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의 조건, 인간의 길 - 팜FARM [공연]

그래, 실존과 본질 어느 쪽이었건, 그것은 나의 삶이었어.
글 입력 2020.06.1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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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 공연 사진(1).jpg

 

 

 

극장에 젖어들어 가며


 

극장에 들어서기 직전에 건네받은 공보물에서도 말해주듯, 주인공 `오렌지`는 farm으로서 평생 남을 위한 땅의 역할을 해온다. 그 스스로는 하나의 밭이다. 상상이 가시는가? 얼핏 떠오르긴 하실 것이라만, 아마 상상하시는 것보단 가깝게 다가올 것이고 그래서 더욱 우리의 이야기로서 이질감과 기피감을 가진다.

 

극의 주요 제재는 GMO, 유전자 변형 생물로서의 인간이다. 극의 시공간 안에서는 유전자 변형 인간인, ‘디자이너 베이비’가 이미 자연스러웠다. 아주 처음 접하는 소재는 아니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아직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은 시공간 속에서 관객인 나는 접한다. 그럼에도 이질감이 없이 자연스레 내게로 스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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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너무들, 잘하신 덕분이다. 천연덕스러운 뭇 배우의 모습들. 이게 연극이 가지는 마력이 아닐지. 눈 바로 앞에서 짜이는 상상의 이야기. 배우들의 괄괄한 발성이 내는 음파가 여기에 고막을 찌르르 흔들고, 그 몸짓과 손짓은 내 망막에 직접 흔들리고 있었으며, 보이는 표정은 그저 당연스러웠다. 즉, 현장감이 구축하는 사실성. 나는 그러그러한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는 세계에 초청받는 것이다, 연극에 오는 일이란.

 

막을 구성하는 요소 일체는 최소한의 전달력을 지니고 있지만, 논리정연하지는 않았다. 부러 엄격한 사실성을 갖추고자 하지 않았다. 소재부터 서사의 흐름, 전달 및 표현 방식 모든 것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기에.

 

등장인물의 쉴 새 없는 몸짓들. ‘무용과 마임, 의미를 알 수 없는 더듬거림과 본 적 없는 춤사위.’ 이 연극에서는 언어와 대화가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언어의 내내, 그 곁에서 함께 표현되고 있는 몸짓으로 인해 일상성은 다소 흩어진다. 대화가 진행되는 중에도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어깨와 팔과 손. 우리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듯, 자유분방하고 다이내믹한 제스쳐와 어투를 취하진 않는다.

 

그래서 만화적이다.

 

나는 뜬금없지만, 애니메이션 짱구가 떠오르더라. 해학성을 위한 과장된 몸짓들. 일상에선 채택되지 않지만, 극 속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채택될 수 있는 과장된 유머들이 겹쳐 보인 일이다. 그 유머들 덕분에 극의 주제가 가지는 무게는 조금 흩어지고 산만해진다. 그래서 극이 가지는 깊고 어두운 무게감은 저도 몰래 쑤욱, 내게로 치닫듯 다가올 수 있었다.

 

 

짱구 엉덩이.jpg

훌라훌라

 

 

논리정연하지 않다. 극이 여기, 유전자 조합으로 태어난 아이가 있고, 그 아이는 `밭`이라 몸에 다른 여러 장기를 배양할 수 있노라고 하면, 이 혼란한 맥락에선 아아 끄덕이고 넘어가게 된다.

 

아직은 현실적이지 않은 제재들이, 이런 연극적인 속성들을 통하여 하나의 전제로 내게 마련되고 나니, 극은 수월하게 읽힌다. 저 아이의 몸에는 다른 이들의, 다른 이들을 위한 장기가 자라나고 있다는, 저 천연덕스럽고 태연한 말투와 표정이.

 

경악해야 할 타이밍과 포인트를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애초, 그런 것들이 이미 당연한 것으로 막 안에서는 대접받고 있었고, 또한 그런 것들에 우리 관심과 의문이 뒤늦게 조망되기도 전 막 안에는 주변인, 즉 NON-GMO인 평범한 우리 각자의 사정이 시끄러웠다.

 

 

 

MY WAY


 

‘오렌지’가 슬로우 모션으로 달리고, 그 주변을 모든 다른 등장인물들이 마임을 추며 대단원 시작을 알린다. 배경에 깔린 음악은 ‘my way’였다.

