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실은 [사람]

글 입력 2020.06.1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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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ek_Duri_cahierdeseoul03.jpg

백두리, 고무줄 놀이, 38 x 27cm, Acrylics on paper. 2012

 

 

 

사실의 말


 

‘솔직하게 말하면’, ‘사실은’ 으로 시작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낸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그간 무슨 일 없었냐는 뻔한 물음에, 뻔한 답을 내놓으니 상대도 나도 별 볼일 없는 말들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대화들은 대개 흐름을 잡기도 힘들 뿐더러, ‘대화의 흐름’ 이라고 말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말들이 잘 흐르지 않게 된다.

 

띄엄 띄엄.

별 일 없었니,

한참 뒤에

밥은 먹었고,

또 더 한참 뒤에

날이 더워졌네.

 

내가 대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사람’과의 대화가 좋기 때문이다. 비슷비슷하게 살아내는 삶이지만,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 속 자리하고 있어도 이 사람과 저 사람의 대답이 아주 똑같을 수는 없다. 하다못해 ‘오늘 몇 시쯤 일어났어? 하는 질문에도.

 

하루 똑같이 흘러가는 24시간을 사람마다 다르게 꾸려가는 구나,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나의 앞에 앉아있는 상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이유를 갖게 된다. 재밌으니까, 혹은 눈물 나거나 짠하니까. 그건 내가 드라마를 보건, 영화를 보건, 책을 읽는 이유와도 비슷하다.

 

하여간 아까 그 ‘별 볼일’ 없는 대화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지 혼자 자문자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었다. 자문자답이라기보다 혼잣말이라고 해도 되었겠다. 그런 독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상대와 나는 대화를 그만 두었다.

 

그 대화가 멈추었던 그 날에,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날 새벽에, 결국 나는 ‘솔직하게 말하면’서 대화를 다시 하자 했다. 큰 이유는 없었다. 무슨 일 없었니, 사실 무슨 일이란 게 있었어요. 사실은. 그 사람, 상대에게는 ‘그 사람’일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을, 대답을 했다. 속이 시원하기도, 조금 구차해보이기도 했다.

 

사실은, 사실은 사실(fact)을 위한 말이 아니었다고. 들어주는 상대가 필요했고 맞장구 쳐 줄 상대도 필요했다고. 대화 할 상대가 필요했다고. 그런 사실들을 위한 말이었다.

 

 

 

사실의 글


 

있는 그대로를 말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라고 생각이 되는 요즘이다.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나쁜 사람, 혹은 센스 없는 사람이 될 걸 이미 알아서 오늘도 사실은 저 어딘가 깊숙이 숨겨둔다. 옆자리 사람이 입고 온 옷이 썩 내 스타일이 아닌데도 ‘와 너무 내 스타일이다.’, 그 말 사실 아주 재미없는 말인데도 ‘깔깔깔’. 요런 식이다.

 

가벼운 감탄사 혹은 추임새면 다행이지만, 결국 사실이 아닌 말들을 할 때는 나 역시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상하게 말이 길어지고 요상하게 말들이 꼬이고. 하마터면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한 아찔한 상황들을 모면한 채로 말을 마치면, 갸우뚱-하는 상대의 반응이 언뜻 보인다. 그런 상대를 아무렇지 않게, ‘무슨 문제 있어?’하는 듯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까지. 다행이도 나는 거짓을 말하는 나의 서투른 말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정도는 된다.

 

혼자 있을 때, 더는 허위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될 때. 집에 가는 길에 지치고 우울한 표정을 있는 그대로 보이며 멋없이 터벅 터벅 걸으며 생각했다. 오늘은 일기를 써야겠다라고.

 

오랜만에 핀 일기장이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4월의 일기를, 3월의 일기를, 1월 1일날의 일기를 가장한 다짐을 읽었다. 읽고 보니 또 다시 눈에 ‘사실은’ 이라는 말들이 아주 많이 읽힌다. 사실은.

 

그렇게 오늘 쓰는 일기도 ‘사실은’으로 시작한 나는, 결국 또 한번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고자 한 것이 아니라 말로 다하지 못한 것을 썼다. 사실은, 사실은, 그런 사실들로 개인적인 사실들이 늘어갔다. 가끔, 이렇게 글로 쓰는 사실들은 아는 사람들만의, 쓰는 사람들만의 고통이다.

 

 

 

권소희.jpg

 

 

[권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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