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잘 것 없는 삶의 낯선 포착 - 체호프 ① 4대 장막 편 [문학]

글 입력 2020.06.1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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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황혼의 작가, 안톤 체호프


 

가장 익숙한 러시아 작가들의 이름들을 한번 떠올려보자.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세번째 정도에 아마 안톤 체호프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갈매기」, 「벚꽃 동산」을 쓴 그 체호프, 「귀여운 여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그 체호프가 맞다.

 

19세기 말,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두 대문호를 낳은 뒤, 러시아 사실주의는 시대의 저편으로 저물어가게 된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황혼이었다. 이전까지 세계 문학사에 제대로 발조차 들이지 못했던 러시아 문학은 19세기 너무도 풍요로운 열매들을 맺었다. 푸시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두 거장, 그리고 차마 다 나열할 수 없는 다른 작가들까지.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러시아 문학은 이제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사실주의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고, 새로운 세기의 사회, 새로운 세기의 문학을 맞을 준비를 하며 러시아 문학사에 또 하나의 별이 폭발한다. 그것은 19세기의 마침표이기도 했고, 20세기의 시작이기도 했으며, 이전 시대 문학의 화려한 종말이기도 했고, 새로운 시대의 문학의 요란스러운 출발이기도 했다. 황혼의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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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는 어떤 사조에 속해있다고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흔히 체호프를 사실주의라고 분류하지만, 엄밀히 말해 대표적 사실주의 소설들에 비해 그의 소설은 전혀 친절하거나 세밀하지 않다(톨스토이의 그 두꺼운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현대 소설 작가’라고 말하기에는 도무지 개운하지 않다.

 

안톤 체호프는 단편 소설로도 유명하지만, 러시아 희곡사의 분기점이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화려했던 19세기 시인ㆍ소설가 라인업과는 달리 희곡에 있어서는 그에 버금갈만한 작가가 아직 나오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19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이전의 작품들에서도, 동시대의 어떤 극작가들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드라마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을 휩쓸게 된다. 수많은 조류에 속한다고 설명 가능한 동시에 그 어떤 조류에도 속하지 않는 ‘체호프’ 식 희곡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체호프의 문학사적 의의와 작품의 유명세에 비해 그의 작품들을 읽고난 독자들은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이것은 무멋을 말하는 작품인가. 도대체 무언가 사건이 일어났는가. 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 이따금 누가 죽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는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이 ‘극적인’ 사건들을 이렇게 평이한 서술로, 재미없게 나타내는가. 그리고 이야기만 하면 될 것을, 왜 자꾸 여러 이야기를 겹겹이 끼워넣고, 별 의미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대사를 자꾸 집어넣는가.

 

심지어 결말도 도무지 속 시원한 것이 없다. 다시 만난 연인의 사랑이 성공하는지, 실패하는지 그 결말을 알려주지도 않고(「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어째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지 자신들도 알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그 질문을 도리어 독자에게 던지며 끝나기도 한다(「세 자매」). 그건 우리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도대체 너희 사랑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너희가 찾은 삶의 의미는 어떤 것이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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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와 톨스토이

 

 

체호프가 좋다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공감하지 못했고, 공감하고 싶었다. 아니, 나 역시 좋다고, 재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의 작품이 좋다고 말하는 그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직도 전에 읽지 않은 체호프의 작품들을 읽을 때면, 처음 그를 접했을 때의 어리둥절한 느낌이 먼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체호프의 작품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첫 인상에 덮어버리기에, 작품 속에서 체호프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시선’은 꽤 매력이 있다. 적당히 무심하고, 적당히 삶을 사랑한다. 절망적인 것 같다가도, 어렴풋한 희망을 보여준다.