 

 

And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My friend,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I`ve lived a life that`s full

I`ve travelled each and every highway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My way - Frank Sinatra 中

 

 

극의 프롤로그에 깔린 노래의 가삿말, 심상치 않다. ‘And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이제 끝이 가깝고, 나는 삶의 마지막 장을 마주한다.’ 음악이 가지는 뭉클하고 가슴 찬 멜로디에 가려지긴 했지만, 가사가 심상치 않다. 지금은 극의 막 ‘시작’이기 때문에.

 

프롤로그는 극 전체를 집약하고 암시하는 부분. 시작은 희망찬 ‘생의 마지막’을 예고하고 있다. 그 노래가 깔린 배경에서 ‘오렌지’가 짓는 표정은, 너무도 황홀하였다.

 

**

 

이후부터의 서사 구성은 세밀하지 않다. 오렌지의 양친, 프로젝트 FARM의 클라이언트인 ‘케이타네 아주머니’, 오렌지 어머니의 새로운 남자친구인 ‘마트 지점장’, 지점장의 심리(?) 상담사인 ‘존 트레이너’가 차례로 소개된다. 매 ‘막’은 그네들 각자의 고민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사 구성은 세심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하루를 주기로 분절되는 일상처럼, 1막은 부모의 이혼 실랑이, 2막은 케이타네 아주머니의 사정, 3막은 오렌지 어머니와 지점장의 연애 해프닝, 4막은 지점장의 심리 상담기… 막은 이런 방식으로 점멸하듯 휙-휙 변모한다.

 

그야말로 각자의 사정. Non-GMO인 우리 인간들의, 소박하고 유약하고 극적이지 않고 사소하며 심지어는 하찮기까지 한, 그러나 각자 개인들에게는 충분히 큰 개개 고민들로 아우성이 일고, 극은 내내 이런 소음들로 가득 채워진 채로 마구 변모하고 있었다.

 

소박하고 사소한, 우리 나약한 개인들이 모여 자아내는 비루한 이야기와 몸짓들. 그 곁에서 특별한 인간, GMO 인간인 주인공 ‘오렌지’의 목소리는 묻힌다. 오렌지는 그 곁에서 오랫동안 다른 이의 장기를 배양하는 밭으로 살았지만, 부모의 이혼 문제, 케이타네 아주머니의 지극히 개인적인 쓸쓸함 따위의 틈에서 미루어지고 잊힌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오렌지네 부부의 난임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난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색한 유전자 변형과 디자이너 베이비, 그러나 부모 마음이란 게 기왕이면 최고로 훌륭한 아이가 태어나길 바라게끔 되었나 보다.

 

각 부모의 유전적 약점을 보완하고, 이걸 덧대고 저걸 덧대고, 그저 가장 유전적으로 훌륭하게 태어나 최고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아니, 최고로 아름답게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은 진실로 사랑이었을까. 어땠든, 우리가 그 결과를 채 미리 알 수 없었다는 것이 이 모든 문제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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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어난 오렌지에게는 ‘무언가 결함’ 되어 있었다. 그것은 사회성 부족이란 모호한 단어로 채 아우를 수 있는 성질의 결함이 아닌 듯싶다. 수명이 3배나 빠르게 흘러가는 오렌지는 이미 20대의 성숙도를 가지고 있었다지만, 유치원 또래 아이들에게 최면과 암시를 걸어 싸움과 분열을 부추기고, 커터칼로 자학하게끔 유도한 오렌지에겐, 무언가 사회성 너머의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결함된 채로 태어나버린 것이다. 결과를 놓고 말하자면, ‘인간 실격’이다.

 

실격된 인간이자 유전자 변형의 인간. 그에게는 사회성 너머의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반면, 일반 인간에게는 기대해볼 수 없는 여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주 빠른 생장능력과 없다시피 한 면역 거부 반응. 그렇게 오렌지에게는 ‘인간의 자격’ 대신에 ‘쓸모’를 가진다. 인간을 위한 쓸모인, 장기 파밍.

 

그의 배 위에는 말 그대로 ‘오장육부’가 달리어 있다. 열매같이 말이다. '오렌지'는 나무, 장기를 맺는 나무이다. 그 장기들은 각각의 아이덴티티를 간직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렌지의 통제 능력 밖이란 말. 손님으로 모신 장기들은 손님처럼 제멋대로 움직인단다. 오렌지의 육신은 오렌지만의 것이 아니다. 그의 육신, 그리고 그 스스로는 이제 밭으로써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한 채로 살아가며, 여러 장기를 만난다. 누군가의 손가락, 누군가의 눈이 오렌지의 배 위에 품어진 채로 데구르르 움직인단다.

