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나는 종종 나에게 편지를 쓴다

쉼 없이 손을 놀리며 적은, 수신자와 발신자가 같은 편지.
글 입력 2020.07.01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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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나에게 편지를 쓴다. 여기서 '종종'이라 함은 특정한 시기를 가리킨다. 지금의 상황, 사건, 사람이 힘들 때 나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습관 같은 끄적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쓴 다이어리를 스무 살에 다시 살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새 학기를 맞이한 나는 온갖 걱정과 불안을 가득 안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 공간, 규칙 등에 적응하는 과정이 어려웠나 보다. 스무 살의 나는 열일곱짜리의 고민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뭐가 그렇게 무섭고, 어렵고, 힘들었을까.


과거의 자신을 비웃을 수 있다는 것은 곧 현재의 자신이 전보다 자라났다는 증거이다. 고작 열일곱의 낯가림으로 이러한 결론이 나는 게 비약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약이라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성장의 증표다. 과거, 자신의 하루 중 가장 큰 문젯거리를 이제 '그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나를 되돌아보며 깨달았다. 과거의 내가 겪은 일을 미래의 나, 즉 지금의 나는 별거 아니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지금 닥친 어려움도 미래의 내가 보기엔 별거 아닌 일처럼 보이지 않을까.


어떤 사건이 발생한 현시점, 손쓸 방법이 없다고 느낄수록 고통은 배가 된다. 무얼 해야 할지, 무얼 하지 말아야 할지, 해도 좋을지, 참는 게 능사일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구 흔들린다. 사람은 자신의 중심을 잃으면 불안과 부정에 시달린다. 괴로움이 언젠가 덜어지기는 할까? 의구심은 기폭제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공격한다. '지금 이 느낌은 영원히 내가 안고 갈 짐이 되겠지.' 불편한 감정은 구덩이를 파고 자꾸만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좀먹는다.


그런데 이때 관점을 조금만 바꾸어 보자. 컨트롤 할 수 없는 변수는 언제나 발생한다. 굴레에 계속 얽히지 않고 다른 방법을 써본 것이 수신자와 발신자가 같은 편지였다. 즉 '이 정도쯤이야!' 하고 넘길 만큼 자라난 나에게 편지 쓰기. 그렇게 스무 살의 어느 날, 미래의 나에게 첫 번째 편지를 남겼다.

 

이 날을 기점으로 종종 편지를 남기면서, 꽤 듬직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찾아오는 숙명 같은 힘듦에 대처할 방법을 찾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여전히 덜 자란 면이 존재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더 나은 나를 만들어 주고,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위로가 되고, 항상 함께인 존재를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작년, 이 존재를 아예 놓고 싶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자신감 부족. 글을 이토록 오래 써왔으면서 세상에 보여 줄 용기가 없었다. 게다가 가끔 글쓰기가 지긋지긋했고, 실력은 점점 퇴보하는 것 같았고, 나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스레 글을 향한 열망도, 자부심도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의 평생을 함께한 존재를 한순간에 놓기란 불가능했다. 고민 끝에 다른 형식의 글쓰기로 눈을 돌렸다.


영화 제작 동아리 시나리오팀에 들어갔다. 글을 계속 써왔으니 '시나리오'라는 낯선 형식도 금방 적응할 수 있으리란 바람은 곧 현실에 부딪혔다. 소설과 달리 인물의 심리나 감정, 상태 묘사가 없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만 담는다. 전자의 작업이 몸에 밴 터라 관점을 뒤집는 게 어려웠다. 그러나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글은 오로지 한 명의 독자뿐이었다. 나 자신. 아무도 내 글을, 내 생각을 들여다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생판 얼굴도 모르는 이의 사적인 주절거림에 누가 관심을 가질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다만 시나리오를 쓰는 이상 나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는 수밖에 없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 애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었다.

 

그 애의 첫 마디, '좋다.' 그 애는 다른 글도 궁금해했다. 몇 개의 시나리오와 평소에 쓰던 줄글까지 그 애에게 나누었다. 묘사가 좋다, 설명을 잘한다, 어휘력이 풍부하다. 다디단 말만 듣다 보니 왠지 모를 자신감과 함께 궁금증이 생겼다. 다른 사람이 보아도 괜찮은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답을 찾기 위해 전공과 전혀 무관한 미술 비평 수업을 들었다. 이론 시험도 있지만 글쓰기 자체로 평가하는 과제까지 있는 수업. 미술 작품을 선정하여 각자의 언어로 분석·해석하는 과제에 오래 매달렸다. 이 과정을 그 애가 기꺼이 함께했다. 나의 글을 나만큼, 가끔은 나보다 더 꼼꼼히 읽는 그 애.