 

두 편에 걸쳐 체호프의 작품들과 그의 시선을 소개하고자 한다. 혹여나 나처럼 첫장을 넘겼을 때의 막막한 느낌에 체호프를 포기했던 사람들에게, 혹은 이 작가가 자신만이 할 수 있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작품 속 세상을 면밀히 쌓아나가는 것이 궁금한 사람들에게(실제로 체호프의 이야기 방식을 따라한 이후의 수많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대개는 실패하고 난잡한 작품만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편에서는 그의 4대 장막(「갈매기」, 「바냐 외삼촌」, 「세 자매」, 「벚꽃 동산」-작품 완성 시기순)을 중심으로 체호프의 ‘이야기’ 방식과 체호프가 열어보이는 삶의 가능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2편에서는 그의 유명한 단편 소설들을 중심으로, 체호프 작품 속에서 ‘사랑’이 어떻게 그만의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우리의 '진짜' 대화는 너무도 비논리적이라서


 

체호프의 대화는 중구난방이다. 체호프의 다른 단편들에 대한 첫인상 역시 대부분 그럴 테지만, 특히나 희곡을 ‘읽을’ 때면 도대체 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 이야기를 하다가, 저 이야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왔다갔다하기 때문이다.

 

 

소린  (언 손을 비비면서) 가십시다, 여러분. 안 그러면 찬 공기에 젖을 겁니다. 다리가 아파요.

아르카지나  오빠 다리는 마치 나무 같아서 간신히 걸을 수 있어요. 자, 가요. 불행한 노인네 같으니. (그의 팔짱을 낀다)

샤므라예프  (아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마담?

소린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군. (샤므라예프에게) 일리야 아파나시예비치, 제발 부탁이니 개를 좀 풀어놓으시오.

샤므라예프  안 됩니다.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창고에 도둑이 들까 저어됩니다. 창고에 수수가 있거든요.

 

- <바냐 외삼촌> 중 - (안톤 체호프, 2010: 411)

  

 

설령 이 대사들이 모두 무의미해보일 지라도 독자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어떻게든 유의미한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작가가 어쨌든 의도한 바가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독자는 그것이 중심 갈등과 관련된 것이라는 공통된 믿음 하에 인물의 행동에서 그와 관련된 어떤 의미를 애써 찾으려 시도한다. 그러나 체호프 극에서는 일단 뚜렷한 초목적이라는 것 자체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아무리 보아도, 너무 별 볼일 없는 말들이다. 다리가 아프다느니,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느니, 도무지 중요한 암시나 복선 같지도 않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앞에 상대가 있다는 점조차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집단적 독백’이 문학 작품 속에 구현된다면 이런 것이리라. 목적 없는 대화는 역시 한데 모아질 수가 없고, 말을 하는 인물 본인은 즐거울지 모르나 독자들은 혼란스럽다. 도대체 어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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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체호프가 생각하던 진짜 삶이었다. 체호프가 생각하기에, 기존의 문학에서 사람들의 대화는 너무도 이상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고상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다들 자기 할 말만 하지, 누구 하나 입을 연다고 모두가 그 사람의 말에 경청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너무 가식적인, ‘연극적인’ 대화였다.

 

체호프가 바라본 인간의 실제 삶은 하나의 주제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어떤 큰 주제를 갖고 이야기하기보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앞선 대화에서 유발되는 ‘연상’에 의해 이뤄지는 우연한 말들의 나열로써 대화를 이어간다. 연상에 기초한 체호프 희극 속 인물들의 주제는 자연스레, 실제 우리가 그러하듯이 분산되게 된다. 그러니 너무 힘주어 모든 말들을 놓치지 않을 필요 없다. 다들, 그냥 떠든다. 우리가 그렇듯.

 

 

 

2. 요란스러운 불협화음 속에 나타나는 ‘고립’


 

이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 어느 정도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갈매기」의 ‘트레플료프’는 자신의 작가적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세 자매」 속 ‘세 자매’는 모스크바로 돌아가서 이전의 화려했던 생활을 하고자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러지 못하고 있다. 「벚꽃 동산」의 ‘라네프스카야’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재산인 영지가 헐값에 팔리기 직전이다.