 

그런 오렌지의 곁에서 다른 ‘인간’들, Non-GMO인 우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우리 ‘인간’이 나약한 탓이다. 그네들은 각자 하찮은 고민 속에 갇힌 채 뒹굴고 시끄러운 아우성을 일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곁에서 오렌지는 언제나의 말투로, 차분하고 고요하고 느지막이 자신을 고백해보았지만, 이내 침묵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듣지 않았고, 또 듣지 못하고 있었기에. 느껴볼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오렌지 자신만의 문제를, 그는 고백해보다간 이내 침묵해야만 했다.

 

이것은 우리 일상적 모습의 하나일까. 나약한 이기심과 몰이해가 우리들이 공유하는 '인간적 한계'라고 하자면… 오렌지에겐 그런 나약함과 이기심, 토로와 고백과 무너지는 우리들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는다. 늘 이상스레 무감하고 과히 차분하기만 했다. 그의 배 위에서 남의 장기가 움직이는 와중에도 말이다.

 

우리의 나약한 모습들이 피워내는 시끄러운 일상 속을, 그러므로 그는 화합해 들어오지 못한다. 번민과 토로와 고백과 무너짐, 그리고 포옹과 화해와 유대와 사랑과 다시 일어남의 반복됨인 일상. 이 모든 모습들이 오렌지에게는 깡그리 사라져 있다. 그래, 이런 사랑스런 우리의 일상에는 언제나, ‘듣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이 필요하기에.

 

누가 오렌지를 들어 느끼고 이해해볼 수나 있었을까.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그들은 최소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있다. 각자는 자기 말에만 시끄럽다. 그아먈로 소음 속의 적막함이고, 군중 속의 고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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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두고 사랑한다 말하는 그들은, 정작 그를 들으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귀 기울이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어떠니, 어땠니, 힘들지 않니, 버겁지 않니, 버거울 텐데, 가끔 쓸쓸하지 않니, 가끔 허망하지 않니, 괜찮다고 말하지만 괜찮지 않은 건 아니니, ‘미안하다.’ 이 중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두고 사랑한다 말하는 그들, 오렌지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케이타네 아주머니 중 누구도 그러니, 오렌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듣고 있지 않았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으니.

 

인간 실격, 즉 인간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인간을 위한 쓸모만을 가진 존재. 또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사회적 존재. 한 명의 듣는 이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런 존재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런가. ‘인간’과 다르게 태어난 그 존재에게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이란 어떻게 이루어질는지.

 

그 자격이란 선택하는 것도 학습하는 것도 아닌, 이미 부여받고 태어나는 것. 위의 궁금증은 ‘그것을 하필 갖지 못한 이의 생애란 어떻고 어떠해야 하냐’는 질문이고 ‘그 자격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또한 인간의 사회를 떠나질 못해, 반쯤 걸쳐진 이방인의 포지션을 띈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는 어쩌면, 천부인권으로서의 자격을 잃었기에 ‘쓸모’의 티켓을 치르고서야 인간의 사회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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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의 결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정할 따름이다, 아마 유전자 조작의 부작용일 것이라고. 그렇다면 오렌지의 어긋나버린, 비극적인 삶에 대한 책임은 누구한테 놓일 것인가.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서 스스로 짊어지고 갈밖에 없을 천형의 숙명이 되는가. 아니라면, 그런 선택을 내린 부모에게 슬며시 가로 놓이는 책임과 의무라 할 텐가.

 

이러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인간의 딜레마 속을 그는 살아간다. 살아서 그저 간다. 지금 답을 내릴 수 없어도, 심지어는 어딘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있는 중에도 그저 그저 밀고 나아가야만 할, 지엄한 것인 삶. 오렌지는 침묵하고 유용됨으로써, 이 짐을 서글피 짊어진다. 그 애는 도망치질 않았다.

 

이 안에 어른은 없다. 나는 이 모호하기 짝없는 단어인, ‘어른’을 기어이 뱉어본다. 이 안에 어른은 없다. 그 어른은 잠시 멈춰 다른 이를 귀 기울여 보고 이해와 포용을 나름으로 애써보는 인간, 조금 나마 성숙하거나 성숙하고자 애쓰는 인간이다. 그러니 이 안에 어른은 없다. 다들 각자의 사정에만 골몰해 삐약삐약 시끄러운, 부끄럽고 작고 초라한 모습들이라니… 아무도 이 서글픈 인간의 자식에게 집중하지도, 집중을 노력해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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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오렌지의 양친도 반드시 어른은 아니었다.

