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두 여인의 평행세계 - 엘레나 페란테의 책 '나의 눈부신 친구'

글 입력 2020.06.25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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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우정은 눈부신가. 이 한 문장이 책을 집어들게 만들었다. 책 <나의 눈부신 친구>의 홍보 문구였다.

 

사실 책을 읽기로 결심했을 때의 난 촉촉한 새벽 감성에 젖어있던 터라, 굉장히 반짝거리고 감성적이며 가슴이 뭉클해지는 우정의 이야기일거라 감히 짐작했었다. 하지만 왠걸. 내가 눈부시다는 말의 정의를 너무 주관적으로 곡해한 것이었을지. 책 속에 펼쳐지는 1950년대 이탈리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찬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연 눈부신 우정이 어디에 피어날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나폴리의 가난한 동네에서는 고리대금업자와 마피아가 힘을 쥐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주인공 레누와 릴라는 숨통을 조여오는 가난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읽어나가다 보니 이해했다. 눈부신 우정이 맞았다. 순수함? 청량함? 그런 눈부심이 아니었다. 빛은 빛이나 다른 종류의 빛이다. 아주 현실적이고, 거칠고, 복잡하며, 때로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우정. 시청 수위의 딸 레누와 구두 수선공의 딸 릴라의 우정은 너무나 치열해서 뜨거운 우정이었다. 찬란하고 따사로운 봄 햇살이라기보단, 거친 삶 속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며 만물을 불태울 듯 맹렬하게 이글거리는 한여름의 볕을 닮았다.

 

*

 

작가 엘레나 페란테. 문학계를 휩쓸고 있는 작가다. 그는 결코 독자들에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이야기로써 자신을 드러낼 뿐. 찾아보니 소설가 한강이 수상해 큰 이슈가 됐었던 영국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올해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 100인 중 한 사람이란다. 오직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인지 페란테의 책은 굉장히 밀도 있다.

 

사실 나폴리 4부작은 단지 레누와 릴라 두 여자의 삶을 그려낼 뿐이다. 어떤 가정 환경에서 살아왔으며, 어떻게 만났고, 이 사회에서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멋드러지게 보여주거나 애써 꾸며내기 위한 노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이 오히려 굉장하다.

 

다만 아주 담백하고 아주 솔직하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까지 단 한번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두 여자의 삶을 읽어가다 보면 성장과 관계의 고통, 1950년대의 역사 현장, 그리고 그 시대를 겪은 여성의 이야기가 내 마음에 빼곡히 생생하게 새겨진다.

 

첫 번째 이야기인 <나의 눈부신 친구> 역시 어쩌면 누구나 겪어왔을 법한 유년기와 사춘기 시절을 다룬다. 소설 초입은 60대가 된 레누가 자신의 친우 릴라의 아들로부터 "어머니가 사라졌다"라는 얘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놀라운 것은 정말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끝까지 극단적이고 제멋대로 구는 릴라에게 화가 난 레누는 누가 이기나 보자, 읊조리며 둘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시청 수위의 딸 레누와 구두 수선공의 딸 릴라는 동네 곳곳을 같이 탐험하는 절친한 친구이면서도 절대적인 라이벌이었다. 사실 릴라는 괴팍하다면 괴팍하고 과감하다면 과감한 강한 성격을 지녔지만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무언가를 곧잘 배우는 명석한 아이였다. 레누 역시 똑똑한 아이였으나 레누는 그런 릴라의 모습에 계속 자극을 받는다.

 

이들의 관계는 레누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더욱 심화된다. 레누가 진학을 선택한 반면 릴라는 이를 포기한 것. 하지만 오히려 릴라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해 레누를 자극하고, 그 질투심을 동력 삼아 레누 역시 명석한 학생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이어진 고등학교 진학, 레누는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공부의 길을 택하고 릴라는 구두를 제작해 집안을 일으키려 결심한다. 비슷한 출발점에 섰던 두 여자의 삶은 점차 다른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다. 릴라는 새로운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스테파노와 결혼을 택했다. 릴라는 레누에게 말한다. 금전적인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지원해줄테니 너는 절대 공부를 포기하지 말라고. 넌 내 눈부신 친구이며,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전개되는 내내 비범과 평범을 각기 대표하며 서로 양극의 모습을 보여주던 릴라와 레누는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인생의 궤적이 엇갈리는 시점, 눈부신 친구라는 말을 통해 관계가 재정립된다. 비범했지만 구두 제작자의 길에 들어선 릴라와 평범했지만 배움에 노력하는 레누. 그 둘은 기묘한 균형을 이루는 듯 보였다. 여기까지가 4부작 중 첫번째 이야기의 내용이다.이를 읽은 독자라면 앞으로 그 둘의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둘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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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매우 당연하고 익숙한 보통의 일상을 솔직담백하게 파고들어 두 여자의 본능적인 감각과 생각을 독자에게 노출한다. 여기에 당시 이탈리아의 시대상과 역사적 배경이 어우러져 생생하고 입체적인 이야기를 완성하며, 그 속에서 투쟁하는 여성의 모습은 슬프게도 현대의 우리에게 공감대를 불러일으켜 책의 내용을 독자의 곁으로 끌어당겨온다. 하지만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작위적이거나 걸리적거리는 묘사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히는 문장으로 두 여자의 삶을 온전히 소화시킨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 때로는 경쟁자이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중요한 가치를 함께 나누는 동반자이기도 한 친구 관계는 어찌 보면 참 미묘한 우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긍정적인 힘을 불어넣는다. 릴라와 레누는 같았고 또 달랐다. 각자의 환경과 그들을 둘러싼 세상의 구조가 두 여자의 삶의 방향을 틀었다. 마치 동일한 시간대 위에 아찔한 균형을 이루며 존재하는 평행세계를 바라보는 듯. 이렇게 같지만 다른 릴라와 레누의 삶은 이후 어떻게 전개될까. 나도 모르게 그 다음 권으로 손이 간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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