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조리함을 뛰어넘은 현실, '누구세요' [공연예술]

희미해진 사람 냄새를 다시 맡을 수 있을까?
글 입력 2020.07.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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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포스터 (게시용).jpg

 

 

연극 <누구세요>

2020.07.01.~2020.07.05.

주최 주관 제작 프로젝트 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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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는 묻는다.

 

 

‘누구세요?’

 

연락처에 찍혀있는 지인과 그렇지 않은 낯선 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현대의 각박한 대인관계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이 연극은 꽤 고찰적이다. “여보세요?”라는 말을 주고받았을 사람들조차 “누구세요?”라는 물음으로 낯선 이로 전환하며 극은 시작한다. 이 극은 각각의 인물들과 분리된 낯선 타인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 안에서 모호해지는 개개인의 정체성까지 파고든다. 부조리의 부조리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연극은 일관적인 시퀀스를 유지하지 않는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집으로 돌아올 통계과장 남편인’ 남자와 ‘언니 집에 놀러 가서 다음 주 월요일쯤에야 오는 마누라인’ 여자는 상황과 시기 등 대략적인 요소로 추측해 보았을 때 서로가 부부여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람’이 배제되어있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둘은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며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로를 경계한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째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며, 이 상황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것인가.

 

이현화 작가의 <누구세요>는 1974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1970년대 사회를 특징적으로 조합해보았을 때 비로소 이 연극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를 얻을 수 있다. 당시 민주국가의 국민은 모종의 이유로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되었고, 산업화 시대가 도래해 곳곳엔 공장이 들어섰으며, 사람 냄새는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한 이 시기에 <누구세요>를 비롯하여 직접적인, 그러나 결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문예들이 줄줄이 발표되었다.

 

그중 최인호 작가의 <타인의 방>은 도시 문물의 상징이자 각각의 똑같은 모습을 지닌 ‘아파트’라는 복제 공간을 통해 가장 안락한 내 집이 그저 ‘타인의 방’으로 전락한 상황을 보여 주며, 인간 소외 현상은 심화하여 인간의 물질화 현상까지 이르게 된다. 살을 부대끼던 옆 사람의 모습조차 새카맣게 잊는 상황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지만, 그 부조리함을 통해 밝혀내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하다고 보이는 작품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내가 아닌 남은 완전히 배제하게 된 현실, 남의 딱한 사정을 눈으로 보고도 이내 외면해버리는 상황은 한 줌 남은 휴머니즘마저 완전히 소멸해 버린다. 이렇듯 당대의 문예들은 산업화 시대의 폐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극단적인 부조리함의 출처를 되짚어 볼 여유가 생긴다.

 

배타적인 상황이 최우선이 되어 내 집에서 남을 쫓아내려고 하는 냉정한 말투, 전혀 소통되지 않는 등장인물의 갈등을 보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바로 인물들의 이름이 한 번도 불리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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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남자, 여자, 남자 A, 여자 A로 분류할 뿐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인물들은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도, 그렇다고 상대방의 이름을 묻지도 않으며 ‘저기요’ 내지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대신한다. 각각의 개별적 특성을 가릴 이름은 지워졌으며 성별로만 남겨진 고유한 정체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권력을 이어간다.

 

1970년대 사회를 주름잡은 공포 정치의 권력은 개인의 생활까지 통제하고, 권력을 거스르는 자에게는 가차 없이 총을 겨누었던 당대의 상황은 연극에서도 고스란히 연출된다. 극 중 경찰인 남자A가 남자와 여자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총을 꺼내 들고,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손을 묶어버리는 모습은 당시의 폭력적인 공권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남자 A, 즉 공권력이 무대 밖으로 나가버리고 남자와 여자만이 무대를 채우는 순간도 상황은 결코 안정적이지 못한다. 공권력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명백한 젠더 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외설적인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저항하던 여자의 의지가 결국 좌절되는 장면에서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곧, 공권력에 휘둘리던 남자가 권력의 주체가 되었을 때 '여성'에게 지배를 행사하는 모순을 파악하였다면 자연스레 스며드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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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극을 2020년 현재로 끌고 와 곱씹는 과정에서 분명히 시대적 어폐가 존재할 수 있다. 이제는 굴복하지 않는 자에게 총을 내밀지 않는 시대가 왔고,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경계를 허물고자 노력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1974년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분명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이 극을 선택한 이유는 60~70년대 문예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인간 소외 현상'이 지속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경쟁은 경쟁을 거듭하고, 지극히 '나'를 위해 '남'을 외면한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차갑게 얼어붙은 냉정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설정한 것이 바로 아내와 남편이 돌아올 '다음 주 월요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시공간이 뒤틀린 현실을 안정적으로 뒤바꿀 다음 주 월요일을 기다리지만, 결코 '다음 주 월요일'이 다가와도 극의 결말처럼 편안치 않을 수 있다는 걸 경고하는 것도 덤으로 이야기한다.

 

작품은 당연시하고 있던 현실에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혼란과 혼란이 가중된 끝에 내 머리를 짧게 스쳐 간 진실은, 내가 나의 지인에 대해서 너무도 안일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공장 물품에 라벨지를 붙이는 것 마냥 누군가를 인식할 때 어디에서 만난 누구, 라는 수식 하나로 분류하여 그 사람만의 메리트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라는 반성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극은 '사람'이 배제된 현실은 이리도 차가울 수도 있다는 것,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휩쓸려 보낼 수도 있다는 걸 경고하는 하나의 메시지로서 다가온다. 차갑디차가운 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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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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