 

**

 

누군가의 장기를 키워낸다는 것은, ‘지력’ 地力을 소모하는 일. ‘훌륭한 밭’이었던 그는 이내 쇠락하고, 위암이 찾아온다. 이제 암이 전이될까 봐 장기도 키워내지 못한다. 오렌지는 스스로의 쓸모이자 능력이던 것을 잃으니, 드디어 멈추었다. 가만, 가만히 멈춘다. 일찍부터 FARMING 외 아무런 일상과 활동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탓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존 트레이너’에게 ‘부활의식’을 부탁한다. 처음으로 무언가, 자신의 소망대로 행동해보는 것이었다. ‘부활의식’이란, 태초에 있었던 ‘창조와 생식의 단계’로 돌아가 재현하며, 자신의 전 일생을 다시 잡아보고자는 하나의 의식. 섹스이다. 섹스를 통한 역할극.

 

오렌지에게는 성욕이 없다 하였다. 있었던들 어쩔까. 그의 일상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내연남, 프로젝트 FARM의 클라이언트인 노인네뿐이었는데. 쓸모를 잃어버려 드디어 덩그러니 멈추어버린 삶에 이르러, 드디어 오렌지는 자신을 찾고 싶다 말하였다. 어디서부터 일그러진 지 모를, 자신과 자신의 삶을. 그 방법은 부활의식, 곧 섹스였다.

 

그 섹스는 참 기괴했다. 남성인 오렌지는 여성의 역할을 자처했고, 여성인 ‘존 트레이너’는 남성의 역할을 맡는다. 둘의 육체와 의식과 교감을 이어주는 교두보는, 벨트로 얽어맨 ‘자기 동생의 뼈’. 오렌지가 배에다가 이식해둔, 죽은 자기 동생의 뼈이다. 그 동생은 아버지의 자가복제 실패작이었다.

 

섹스는, 두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교감의 궁극. '오렌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섹스는 어땠을까. 또 소외되어 있지는 않았던지.

 

무대 위에서 두 배우는 서로를 마주 보고 힘차고 점점 힘차게 팔을 흔들어대고, 섹스의 과정은 배경의 스크린에 자막으로 서술된다. 어딘가 기묘한 배경음악 속에서, 두 배우는 숨차지도 않은 지 오래도록, 더욱 씩씩하게 팔을 흔들고 자막만이 기괴했다.

 

 

“난다…… 난다아……. 날아올라……”

 

 

“아아… 이런 것이었구나… 감사해요.” 오렌지는 처음으로 쾌락을 맛본다.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오로지 자신을 위한 추구를 경험한다. 우리에게 익숙하고도 당연한, 자신의 자신에 대한 행복 추구를. 뜬금없게도, 이상 ‘날개’의 주인공과 겹쳐 보인다. 탈락된 인간이자, 날고자 한 인간. 최후에야 자신을 추구했고, 죽음으로써야 자유를 찾을 수가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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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빠져나오며


 

 

‘주인공 오렌지는 다른 이를 위한 밭이다.’


아직 극이 시작하기 전에는, 이것이 얼마만큼 이질적인 성질의 것인지를 나는 미리 알지 못했다. 이게 다 포스터가 귀여운 탓이었을까. 포스터도, 작품소개 및 줄거리소개도, 공보물도 이 극이 실제로 담고 있는 무게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진 않았다.

 

나는 줄거리만 읽고선 심지어, 어딘가 따뜻하고 쓸쓸한 소외와 보드라운 눈길, 옅은 눈물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저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우리 이야기의 재현들을…. 나는 아주 잘못 짚었던 것이다.

 

이제 가만 생각해보면, 다른 이를 위해 한 인간의 육신이 밭이 된다는 것. 그 진술만으로도 이질적이었다. 우리의 세계가 반드시처럼 이상적이진 않지만, 지금까지의 우리, 그리고 한동안 앞으로의 우리에게 `인간이 수단`이 되는 일, 더군다나 `하나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한 수단`이 되는 일이라는 명제는 영영 께름칙한 진술일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그 개인의 `지력`을 소모해가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 아이의 배 위에는 말 그대로 ‘오장육부’가 달리어 있다. 열매같이 말이다. '오렌지'는 나무, 장기를 맺는 나무이다. 인간의 자식이자, 장기의 나무. 오렌지는 둘 중 어디에 더 가까운 존재였을까. 그 삶은 어느 쪽에 더 가까이 머물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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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는 열매였을까, 나무였을까.

