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천국'에 가는 법 [TV/드라마]

글 입력 2020.07.2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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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늘 후회스러운 일들로 가득하다. 심지어 때로는 무엇이 후회할 만한 결정이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하기도 한다. 즉흥성, 아이러니와 모순이 이끄는 불확실한 삶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살아있을 때 한 잘못으로 사후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는 게 정말로 옳은 일일까?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도 잘못된 것을 모르는데 후에 이로 인해 벌을 받고, 이를 되돌릴 기회도 없다는 건 너무 잔인한 것 아닐까?

 

주인공이 시간을 되돌리거나, 모종의 이유로 인생을 또 한 번 살 기회를 얻게 되는 모든 이야기에는 이런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결핍이 숨어있다. 살면서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싶어 하는 마음, 후회가 그것이다.

 

오늘은 조금은 뻔한 이 소재에 동화적인 상상력과 유머, 그리고 철학을 잘 섞어낸 드라마,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굿 플레이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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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지 않은 철학 수업


 

인간이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사후세계에 대해 무수히 많은 가정과 믿음이 존재하지만, 그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아무래도 천국과 지옥의 개념일 것이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곳에 가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곳에 가게 된다는 단순하지만 합리적인 설명에 대부분의 사람은 납득한다.

 

<굿 플레이스>의 설정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그 사후세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작품에서는 한 사람의 삶이 끝나면 그가 살면서 했던 모든 일이 미친 영향이 점수로 환산되고, 그 점수에 따라 영혼이 좋은 곳(Good Place), 혹은 나쁜 곳(Bad Place)으로 가게 된다.

 

주인공 엘레너 셸스트롭은 생을 마감한 뒤 굿 플레이스에서 눈을 뜬다. 처음에는 마냥 좋기만 했던 엘레너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이곳의 사람들과 자신이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살면서 살인이나 강도 같은 몹시 나쁜 짓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타적으로 행동한 적도 없었던 자신과는 달리 굿 플레이스의 이웃들은 수많은 생명을 구하거나 한평생 남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실수로 이곳에 잘못 오게 된 거라고 확신한 엘레너는 살아있을 때 윤리와 철학을 전공했던 치디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굿 플레이스가 아니면 배드 플레이스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배드 플레이스로 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 주인공 엘레너가 굿 플레이스에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윤리를 배운다는 게 드라마 초반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굿 플레이스’의 첫 번째 매력이 드러난다. 전직 철학 전공 교수라는 설정을 가진 인물이 주연으로 등장하며, 그가 윤리를 가르쳐서 상대를 갱생시키려고 한다는 내용이 시즌 1의 주를 이루고, 그다음 시즌에서도 ‘더 좋은 사람 되기’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만큼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이 드라마가 진행되며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잘 알려진 윤리 문제인 ‘트롤리 딜레마’부터 칸트, 아퀴나스, 벤담 등 많은 철학자의 개념이 나오는데, 이들이 단순히 대사 몇 줄, 또는 한 에피소드에서만 쓰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성장 과정이나 드라마 전체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아주 철학적인 질문을 이렇게나 흥미로운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다니! 드라마를 가볍게 보기만 해도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에 슬쩍 발 들일 수 있다는 점이 ‘굿 플레이스’가 가지는 첫 번째 매력이다.

 

 

 

가볍지만 천박하지는 않은 유머


 

‘굿 플레이스’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인물 각각의 배경,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이다. 우선 ‘굿 플레이스’는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크게 비틀어 놓는다.

 

완벽한 포쉬 악센트(영국 상류층 발음)를 구사하며 유명인과의 일화를 뽐내기 좋아하는 부유한 집안의 여성은 파키스탄인이고, 춤과 레이싱 게임, 버팔로 윙을 사랑하며 몸은 좋지만 다소 생각 없는 행동을 일삼는 플로리다 남성은 필리핀계이다. 생각이 많고 책을 좋아하는 우유부단한 철학 교수는 세네갈 출신이라고 나온다.

 

이러한 설정은 작품 내 모든 캐릭터가 인종적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인종적 고정관념 없이도 캐릭터에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배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벡델 테스트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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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사후세계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이지, 사실 배경을 하나씩 살펴보면 서로 전혀 접점이 없다. 어떻게 보면 각자 다른 성격 유형의 극단을 달린다고도 할 수 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사후세계 시스템의 맹점을 찾아낸 것은 서로 도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네 캐릭터였다. 이 캐릭터들의 관계는 우정이나 협동심보다는 사랑에 가까워 보인다.

 

남이나 다름없었고, 게다가 처음에는 서로를 싫어하기도 했던 이들이 어떻게 한 가족이 되는지를 보는 것도 ‘굿 플레이스’의 재미 중 하나다. ‘굿 플레이스’에는 소위 말하는 ‘민폐 캐’가 없기 때문이다. 가볍고 유머러스하면서도 기분 나쁘거나 답답하지 않은 드라마를 찾는 이들에게 ‘굿 플레이스’를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다정한' 코미디를 찾는 이들에게


 

하지만 단순히 인종적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혹은 진지한 철학적 질문을 재미있게 전달하기 때문에 ‘굿 플레이스’를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감동하게 한 것은 ‘굿 플레이스’가 선과 악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엘레너를 비롯한 네 명의 인간이 사후세계와 삶을 수없이 오가며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모두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제 어떤 말을 했고,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와는 상관없이, 오늘의 우리는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반성과 성장이란 어느 순간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 악하게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내일 어떤 마음을 먹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이 전생에서 나쁜 일을 하면 그 대가로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는다는 세계관은 인간이 언제라도 발전하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불합리한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고, 인간에게 사후 영원을 결정지을 한 번의 판결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굿 플레이스’는 ‘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굿 플레이스와 배드 플레이스를 나누는 기준에 문제가 있음을 인물들이 깨달은 후, 이들은 기억을 잃은 채 다시 삶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발전 가능성을 증명하는 일종의 시험을 판사로부터 받게 된다. 말 그대로 두 번째 인생을 사는 동안, 그들은 약간의 도움을 통해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굿 플레이스’가 생각하는 ‘선’은 ‘어제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존재’라는 인간의 본질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굿 플레이스’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 도화선이 될 ‘목소리’이지 행동의 가치 총량을 계산하는 저울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이란 단일한 시스템으로 평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얼마나 성장하고 발전했는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이미 한 선택을 돌이킬 수도 없지만,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우리는 언제나 더 나아질 수 있는 존재다.

 

우리가 오늘 하루는 나쁜 선택을 했더라도 내일, 그리고 다가올 모든 날에는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굿 플레이스’의 주제 의식은 거기에 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의 기준 역시 같은 곳에 있어야 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삶이 죄 하나 없이 무결할 수는 없다. 아주 작은 거짓말 하나조차도 해본 적 없는, 완벽하고 선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한지 악한지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나아지려는 마음’, ‘보답이 없을 때조차도 더 윤리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의 유무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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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존재와 삶의 의미, 그리고 선이라는 주제는 너무나 보편적이지만, 내가 ‘굿 플레이스’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시선 때문이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도 엘레너, 치디, 제이슨, 타하니는 여전히 인간으로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마침내 굿 플레이스에서 평안을 찾은 것은 그들 모두가 이상적인 선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즉 굿 플레이스에 어울리는 완벽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어제의 그들 자신보다 더 나아졌기 때문이다.

 

‘굿 플레이스’가 보여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아주 따스한 시선은 인상적이었다. 속 깊은 코미디를 찾는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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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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