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젠더의 미스테리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7.0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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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만들어지는 걸까 아니면 타고나는 걸까? 젠더에 관한 물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성기로 성별이 정해지는 건 누가 정한 걸까? 애초에 남자 여자라는 말의 어원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젠더는 우리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누가 어떤것이 더 우수한 젠더인지는 사회의 학습으로 배우는 걸까? 단군도 여성이었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그러면 인간의 시초에선 여성이라는 젠더가 더 우수했던 걸까?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여성혐오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을까?

 

*

 

지금 시대는 젠더의 격변기다. 사람들은 이제 여성성 남성성처럼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 던 이분법적 성과 젠더 역할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도, 아니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내 여성성에 대한 공격을 항상 받아왔다. 나는 예뻐야 하지만 예쁜 걸 알고 행동하면 안된다. 정숙하지만 동시에 발칙한 면도 있어야 하고 공부를 잘해야 하지마 지나치게 잘 하는 것은 요구되지 않는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엔 외할머니보다 친할머니를 먼저 뵈야 하고 친가에 가서는 내 집도 아닌 남의 집을 쓸고 닦아야 한다.

 

조상은 같은데 아들은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고 나는 조상에 대한 예우를 갖춰 음식을 나르고 제기를 닦아야 한다. 상은 내가 차리는데 차례나 제사 지낼 때 술은 장남인 사촌 남동생만 따를 수 있다. 언제적 이야기냐고 물을 수도 있다. 예전에는 그랬다. 살면서 시대가 바뀌고 사회적 시선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여성성은 어렸을 때 보다 더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제 남자들에게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더욱더 노력해야 한다. 이제 나는 나 뿐만 아니라 내 후대를 이을 수 많은 여성들을 고려해 행동해야 한다. 내가 화장을 하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공부를 하고 취직을 하는 것도 모두 다 과거의 사회적으로 통용되었던 모습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왜 사회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려 들고 요구하는걸까. 나는 여성이라고 통용되는 성기를 가지고 태어난 것 뿐인데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금에 와서 서로 모순되는 개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개념을 받아들일 수록 가장 원초적인 것, 여성과 남성을 구분 짓는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것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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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에 대한 학습


 

남성의 성기는 흔히 공격이라고 말한다. 공격과 방어적인 성격을 띄는 성기에 대한 이분법적 논리는 사회적으로 남성에게는 그들의 성기에 대한 만족감과 성공감, 여성에게는 그들의 성기에 대한 패배감을 학습시킨다. 자신의 성기에 대해 자신감과 우월감을 가진 남성들은 때때로 그런 모습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공공장소에서 여성을 향해 자신의 성기를 들어내는 바바리맨과 지하철과 버스에서 여성에게 정액 테러를 하는 남성들의 모습들이다. 과연 이러한 모습들이 그들 개인의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이 가진 것은 외형으로 돌출되는 성기지만 외형으로 돌출되는 성기는 곧 그들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여성의 속옷에 사용되는 시스루도 그런 의미이다. 보일 듯 하지만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 여성은 그들의 성기가 노출되면 수치스러움과 패배감을 느낀다. 이는 단순히 성기의 차이라고 보긴 어렵다. 같은 노출이라도 서로 상이한 반응이 도출되고 요구되는 것. 어렸을 적부터 학습되는 패배감이다. 이러한 패배감과 우월감은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에게 시혜적인 태도를 만들어낸다. 시혜적인 태도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의식 중에 드러나는 서열화다. 몰랐던 때와 다르게 알게 되니 보이는 것들이다. 수면위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것들. ‘앎’으로서 상처받게 되는 것들.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2차적인 패배감을 안겨준다. 결국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성의 젠더로서 우리와 반대인 남성의 젠더로 통칭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패배감이라는 소리다.

 

내가 패배감과 분노를 가장 크게 느낄 때는 이러한 서열화와 성기에 대한 차이를 피부로 직접 느꼈을 때이다.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있었던 나에게 사람 많은 버스정류장에서 자기와 술 한잔 하자며 모텔을 가르켰던 이름 모를 중년 남성, 치마를 입었을 때 지하철에서 내릴 때까지 계속해 쳐다보는 노약자석의 노인들, 계단 올라갈 때 일부러 밀착해 걷는 20대 남성, 술 취해서 지하철역에서 앉아있던 나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욕하고 쫒아 다니며 위협했던 남성, 친구의 바바리코트에 정액을 뿌리고 도망갔던 남성과 지하철에서 성추행하고 되려 큰소리로 무고죄로 고소 할 거라며 쫒아 오던 남성까지 나 혼자 알기에 너무 화나고 불공평하며 열 받 는 일들이 많다. 그리고 주변에 이런 얘기들을 하면 모두들 그 남성 개인들이 이상한 것 이라고 말한다.

 

물론 나를 도와주는 남성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 나에게 괜찮냐 걱정해주고 미친놈들이라 욕 하며 자신은 그런 변태새끼와는 다른 사람임을 정말 필사적으로 어필한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피해자가 되어야만 했던 나와 내 친구들은, 그들의 위로가 전혀 달갑지 않다. 어쨌거나 우리는 또 다른 남성의 도움 없이는 이런 피해들을 피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필하는 ‘그런 변태들과는 다른 나’ 의 모습 또한 우리에게는 시혜적인 남성의 형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무능력한 패배감과 분노를 안겨준다.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성기에 대한 자신감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들 스스로의 자신감과 우월감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과연 여성이 그들의 성기에 대해 자기혐오를 갖지 않도록 교육해야 할 것인지, 남성들이 그들 스스로의 성기에 대해 우월감을 갖지 않도록 교육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여성과 남성의 성기에 대해 똑같은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성이 있다. 강용석의 '누구를 위한 제명인가' 를 읽어보면 사회의 위선적인 면이 더 잘 보인다. 이 세상에 똑똑하고 섹시한 여자는 존재할 수 없다. 똑똑하거나 섹시하거나. 여성을 잣대 하는 모든 시선은 시혜적인 남성의 시선이다. 강용석 의원의 제명 또한 결국 그들 당의 밥그릇지키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면들이 날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내가 제일 불편한 것은 사회적 데미안은 여성일 때 더욱 부조리해진다는 것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내 알을 깨뜨리고 맞이한 날것의 세계는 생각보다 부조리하고 생각보다 견고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결국 닳아지는 것은 나인데, 이러한 부조리를 내가 왜 느껴야 할까. 여성이라는 젠더가 그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나를 둘러싼 알이 잘못된 것 같아서 깨고 나왔지만 막상 내가 마주 한 것은 금은 가 있지만 결코 깨지지 않을것만 같은 견고한 벽이었다.

 

 

[조효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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