 

 

인간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인간을 위한 쓸모만을 가진 존재. 그 존재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던가. ‘인간’과 다르게 태어난 그 존재에게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 즉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삶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던가. 나는 철저히 소외된 존재, 어딘가 변형되고 누락된 인간인 오렌지의 생애 위로 이런 질문을 그린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행복 비슷한 것을 맛보고, 최후에 이르러서야 자유를 느낄 수가 있었던 탈락된 존재, 오렌지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삶과 살아내야만 하는 것으로서의 이 삶이란. 탄생에는 자기 결정권이 없다지만, 생애에도 자기 결정권이 적었던 그의 삶은 그렇담 무엇이었을까.

 

 

원곡이 좋지만, 나는 이 곡에 더 끌림을 느낀다.

 

 

And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My friend,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I`ve lived a life that`s full

I`ve travelled each and every highway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Regrets, I`ve had a few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I did what I had to do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I planned each chartered course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Yes, there were times, I`m sure you knew

When I bit off more than I could chew

But through it all when there was doubt

I ate it up and spit it out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And did it my way

I`ve loved, I`ve laughed, and cried

I`ve had my fill, my share of losing

And now, as tears subside

I find it all so amusing

To think I did all that

And may I say, not in a shy way

Oh no, oh no, not me

I did it my way

For what is a man, what has he got?

If not himself then he has naught

To say the things he truly feels

And not the words of one who kneels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And did it my way

Yes, it was my way

 

My way - Frank Sinatra

 

 

For what is a man, what has he got?

If not himself then he has naught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을 사람은 가지는가?

만약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이라네.“

 

 

And did it my way

Yes, it was my way

 

“그리고 그것을 내 방식으로 해냈네.

그래, 그것이 나의 길이었어.”

 

 

프롤로그에서, 오렌지의 황홀한 표정 뒤로 깔리는 이 노랫말은 참으로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에게 생의 최후가 기꺼웠던 까닭, 세상에 더 이상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어두거나, 후에 다시 부활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은 그 생이 슬픔 너머의 것으로 가득 찬 때문이다. 오렌지에게는 인간의 자격도 사랑의 조건도 없었고, 자기 자신도 없었으며, 아아 그래, ‘선택’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것을 내 방식으로 해냈네. 그것이 나의 길, 나의 삶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을, 주권과 선택이 없었던 까닭이다.

 

인간의 자격은 달리 말해,

“다른 인간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한 조건.”

 

또한, 인간의 자격은,

인간이 스스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데 필요한 근거인,

“받은 사랑과 믿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자격은, 자기 주권.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 내릴 자기의 선택들과

이 모든 것들에 말미암아 내릴 수가 있는 생애의 선택.

 

나는 왜 오늘따라 오렌지에게 흠뻑 이입했던 것일까.

극을 마치고 나오니, 밤이 깊다.

혜화동 거리에는 코로나 때문인지 사람이 적었고,

귀로의 밤 버스는 괜히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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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하다는 그 말. 인간이 스스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듣고 이해할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떠오르는 밤이다. 나를, 누가 듣고 있는가. 또한, 나는 누구를 듣고 있는가.

 

적막한 밤거리 위로는 이런 생각이 착상되기 퍽 좋았다. 돌아오는 길 긴 밤, 차창 너머로 나는 날 스쳐 간 인연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창 위에 그려진 못난 내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오렌지'는 인간의 자식이었을까, 나무였을까. '오렌지'는 구성원이었을까, 이방인이었을까. 그의 존재는 실존과 본질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웠을까. 그리고 너와 나 우리는, 전자와 후자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오렌지'는 어쨌든 끝에 이르러 해맑은 얼굴로 말하는 듯하다. "그래, 실존과 본질 무엇이 되었건, 그것이 나의 길, 나의 삶이었어." 내 것이었던 적 없던 삶도, 어찌 됐건 나의 삶이었다고. 자격 없어 내내 쓸쓸하기만 했던 이 삶도, 어찌 됐건 나의 삶이었다고. 끝까지 품어내고자는 쓸쓸한 뒷모습이, 참 어른같이 우람해 보인다.

 

돌아오는 길 긴 밤, 버스의 차창 위에 비친 못난 얼굴을 잠깐, 나는 다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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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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