사실 그 애는 약간 난독증이 있어서 정확하게 글을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만큼 상당한 집중력도 필요하다. 에너지가 소모가 큰일이라서 번거로웠을 거다. 그런데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깨알 같은 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그 애는 나의 두 번째 독자였다. 일주일 동안 수정에 수정을 반복하여 과제를 제출했다. 과제물은 교수님이 개별 피드백을 안 하셨는데, 쉬는 시간에 나에게만 따로 몇 마디 건네셨다. 멋진 문장을 쓰더라, 평소 글쓰기 자주 하지 않느냐, 앞으로도 계속 쓰면 좋겠다. 세 번째 독자가 생겼다.


나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깨달음에 무엇이라도 써서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그릇된 신념을 자신감, 자부심, 열정 따위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위해 서로 얼굴도, 나이도, 그 무엇도 모르는 완전한 타인도 나를 아는 사람들이 건넨 칭찬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감상을 느낄지 알아야 했다. 이때 발견한 것이 아트인사이트, 그리고 아트인사이트 19기 에디터 지원서였다.


지원서 완성에 2주를 매달렸다. 초고는 금방 썼지만, 문제는 언제나 그러하듯 수정 기간이었다. 다 쓴 글을 아예 엎기도 하고, 단락 몇 개를 바꾸기도 하고, 문장의 순서를 재배치하고 살을 붙였다. 애정담아 쓴 문장을 지우고 빈 화면에서 새로 시작하기는 참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흐름이 매끄러운 글, 설득력 있는 글, 생각이 뚜렷한 글을 지을 수 있다면 몇십번이고 지워야 했다.


대망의 발표날. 핸드폰에 메일 알림 하나가 떴다. 나 에디터 붙었어. 같이 있던 그 애는 얼떨떨해하는 나 대신 온몸으로 기뻐하며 당장 케이크를 사러 가자고, 축하해야 한다고 난리를 피웠다. 좋아하는 숫자와 좋아하는 색,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모두 가진 날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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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는 도전의 시작점이었다. 무얼 하기도 전에 움츠러들던 나는 합격의 맛을 보자, '하고 싶다'는 본능에 충실했다. 모든 결과가 긍정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쓰라리지도 않았다. 보완할 점이 나에게도 보였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본 것 같았다.

 

학교생활과 단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도 글은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문화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고 쓰고, 전시를 보고 쓰고, 연극을 보고 쓰고, 영화를 보고 쓰고. 때로는 일이 한꺼번에 몰려 정신없는 나날을 해치워도 그리 괴롭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 때문에 바쁜 것이 좋았다.


노력 끝에는 성과가 따라오는 걸까. 브런치에서 이상한 반응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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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기보다는 의아했다. 구독자 6명인 이 작은 공간을 어떻게 찾아온 걸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카카오톡 채널 영화 탭에 올라온 나의 글을 확인하고서야 잘못된 일이 아님을 깨달았지마는. 이번에도 그 애는 떠들썩한 축하를 보냈다. 곧 조회수 만은 거뜬히 찍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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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같던 그 애의 말이 맞았다. 만 명. 10000이라는 숫자가 짧은 한 단어로 보여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그래도 깨달음은 있다.


누군가 나의 글을 기꺼이 시간을 들여 감상한다. 누군가는 나의 글을 궁금해한다. 누군가는 천천히 글을 음미하며 스크롤의 마지막까지 내린다.

 

이제는 나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 때다. 데미안에서 나오는 '알'은 나에겐 '나의 글에 대한 신념'이었다. 나의 글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고, 어디에 올리기엔 한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나를 알고 애정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볼 만하다는 신념.


개인에서 두세 명이라는 작은 공동체로, 그리고 훨씬 크고 넓은 세상으로. 나의 글이 세상에 널리 퍼짐에 따라 나 또한 자라났다. 겁먹고, 피하고, 주저하던 과거와 선을 긋고, 이제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 사이의 간극을 줄이며 미래의 나를 위한 노력을 이어간다.


편지를 쓰는 행위 자체가 나의 성장을 돕지는 않았다. 다만 과거의 내가 지금보다 자랐을 미래의 나에게 흔적을 남기고, 미래의 나는 과거와는 다른 감정을 느낀다. 나를 과거와 미래로 분리했지만, 결국 나는 하나의 존재다. 편지로 인해 나 스스로 성장했음을 느낀다. 즉, 편지가 성장의 증언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어리숙한 나와 그보다 나아진 나는 알게 모르게 매 순간 성장을 만들어 간다. 경이롭다. 성장한 나와 타인이 만드는 또 다른 성장은 이루 말할 것 없이, 경이롭고도 아름답다.

 

알을 깨어 새로운 관점을 얻었으니 이제 이 아름다운 성장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먼 훗날, 과거의 나를 닮은 이들에게 알을 깨고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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