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울도 예술이 되나요? [시각예술]

뭉크의 작품으로 내 마음 위로하기
글 입력 2020.08.0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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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탄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곧잘 계절을 타며 사계를 보낸다. 특히 여름이면 더욱 그렇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마음 한편이 불안해진다. 우울은 세상이 어두운 틈을 타 은밀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수차례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우울은 사람을 피폐하게 한다. 바닷물처럼 헤어 나올 수 없게끔 밀려 들어와 온몸을 적시지만 마음만은 버석하게 말라비틀어지도록 만든다. 평소라면 별 일 아니라고 넘겼을 일도 우울에 잠겨 있는 날이면 '별 일'이 되어 우주 끝까지 쫓아와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울도 습관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성적인 우울을 앓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아마 나도 그중 하나인 것 같다. 나는 감기 대신 자주 우울에 들었다. 예전에는 아주 고통스러웠던 것도 같은데, 시간이 흐르며 언젠가부터는 일상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치 창 밖을 보며 '비가 오겠구나.' 생각하듯 '우울이 곧 찾아오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지경이다.

 

우울에 들면 기본적으로 무기력 해진다. 사람마다 증상은 다 다르겠지만 일단 나는 그렇다. 몸은 그렇게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주제에 머리는 핑글핑글 돌기 시작한다. 스쳐지나 보내던 작은 생각 하나까지도 잡아채서 곱씹고 또 곱씹는다. 필요 이상으로 생각을 하다 보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몸이 쉽게 피로 해진다. 그런 날이 길어질수록 타인은 모르게 혼자 외롭게 건조해지는 것이다.

 

웃기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우울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우울의 산물을 말이다. 마음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어떻게 하든 그것을 뱉기 위해 애를 썼다. 어느 날은 시를 지었고, 어느 날은 일기를 썼고, 또 어느 날은 그림을 그렸으며 그 모든 게 안된다면 남이 만들어 놓은 음악을 들으며 음절 하나하나를 내 것처럼 삼키는 날도 있었다.

 

우울이 실제로 창작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쨌든 인간은 감정의 격동을 끄집어냄으로써 그 시기를 견딜 수 있으리라는 무고한 희망 따위의 것을 갖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우울할 때 즐거운 음악으로 감정을 환기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둡고 눅눅한 감정일지라도 그것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한껏 끌어안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슬프고 아플 때는 그렇지 않은 순간이 올 때까지 많이 슬퍼하고, 많이 아파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스로 내 안의 것을 풀어내기도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밝고 희망찬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도 많지만, 예술가 본인의 분노나 불안, 상실, 우울과 같은 내면 깊숙한 곳에 잠긴 어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위로를 전하는 작품도 있다.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운 시기면 다소 난해하여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할지라도 감정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작품들에 더 눈길이 간다. 형체가 없는 내면의 것들을 꺼내어 두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공감과 위안을 얻고 모난 감정을 다듬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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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알 만한 이 작품은 우울과 불안,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끌어안고 예술로 승화한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이다. 붉게 회오리치는 배경과 위태로운 난간 앞에서 불안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을 그린 이 작품은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고독과 불안, 우울과 같은 감정들은 뭉크의 작품 대부분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따라서 뭉크의 작품을 보면 인간의 정신적 고통을 시각적으로, 그리고 아주 직관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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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는 어린 시절 일찍이 어머니와 누이를 폐결핵으로 떠나보내고 우울증세로 방황하는 아버지를 보며 매우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절망에 그치지 않고 가족의 죽음을 예술로 승화하고자 했다. 침대에 누워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누이를 그린 <병든 아이>를 통해 죽음에 대한 그의 슬픔과 공포, 절망, 그리움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는 사람이나 뜨개질하는 여인이 있는 실내 정경을 그려서는 안 된다. 숨을 쉬고 느끼며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존재를 그려야 한다.

 

- 뭉크

 

 

그 이후에 이어진 삶도 평탄치 않았다. 뭉크는 자신의 우울과 불안으로 연인과의 사랑을 연이어 실패하게 된다. 그렇게 세 번이나 죽음에 비하는 상처를 받게 된 뭉크는 여성을 파멸의 존재로 여기게 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간다. 이 모든 실연의 고통 역시 작품으로 그려내며 예술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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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는 그야말로 자신의 삶의 고독과 우울, 불안을 한데 뭉쳐 예술로 승화한 대표적인 예술가 중 하나이다. 뭉크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죽음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만큼 감정의 결이 생생히 드러난다. 그래서 내 감정이 통제 없이 마구 흔들릴 때 그의 작품을 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림이란 한 '순간'을 박제한 것일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실감 나게 예술가의 호흡이 드러날 수 있는지 신기하다. 어쨌든 그들의 재능으로 그들의 삶에서 백 년도 훨씬 떨어진 지금에 살고 있는 내가 위로받게 되다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예술에 소양이 깊은 것도 아니고, 매일을 예술과 환희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늘 예술을 사랑하고 싶다는 방향을 알 수 없는 감정에 취해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 이런 순간, 그러니까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하고 방황하는 순간에 예술가에게 진 빚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대와 인간의 감정을 공유하고 연대하는 이 묘한 기분은 도무지 혼자 남아 울고만 있을 여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고독과 우울, 불안, 방황과 같은 온갖 연기 같이 자욱한 감정들을 들여다보며 이해하고 싶다면, 어떤 작품이든 앞선 이들의 감정의 산물에 빚을 지길 추천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비가 참 많이 내리고 있다. 올해의 여름과, 우울도 무사히 잘 넘기고 다음 계절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곁에는 늘 삶과 감정의 결을 나누는 예술과 예술가가 함께하길 바란다.

 

 

삶에 대한 두려움은 필요하다. 불안과 질병이 없는 나는 방향키 없는 배다. 내 고난은 나 자신과 예술의 일부. 그들을 나와 구분할 수 없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나의 예술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고통들을 간직하고 싶다.

 

-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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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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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ㅇㅇ
    • 저도 우울할 때 같은 감정을 공유할 예술을 찾게 되더라고요. 최근 제가 느꼈던 감정이랑 너무나 비슷해서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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