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원한 봄의 노래 [문학]

90년대 문예사조를 담은 윤대녕의 상춘곡
글 입력 2020.08.0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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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문예사조


 

시대를 이끄는 중심 이념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다. 개화·광복·통일·민주화 등 각 시대마다 중심 이념은 달랐고 이념을 대하는 각자의 태도 또한 달랐지만, 어느 시대에나 중심 이념은 존재한다. 그러나 90년대가 되자 어느 순간 이념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것은 곧 목표가 사라진 시대, 맞서 싸울 적이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 직후, 전후 4·19혁명 직후의 시대는 각각 새나 라 건설, 전후의 상처 치유와 근대화, 민주화 등 새로운 이념이 있었다. 오랜 갈망 끝에 민주화가 수행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90년대의 문학은 더 나아갈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현실 변혁을 향한 정치적·이념적 열정이 점차 문학 창작에서 후퇴되면서, 그동안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여러 방식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개인 주체들의 사적 체험과 내면 고백들이 소설 형성의 중요한 인자로 부상하면서, 90년대 소설은 정치적 열정이나 이념의 실천을 강조하기보다는 개인 주체의 욕망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담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중 하나가 바로 윤대녕의 <상춘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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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Of Everlasting Spring : 상춘곡


 

<상춘곡>의 줄거리는 이렇다. ‘나’는 봄이 되어가는 날, 동백이 아직 피지 않았을 무렵에 선운사 동구의 한 여관에서 동백이 피기를 기다린다. 7년 만에 온 선운사에서 ‘나’는 자신을 선운사까지 오게 만든 여인, 첫사랑인 란영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의 내용이 바로 이 책 상춘곡 자체이다.

 

‘나’는 란영을 10년 전 스물여섯 살 때 고교 시절 미술 선생님이자 이제는 화가로 활동을 하는 인옥이 형으로부터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이날 인옥은 취해서 먼저 돌아가고 ‘나’와 란영은 남아서 술을 좀 더 마신다. 그리고 ‘나’는 란영을 데려다주게 된다. 데려다주는 사이에 란영의 어떠한 말이 ‘나’를 자극하게 되고, ‘나’는 머리를 밀고 선운사로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보름 후, 란영은 선운사로 내려와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선운사에서 란영은 ‘나’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묻지만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서울로 올라가 살자고만 답한다.

 

다음 달 ‘나’는 서울로 올라와 다니던 학과에 추가 등록을 하고 며칠 후에 란영에게 전화를 걸어 만난다. 6·29선언이 있던 해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란영의 모습을 본 ‘나’는 란영이 “꽤나 열심인 운동권”이며 “아직 현역”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6·29선언이 물러가고 가을 학기가 시작될 때 둘은 다시 만난다. 그러나 란영은 ‘나’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후에 ‘나’는 란영이 같은 과 대학원 선배 중 시국사범으로 수배 중인 사람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몇 년 후 ‘나’는 인옥에게서 란영이 이혼을 하고 애까지 뺏겼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인옥과 함께 란영을 만나러 간다. 함께 밥을 먹으며 란영은 후에 벚꽃이 피는 날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나’는 봄을 기다리기 힘들어 먼저 선운사로 내려간다. 그리고 거기서 란영에게 편지를 쓴다.(소설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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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색, 빛, 향



 

“굉장히 아름답고, 또 부드럽고, 유려하고 그래서 그 어떤 정말 언어자체가 문학적이라는 느낌을 주죠.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문체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죠. 또 주인공이 그 여자와의 일을 생각해 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아름답고도 회상 적이고 모든 일을 자기에 마음의 상태로 자기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게 시죠. 그래서 윤대녕의 상춘곡이 소설이면서도 시인 것 같다. 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방민호 교수

 

 

