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OTEA] THE MOON 18: 개와 늑대의 시간, 분열된 마음

글 입력 2020.07.1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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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샤워를 하면서 샤워실 한구석에 박혀 있는 못을 하나 발견했다. 박혀있는 못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그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보인다. 시력이 나쁜 나는 안경을 벗은 순간 그것이 하나의 형태라기보다는 뿌옇고 검은 이미지로 보였다. 그래서 당시에 못은 수평을 왔다갔다하는 벌레 같이 보였다. 나 역시 이 감정에 대해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없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 공포를 느꼈었다.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공포는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상상 속에서 살을 찌웠다.

 

'저 벌레는 나를 향해 날아올까? 저건 무슨 벌레지? 날아온다면 쟤는 세균을 가지고 있을까? 놀란 나는 저 작은 생물을 턱하고 털어내면서 잔인하게 죽이게 될까?'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마주한 모호한 존재는 마음 속에 작은 혼란과 공포가 떠오르게 했다. 내 공포 속에서 벌레는 그 몸에 더 화려한 색을 띠고 더 많은 다리를 달았다. 내 손은 벌써 벌레의 작은 날개를 뜯어낸 것처럼 약간 아려왔다.

 

안경을 쓰고 나서야 그것이 벌레가 아닌 못이라는 것을 알았다. 뱃속을 긁는 감정이 물러나고 나니 안도감이라고만은 부를 수 없는 공허한 감정이 떠올랐다. 하나둘 생각을 정리해보니 비로소 내가 경험한 것이 정체성 혼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호한 존재를 향한 결벽증적 공포와 죄책감의 소용돌이는 행동으로 이어질 만큼 크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안전하고 소독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나는 것은 익숙지 않았다. 콘크리트로 쌓아올리고 타일로 촘촘하게 포장된 건물에서 발견되지 않아야 할 크기의 벌레는 나에게 상상 이상의 무게감을 가졌다.

 

인공물 속에서 발견된 자연물, 통제 속에서 발견된 혼돈,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것은 통제된 인공물에 대해 내가 떠올린 망상에 불과했다. 그 앞에서 나는 발가벗겨진 인간인 동시에 책임과 의무의 수호자인 현대인이었다.

 

오늘 소개하는 카드의 주제는 '불안한 마음'이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암묵적 규칙과 상식에 의해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폐부를 찢고 성장하는 불안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것이 꽃피는 순간 어떤 분열적이고 착란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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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에 찬 표정의 달 아래에 15개의 불빛이 빛나고, 개와 늑대가 달을 보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카드의 하단에는 물속에서 가재가 기어 나오고 있지만 길을 막고 있는 개와 늑대 때문에 조금 머뭇거리듯 몸을 반 걸치고 있다. 길 너머에는 두 개의 탑과 긴 산이 보인다. 카드의 번호인 18은 수비학적으로 1+8, 9로 한 자릿수 중 가장 큰 수이며 끝과 통합을 의미한다. 고뇌하는 달의 표정은 9번 카드인 은둔자를 떠오르게 한다.

 

카드의 전체적인 모티브는 프랑스의 관용어에서 따왔다. 땅거미가 지면서 실루엣만 보이는 시간, 프랑스에서는 멀리 보이는 짐승이 '내가 사랑하는 개'인지 아니면 '나를 물려는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저녁 즈음을 '개와 늑대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 이라고 표현한다. 개와 늑대는 일반적으로 대조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많은 고대 문화와 신화에서 개는 인간의 죽음과 관계되어 있어 눈에 보이지 않은 경험을 경고하는 인간의 수호자이자 조력자이다. 늑대는 다양한 상징을 가지고 있지만, '타뷸라의 늑대'와 같은 늑대인간 모티브와 같이 야성적 본능을 가진 존재가 먼저 떠오른다.

 

서구 사회에서는 본능적 존재를 넘어 하나의 악의 상징으로 늑대를 바라보았다. 홉스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만인에 대해 늑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늑대의 길들지 않는 야성은 잔혹하리만큼 거칠지만, 그렇기 때문에 늑대를 악이라 규정하는 인간보다 순결해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카드에서 두드러지는 개와 늑대의 배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표현처럼 선별하고 구별하는 것에 있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개는 태양의 지배를 받는 의식을 상징하며, 늑대는 달의 지배를 받는 무의식을 상징한다.

