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 되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기까지 [사람]

정제된 언어로 생각을 써내려가는 행위는 분명 그것이 필요로 하는 노력 이상의 가치가 있다.
글 입력 2020.06.16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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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말에 집으로 돌아왔다. 계절학기를 마치고 수료 상태가 된 후에는 학교 근처에서 살 이유가 없었다. 또 그때의 나는 더 이상의 서울살이를 버텨낼 요량이 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사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고, 복잡한 대학가를 벗어나고 싶었다.

 

3월부터 5월까지 약 석 달 가량을 붕 떠 있는 듯한 상태로 지냈다. 휴식기를 가지면서 8월 졸업을 위해 제출해야 할 어학 성적과 자격증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학원에 다니려던 것이 인터넷 강의을 수강하는 것으로 바뀌고, 4월에 예정되어 있었던 여행, 워크숍 일정이 연달아 취소되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이 시기에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글쓰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많은 것들이 유예된 상황에서 글을 쓰는 일은 너무나 한가로운 일로 다가왔다. 무언가를 읽고 쓰는 대신에 주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어름댔다.

 

6월이 되고, 8월 졸업을 포기했다. 나에게 여름 졸업 포기는 계획한 대로 가지 않고 돌아 돌아 가겠다는 의미였다. 어학 공부나 취업 준비를 하며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산성을 포기하자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할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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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는 일을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가까운 사람과 나누기 시작한 교환일기 덕분이었다.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한 둘이서 나누는 편지는 나에게 조그맣지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튕겨 나가려고 할 때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주었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상황을 직시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생각을 나눌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에서 비롯된 것이면서 동시에 글쓰기가 자체가 갖는 힘이기도 했다.

 

별다른 요점이라고는 없는, 단편적인 생각을 나열한 글들이 쌓여갈수록 조금씩 생활이 안정되었다. 혼란스러움은 글로 쓰이는 순간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형태가 되었고, 제때제때 그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자 문제 해결에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예기치 못한 불안과 조바심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됐다면, 글을 통해 그 구렁텅이를 조금씩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대단한 무언가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저 책이 재미있어졌고, 규칙적으로 운동할 기력이 생겼고, 스마트폰 불빛 없이 잠들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교환일기와 글쓰기 덕분인가, 라고 하면 답하기 어렵지만, 정제된 언어로 생각을 써내려가는 행위는 분명 그것이 필요로 하는 노력 이상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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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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