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빚는다는 것에서 느끼는 예술 [문화 전반]

도자기와 예술
글 입력 2020.07.1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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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소망


 

흙을 빚어 탄생한 모양들은 매력적이다. 둥글고, 뾰족하고, 길쭉하고, 납작한 모양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말을 건넨다. 빗살무늬 토기의 길다란 모양은 그 생김새부터 눈길을 끈다. 그 길쭉함은 흙 위에 토기를 단단히 세워 무언가를 담기 위함이 있다. 동그란 바구니 모양의 토기에는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며 탯줄을 담기 위함이 있고, 뼈 가루를 보관하며 죽음 그 이후에도 평안을 느끼길 기원하기 위함이 있다. 이들의 정확한 용도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계획 하에 만들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흙보다 친근한 재료도 없을 것이다. 곡식을 담을 용기처럼, 무언가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흙은 무엇보다 좋은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흙을 만지고, 굽고, 도자기를 빚는다는 건 무엇보다 삶과 연결된 예술이다. 흙으로 표현된 소망들은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그 자체로 삶이 되고, 예술이 되지 않나. 흙을 움직이는 손에서, 그 소망들의 생김새에 따라 그 모양이 부드럽거나, 둔탁하거나, 다양한 형태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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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와 예술의 탄생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 모두를 뜻한다. 지금 인류가 쓰는 것은 ‘자기’인데, 이는 1200도 이상에서 구워져 불순물이 적고, 단단하다. 그 중 청자는 말 그대로 청색을 가진 자기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청자는 중국에서 넘어왔다. 작년 상하이에 여행차 방문했을 때 찾아갔던 상하이 박물관에서 수도 없이 많은 도자기를 봤다.

 

그 하나 하나의 아우라는 청색을 만나 더 극대화되었다. 11세기 청자 꼬리 무늬병, 청자 모란무늬 판, 청자 사자 모양 향로, 어룡모양 주전자… 중국에서 금, 못지 않게 좋아했다던 옥이 도자기에도 새겨지니, 그 마음이 더 푸르게 반짝인다.

 

흥미로운 것은 청자가 만들어진 이유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했 듯, 흙으로 빚는 것은 모든 개개인의 소망이 표현된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자신의 욕구를 위함이었다면, 청자는 ‘주문제작’이라는 과정을 통해, 타인의 욕구를 흙으로 표현했다. 이는 꼭 지금의 ‘주문제작’을 연상시킨다.

 

도자기를 빚는 사람을 따로 둠으로써, 과거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만들었던 것과 달리, 청자는 각자의 수많은 욕구에 따라 예술가의 창의력과 함께 상품이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권력의 표현


 

도자기에 많이 등장하는 것은 ‘용’인 듯하다. 용은 전설 속의, 신비로운 힘을 가진 생명체인 만큼 자기에 새김으로써 자신도 그와 동일시되고 싶어 했던 권력자들의 소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특히 용은 황제만 쓸 수 있었으며, 다른 사람이 용을 쓰는 것이 발각되면 곧 바로 죽음에 처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의 힘을 신비로움으로 포장하고, 박탈될까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이 없다.

 

‘백자’가 가진 하얀색의 빛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체만으로도 숨이 트이게 한다. 그러나 밝음 뒤에는 어둠도 있기 마련인데, 그 당시에 백자 흙을 구하기 위해서는 흙 속의 불순물을 하나 하나 다 빼내어야 했다. 백자 포도문 필통이나 백자 연통연적을 보면, 권력자들이 자신의 붓, 벼루 등을 보관하는 것에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찻잔에도 이 힘이 숨어 있다. 일본에서는 비가 내리면 흙이 섞여 냇물을 아예 마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찻잔에 담아 마시는 물은 자신이 깨끗한 물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해 타인과 자신의 권력 차이를 더욱 부각했던 것이다. 청자, 분청사기, 백자는 그 ‘귀한’ 생김새처럼 귀한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지금 도자기를 떠올리면, 고요하고,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이, 권력이라는 그 이미지의 맥락이 아직도 우리 곁을 맴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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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라는 친근함


 

물론 권력의 표현으로만 기능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는 이름부터 친근한데, 흙 본연의 색을 띠고 있는 이 옹기들은 그 무엇보다 부드럽고, 편안한 냄새가 날 듯하다. 고추장 간장 담는 단지, 개인 화로, 재떨이, 요강, 이 옹기들은 우리 기억을 담고 있다.

 

흙보다 우리에게 친근한 재료가 있을까 싶다. 흙을 만지는 사람들은 그 손의 온도만큼 따뜻한 이야기를 빚어내는 것 같다. 수업에서 흙을 만지며 가장 좋았던 것은, 노동과 예술의 창조성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느꼈던 것이다.

 

예술노동에 대한 담론이 몇 년 째 이어지고 있는 지금, 자신을 위한 노동, 그 속의 독창성과 창조성, 그리고 그것이 곧 나의 독자적인 표현이자 나의 일상을 이어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빚는다는 행위가 무엇보다도 더 예술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삶의 오브제 하나 하나를 더 들여다보게 하고, 마음으로 느끼게 한다.

 

‘자급자족’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코로나19 이후 더 자주 논의되는 것 같다. 착취나 폭력 없는 삶의 방식의 중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 것 같다. 흙은 지구 본래의 모습을 담고 있어, 어쩌면 흙을 빚는다는 것 자체는 그 무엇보다도 예술적이고, 자연스럽지 않나 생각한다.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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