 

'이중성'의 모티브는 탑과 달에서 반복된다. 탑은 두 개가 세워져 있는데, 왼쪽 탑은 육체고 오른쪽 탑은 영혼이다. 두 탑 가운데에 떠 있는 달은 익숙하면서도 복잡한 상징이다. 달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위성으로서 예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도가 철학의 표현처럼 ‘잔이 차면 넘치고, 달도 차면 기우는’ 달의 형태 변화에 따른 어둠과 밝음의 자연 순환은 탄생, 삶, 죽음, 부활이라는 순환을 거치는 무한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인간은 달의 다양한 면모 중 한 가지 모습만 볼 수 있다. 앞서 기술한 고요한 달이 가진 무한한 역동은 우리의 무의식을 닮았다. 15개의 불빛 역시 음력 15일 보름달이 되는 달의 위상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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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1916~1956), '달과 까마귀', 41.5x29cm, 종이에 유채 (1954)

 

 

살아가면서 느낀 감각과 경험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어질러진 무의식은 유쾌하지만은 않다. 인격화된 달의 표정이 유쾌하지 않은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타로카드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개와 늑대가 짖는 이 어두운 시간을 절망스럽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 앞서 기술했듯, 이 카드의 숫자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 카드의 또 다른 주제는 고뇌다. 희망을 품은 인간만이 혼란을 겪는다.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만이 슬픔을 느낀다. 괴테는 “노력하는 인간만이 방황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일반적으로 물에서 땅으로 기어 나온다는 것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나오는 것과 같다. 가재는 물의 세계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땅을 기어 다닐 수 있다. 가재 앞에는 길게 뻗은 길이 놓여있다. 은둔자가 선 흰 설산처럼 멀고 먼 통찰의 길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개, 늑대, 가재를 보고 있노라면, 프로이트의 성격 구조 이론이 떠오른다. 충실한 개는 규율을 지키는 초자아적 존재고, 야성을 상징하는 늑대는 원초아적 존재다.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그 중간격의 존재인 가재는 이들을 통합하는 자아다.

 

가재의 상징을 살펴보면, 내가 말하려는 바가 더 확실히 전달될 수 있다. 바다가재는 성장하기 위해서 기존에 입고 있었던 작은 외골격을 벗고 더 튼튼하고 큰 외피를 만든다. 또한 바다의 바닥에 있는 바위와 해초 사이에서 자신을 숨기고 은둔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가재는 재생, 영생, 독립을 상징한다. 그런 가재가 바다 밑바닥을 떠나 지상으로 올라온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가재가 올라왔기에, 달은 고뇌에 찬 표정을 하게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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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 '가재 전화기', (1936)

 

 

어느덧 18번 카드에 이르렀다. 재연재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변명을 해보자면, 이번 카드에 대한 글이 개인적으로 너무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이번 주제는 유독 쓰는 내내 무언가 마음에 걸려 완성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꺼내기 부끄럽고 미숙한 것을 들키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사족과 같은 경험을 서론으로 덧붙이고, 카드의 설명 뒤에 역시 사족과 같은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만큼 이 카드의 주제가 나에겐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구태여 다른 이야기를 끌어오는 대신 나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처음 아트인사이트에 자기 소개서를 보낼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지금까지 연재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글을 쓰는 내가 얼마나 나이브한 이상주의자인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고통스러운 것을 그 자체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에 몰두해왔다. 내가 꿈꿔온 길은 늘 지상에서 가라앉지 못하고 부유한다. 사실 나의 이런 면모는 사회에 진출하기 전 상태에 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때 모두 마음 한켠에 체게바라의 슬로건을 박고 하늘을 바라본다.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청년의 꿈이다.

 

하지만 여정을 시작한 바보가 나이가 들어가는 것처럼, 출발선에 잠들어 있기만 해서는 늙은 육체만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내가 서있는 길은 아직도 출발선이다. 안전한 교육체계 안에서 미숙하게 우상을 깎아왔지만, 어색한 실력으로 만든 우상은 사회에서 제대로 서있는 것마저 못하고 푹하고 쓰러질 것이다. 내가 해야하는 것은 우상을 깎는 것이 아니라, 나의 순진한 이상과 실패로 인한 좌절감을 감내하는 것이다. 가재는 이미 물에서 고개를 내밀지 않았는가.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내가 가진 이상과 가치가 소중한만큼 부끄러웠다. 형이상학적인 표현으로 숨기려해도 내가 가진 불안과 부끄러움을 온전히 숨길 수 없다. 그 혼란한 상태가 나, 그리고 사회 진출을 앞둔 모든 청년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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