및 지구과학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고, 아무도 밟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발견하는 인물들을 창조해낸다.

 

그중에서도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는 우주를 향한 인간의 호기심과 경외감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카밀라가 자신을 우주적인 존재와 동일시한다는 점, 그리고 결국 자신의 내부에서 샘솟는 생명력에 이끌리듯 우주로 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소설은 타인에 의해 ‘아내’와 ‘엄마’로 정의되던 여성이 인간이 아닌 것으로 자신을 재정의한다는 점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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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싱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나아가는 여성을 그렸다면, 김보영은 <역병의 바다>에서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떨어져 버린 여성을 그린다. 여기에서 모험은 좀 더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역병의 바다>는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새로 쓰는 프로젝트인 ‘러브크래프트 재창조 프로젝트(Project LC.RC)’ 시리즈 중 하나로, 조카와 여행을 갔던 무영이 사고에 휘말리며 전염병이 퍼져 있는 마을에 고립되는 내용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인스머스의 그림자>를 바탕으로 하는 이 소설은 생김새가 어류처럼 변해가는 ‘동해병’ 환자들을 격리하기 위해 마을 자경단원으로 활동하는 무영을 중심으로 하여 해저화산 폭발 사고에 얽힌 비밀을 풀어나간다. 경호원 일을 하며 다져진 운동신경으로 자가격리 규칙을 위반한 환자들을 저지하는 무영의 모습은 판타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곤 하는, 황폐해진 마을을 구원하기 위해 등장한 전사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러브크래프트 재창조 프로젝트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으로 서술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다시 쓰기 위해 고안된 것인 만큼, 이 소설에서는 이전까지는 주로 남성들이 차지했던 주인공 자리를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차지한다. 무영은 조카를 잃고 난 뒤 사고의 비밀에 처절할 정도로 몰두한다.

 

조카를 잃은 날 바위산 너머로 목격한 형언하기 어려운 생김새의 괴생명체가 이 모든 재앙의 원인에 있다고 믿는 무영은 결국 배를 타고 그 괴물을 향해 돌진한다. 무영이 파괴한 괴물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으며 동해병에 걸린 이들, 즉 인간의 상태를 벗어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와 <역병의 바다>에서 카밀라와 무영은 기존의 논리와 질서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다가간다. SF 장르의 새 지평을 연다는 평을 받는 반다나 싱, 김보영 두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창조한 세계의 강인한 여자들은 두 작가와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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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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