소설에는 ‘나’가 목소리(음)에 관련해 드는 생각들을 보여준다. 소설에 나오는 첫 번째 목소리는 인옥을 보러 간 ‘우리 옷’이라는 술집에서 술집 주인 여자가 부르는 노래이다. 맑고 깨끗한 노래를 들으며 ‘나’는 란영을 생각한다. 십 년 전에 들었던 란영의 명주실 같은 목소리와 칠 년 만에 다시 만난 란영에게 났던 짚신처럼 변해 있는 목소리. “서걱서걱한 목소리”는 비의에 찬 삶에 슬어버린 녹과 같다고 ‘나’는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란영한테서 무언가가 끼어들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 목소리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이던 ‘나’는 란영에게서 분홍과 연두(색)을 본다. 그 색은 ‘나’에게 결핍되어 있던 것이며, 그러기에 사랑의 빛깔, 또는 추억의 빛깔의 색이다. 또한 란영에게서 본 분홍과 연두색은 봄을 연상케 하는 동시에 ‘나’가 성인이 되고 최초로 목격한 자연색이기도 하다.

 

‘나’는 칠 년 만에 만난 란영에게서 “다른 것들이 끼어들 틈”을 본다. ‘나’는 “그 벌어진 틈들 사이로 고운 빛이 소리 죽여 드나들고 있는 것을 보고”있다. 그리고 그 빛에서 아기 돌부처, 도솔암에 핀 동백꽃, 잉어, 아기를 업고 가는 여인을 본다. 그것들은 아직도 ‘나’가 란영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타낸다.

 

“영산적 목조 삼존불에서 퍼져 내린 향내(향)로 이틀이나 내내 신비한 빛에 싸여 있”는 선운사를 보며 ‘나’는 “이제 우리는 가까이에선 서로 진실을 말할 나이가 지났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것은 자주 위험한 무기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깨닫는다.

 

음, 색, 빛, 향을 엮어서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시 같아서 한층 더 아름다움이 부각된다. 방민호 교수님이 말했듯 꼭 시를 읽는 느낌이다. 소설의 제목 <상춘곡>이 찰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을 때 나처럼 다양한 감각에 집중하며 읽어도 좋을 것 같다.

 

*

 

대체로 언제 편지를 쓰는가. 어버이날에 부모님에게 쓰거나, 친구 생일 때 쓰거나, 아니면 연인과의 이벤트 날 때 쓰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적곤 한다. 글로 쓰게 되면 생각을 여러 번 곱씹어야 하고, 그렇게 하니 지금껏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차분히 정리되면서 드러내기 쉬워진다. 혹은 잊지 않으려고 쓰기도 한다. 글을 쓰면 그것이 더 오래 기억 속에 남기 때문이다.

 

‘나’의 편지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한번 더 사랑을 선언한다는 것에서 <상춘곡>은 지금까지의 일을 잊지 않으려 기록하는 행위가 된다. 작품 해설에는 이러한 ‘나’의 행동이 “우연을 영원에다 기록하고 고정시키는 일”, “우연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은 사람임을, 사랑이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사유임을, 그리하여 사랑이 삶의 다른 방식이 될 수 있음을”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연을 기록하여 영원하게 만드는 ‘나’의 행동은 란영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나’의 관점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말은 즉, 란영의 생각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은 후에도 계속 생각나는 건 란영이 끝에는 혼자 있었다는 사실이다. 란영은 ‘나’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것은 6·29선언, 운동권, 화염병, 시국사범의 시대 속에서 사그라진다. 그 후 ‘나’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를 유산하고, 운동권이었던 선배와 연애를 하고, 감옥에서 나온 선배와 결혼하고, 이혼하고, 아들과의 이별을 하는 긴 시간을 거쳐 마지막에, 란영은 포천에서 혼자 지내게 된다. 혼자 지내게 된 상황에서 란영은 지난날들을 계속 곱씹어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포천에서 혼자 지내는 상황과 그전까지의 상황들이 너무 비교되어 힘들지 않았을까.

 

어쩌면 <상춘곡>은 참 이기적이다. ‘나’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적었다 하지만, 반대로 란영의 입장에서는 그게 잊고 싶은 기억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잊고 싶은 기억을 글로 남기는 건 바람직한 일일까. 잘 모르겠다. 그저 궁금한 것은 란영이 그 긴 시간을 거쳐 혼자가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에 대한 것이다.

 

 

[김승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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