 

그런데 반복되는 이 인물들의 집단적 독백을 듣다 보면, 정작 이들이 비극적 상황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의지는 없고, 순전히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 독자는 의아하다. 아니,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해야 극이 진행될텐데, 다들 자신이 슬프고, 옛날엔 어쨌다느니 말만 하고 있다. 이들이 말만 하고 있는 동안, 뒤에서 시간은 가고, 사람들은 떠나고, 벚꽃 동산은 팔리고 있다. 극적인 사건이 이야기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체호프의 희곡은 ‘사건이 무대 뒤에 존재’한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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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국립 타간카 극장(Театр на Таганке)의

2017년 <갈매기(Чайка)> 공연

인물들은 모두 앉아서 저마다 이야기만 하고 있다.

 

 

이 인물들은 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자신의 비극적 상황에 너무도 깊이 빠져 있다. 대화가 잘 될 리 만무하다. 남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시작일 뿐이고, 심지어 어떤 인물들은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세계에 잠겨 있다가 불현듯 대화를 시작한다. 이들이 빠져있는 자신의 세계는 다름 아닌 과거이다. 과거의 행복, 과거의 꿈…….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세계를 파고드는 이들은, 그 순간 이미 실제의 시공간이 아닌 저 너머의 과거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며 현재와 완전히 단절된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이들의 고립은 더이상 같은 시간선상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더 깊어지게 된다. 과거는 끊임없이 오늘의 인물들을 간섭하며, 그들로 하여금 오늘 역시 과거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건하게 한다.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파고 들며 이들은 점점 더 자신의 비극적 상황에 천착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무기력한 절망적 상황에 ‘손수’ 빠져있으며, 그것으로부터 나오려는 적극적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커다란 미래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그것은 어제 오늘과 이어지는 흘러가는 시간선상에 존재하는, 차근차근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고정되어 있는 시간 속에 갈망하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들 스스로도 흘러가는 시간의 무게 속에서 ‘잊혀가는 것’에 공포를 느끼지만 어떤 행동을 취하진 않는다.

 

 

 

3.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다만 바라보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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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르이 드라마 극장(МДТ)의

<세 자매(Три сестры)> 공연

 

 

그런데 묘하게도 자신의 비극에 취한 인물들의 집단적 독백들이 극 전체를 지배하는데도, 독자에게 남는 것은 불쾌함이 아니라 착잡한 고민들이다. 그것은 이 무의미해 보이는 인물들의 집단적 독백 속에, 변화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상황 속에 무언가 변화가 존재하며, 그 변화의 과정에서 독자가 삶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넘겨받게 되기 때문이다.

 

에릭 벤틀리는 전통극에서 “인식이란 것은 사태가 오랫동안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혀내는 비밀의 발견이었다. 「바냐 외삼촌」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를 주저하면서도 오랫동안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에릭 벤틀리, 2016: 124)이 인식이 된다는 점에서 “체호프는 그 독자적인 인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창조해냈다”고 말한다.

 

‘세 자매’는 모스크바로 가고자 했지만, 끝내 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1막)부터 모스크바는 이상일 뿐 현실적으로 도달 불가능하단 것을 알고 있었다. 4막에서 그것을 다만 인정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세 자매」 속 인물들의 변화가 있다. 절망에 심취해있던 인물이 절망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비록 그것이 여전히 추상적일 지라도 비로소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체호프 극 속의 인식이며, 변화이다.

