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늘 그렇듯 내용이었다. 혹은 저자이거나. 책 자체나 책을 읽는다는 행위,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책을 앞에 두고 짧은 시간 고민의 부재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다 멈췄다.
세상의 모든 책덕후를 위한 카툰 에세이. 표지에 적힌 문장을 보고 '내가 책덕후였나...' 또 고민했다.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그려진 카툰 에세이라고 해서 가볍게 펼쳐보기에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종의 서약 같은, 책에 대한 경건한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여유로운 오후에 괜히 멀리 있는 큰 서점에 들러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고, 메모장에 읽고 싶은 책을 한가득 적어놓고, 주기적으로 새로운 책을 읽어야 하고, 좋아하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힌 책장을 보면 괜스레 뿌듯하고, 책에 흠집이라도 날까 가능하면 집에서만 책을 읽는 나를 떠올렸다.
그래 이 정도면 덕후는 아니라도 좋아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가벼운 미소가 지어졌다. 일러스트가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컷 한 컷 지나며 든 생각은 '정말 내가 이 책을 읽어도 될까?'였다. 책에 대한 작가의 진심 어린 애정 그 자체로 쓰인 책이었다. 마냥 미소를 짓고 가벼이 페이지를 넘기기엔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 타인의 책장 >. 책을 가까이하고 난 후 내가 종종 다른 사람들이 읽는 책으로 그 사람을 판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입는 옷은, 사는 집은, 읽는 책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들로 내가 정의 내려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판단의 기준은 판단을 내린 사람이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전공에 파묻혀 살던 탓에) 사람들의 옷을 향하던 내 시선은 사람들이 읽는 책으로 옮겨갔다. 그 시선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큰 가치를 두는 건 책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 에피소드를 보고 한글판 제목인 '책 좀 빌려줄래?' 만큼이나 책의 원제 'I Will Judge You by Your Booksehlf'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소설 롤러코스터, 앰퍼샌드의 모험, 셰익스피어 작품의 필수 요소, 잃어버린 펜들에게 바치는 시 등 무려 14개 주제, 84개의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그 작은 그림들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소리 내어 웃게 만들기도 하며 새로운 책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는 새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를 맡고 책을 넘길 때 바스락거리며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책 그 자체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책은 금세 끝이 난다. 보통의 경우에는 책을 다 읽고서 바로 책꽂이에 꽂아두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그럴 수가 없었다. 괜히 다시 책을 뒤적거리며 마음에 드는 부분을 한 번 더 보고 읽었다.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일러스트와 글이 장난스러우면서 사랑스러웠다.

책 도입부에 나오는 독서가의 변천 단계. 나는 지금 5~8 단계를 오르내리고 있는 것 같다. 기대를 하고 샀던 책에 실망하고 한동안 책을 읽지 않다가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나고 다시 실망하고. 하지만 관둘 수 없는 것. 그 과정이 마치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모습 같기도 했다.
책과 함께 하는 나날의 반복 속에 '내가 정말 책을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때 예, 아니오 같은 단답 대신 깊은 마음속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 그리곤 다시 새로운 책을 찾아 읽고, 새로운 글을 쓸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그런 책이다.
다시 표지를 훑어본다. '세상의 모든 책덕후를 위한 카툰 에세이'는 책을 설명한 완벽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책 좀 빌려줄래?'라고 묻는다면 책을 꼭 안고 난처한 내 표정을 짓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이렇게 매력적인 책은 직접 사서 두고두고 보는 게 더 낫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