 

그것은 거대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일상적 상황에 모인 인물들의 관계가 나름대로 얽히고 설켜 진행되는 중에, 무의미해 보이는 독백적 대화들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파고드는 중에, 체호프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체호프적인’ 방식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극작술로 인물들이 스스로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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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바냐 외삼촌> 공연

 

 

극의 끝에서 인물들은 다시 원래대로, 즉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 ‘세 자매’는 여전히 모스크바로 가지 못하고 원래 살던 도시에 머무른다. 「바냐 외삼촌」 속 ‘바냐’와 ‘소냐’는 여전히 영지에서 세레브랴코프에게 돈을 부치고, 아스트로프는 살던 대로 일을 하며 살며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는다. 「벚꽃 동산」 속 ‘라네프스카야’는 영지가 팔리는 것을 그저 내버려 둔다. 이들은 본래 있던 절망을 그저 다시 확인한 것 뿐이다.

 

그러나 설령 이들의 현실이 지금 당장 변하지 않았더라도, 여기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쉽사리 말할 수는 없다. 절망적 현실을 인식한 인물들이 이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삶에 대한 고민이다.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 살아야 한다면 그 의미는 어디에서 찾는가 같은 고민들. 「갈매기」에서는 니나와 트레플료프 만이 자신들의 삶을 인식하고, 삶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트레플료프는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를 포기하고 결국 자살로 이르고 말고, 니나는 어찌 되었든 참아야 한다며, 그 답을 구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냐 외삼촌」를 기점으로 체호프의 극 중에서 그 나름의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들이 생긴다. 그것이 비록 장황하거나, 체호프가 변호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세 자매」에 가서는 결말 그 자체가 삶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 된다. 세 자매와 그들을 거치고 간 투젠바흐, 체부트이킨, 안드레이, 베르쉬닌은 극의 마지막에서 올가의 입을 통해 “어째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 왜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지……. 그걸 알 수만 있다면, 그걸 알 수만 있다면!(안톤 체호프, 2010: 652)”하고 삶을 향해 소리치는 것이다.

 

죽음보다 삶을 선택하고,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삶을 메타적으로 인식하고 사는 동안 그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체호프의 극에서 인물들이 변화하게 되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들이 결국 삶의 의미를 찾는지, 혹은 삶을 변화시키는지는 체호프의 관심사가 아니다. 체호프는 결말에서 “다시 흑과 백,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이라는 분류를 피하고 음악의 반음(半音)에 해당하는 비극적인 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에릭 벤틀리, 2016: 124)이다.

 

 

 

4. 어쩌면 행복을 찾을지도, 그러나 어디까지나, 어쩌면.


 

체호프는 인간의 실제 삶, 일상생활 그 자체에서 비극을 보았다. 영웅담, 고전적 멜로드라마에서나 벌어질 법한 큰 사건들은 실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결정적 사건들로 설명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에서 오는 지극한 괴로움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체호프는 이러한 ‘진짜 같은’ 인간들의 삶 속 한 장면을 그대로 포착해낸다. 인물들은 우리가 실제로 그러듯이,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좀 부산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부산스러운 집단적 독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모두 자신만의 비극적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인물들은 그만 시간에 고립된 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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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ac Levitan, A Quiet Monastery, 1890

painting, 108 x 87.5 cm, Tretyakov Gallery.

 

 

그러나 체호프는 이 인물들을 마냥 비극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들 중에는 빠져있는 절망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관계 맺는 과정을 통해 자기 삶을 제대로 마주하는 인물이 생기게 된다. 자신의 삶을 인식한 채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은 어쩌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행복을 찾을 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른다.

 

체호프는 인물들에게 절망 속에서 자신의 절망을 들여다보게 하고, 삶에 대한 주체적인 결정권을 준다. 「갈매기」에서 트레플료프가 삶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결국 죽음을 택한 것과 달리, 「바냐 아저씨」에서부터 인물들은 절망을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보고, 살아가기로 한다. 그렇게 체호프는 이후의 삶에 대한 인물들의 가능성을 점점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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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김규종 옮김, 시공사, 2010.

에릭 벤틀리, 「「에릭 벤틀리(4)」안톤 체홉: 『바냐아저씨』의 기법」, 고승길 옮김, 『공연과 리뷰 22』, 2016.



[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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