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길 다음에 길, 도로명 주소 [사람]

글 입력 2020.06.01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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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전 주소로 알려줄 수 있나요?”


배달 전화를 하던 중에, 예상치 못한 질문을 전화기 너머로 받았다. 오래 된 가게라 옛날 주소가 조금 더 편하다는 이유를 덧대며. 당연히- 알려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이전 주소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 동네에 머문 지도, 이 집에 산 지도 슬슬 손에 다 꼽지 못할 정도가 되어가는데.

 

“음..음 잠시만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정적을 미뤄둔 채 빠르게 이전 주소를 찾아보려 검색창을 켰다. 00로 ~ 말고 00동으로 시작해 지번으로 끝나는 그 주소를 찾아야 했다. 휴, 겨우, 한참을 해매다 아주 익숙하고도 희미해졌던 그 숫자들을 찾았고, 무사히 대답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신기하고 웃긴 일이었다. 도로명 주소에 이젠 완벽히 익숙해졌구나. 중학생 때 였나, 난생 처음 들어 본 ‘도로명 주소’라는 말. 당시의 나는 도로명 주소가 시행된다! 하는 뉴스엔 그리 달갑지 않아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주소를 외워야 한다는 수고로움은 둘째치고, 내가 살던 동네의 이름을 잃겠구나 생각이 들어서였다.

 

00동에 거주하니 도로명도 00로 아닐까? 하며 찾아본 새 주소에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바로 옆 동네의 이름을 따 XX로라는 결과가 나왔었는데 나는 이것부터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동안 내가 자라고 난 동네는? 서로를 같은 동네친구, 옆 동네친구라 부르던 것들은? (원래는) 같은 동네에 살던 친한 친구에게 물으니 그 친구는 이젠 나와 다른 길에 살게 되었다고 했다.

 

새 주소를 알게 된 이후로도 난, 일종의 저항심이라고 해야할지 그냥 습관성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우리동네를 00동이라고 부르곤 했다. 주소가 바뀌었어도 원래 우리 동네는 우리 동네라며, 그렇게 한동안은 도로명 주소를 외우려는 노력은 일체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00동의 이름이 붙은 00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하고 나서, 동네를 벗어나 서울에 위치한 대학엘 가게 되었고, 또 만 19세가 넘어 무언가 공식적이고 행정적인 서류를 쓸 일이 점 점 불어나게 되었기에, 나는 그제서야 자연스럽게 00로라며- 우리 동네를 부르게 되었다.

 


 

도로명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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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었던 직후 어느 날, 나는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5월의 아쉬움을 달래보려 가장 느리고 빙빙 도는 동네버스를 탔다. 서울과 경기도가 애매하게 맞닿은 우리 동네의 어떤 정류장을 출발해 서울의 중심으로 향하는, 거치는 길이 많은 버스. 제일 좋아라 하는 앞자리는 다행히 비어있었고, 난간과도 같은 높은 계단을 끙차 올라 앉으니 넓은 창으로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아침 출근길이나 저녁 퇴근길, 사람더미에 가려졌었던 5월의 모습이 이랬구나. 4월 즈음에 본 녹음들은 더욱 짙고 울창해진 모양새였고, 꽃봉우리들은 언제 만개했는지 활짝 피어 톡 하고 건들면 향이 솔솔 퍼질 것만 같았다.


형형색색의 푸르름이 회색 도시를 다 덮은 와중에 이상하게도 곳곳의 파란색 표지판이 장신구마냥 눈에 띄었다. 눈에 들어오는 표지판 몇 개를 차례대로 읽다가 보니 버스는 성산로와 월드컵북로, 작은 성중길을 지나고 있었다. 목적지는 몇 번이고 더 와 본, 잘 아는 광화문 근처의 카페였지만 도로명 주소들이 붙여진 길을 따라 가는 길이 괜히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버스를 내리며 본 길은 사직로. 낯설었기 때문이었을까, 그 다음 차례로 버스가 지날 길은 이름이 무얼지 궁금해졌다.

 

사실 나는 그 버스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우리 동네로 향하는 길을 지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길 다음에는 분명 또 다른 길이 있겠구나, 길은 계속 이어지겠구나 하는 뜬금없는 위안이 들었다.


문득 이 새로 이름 붙여진 길 위에서라면, 동네 친구가 아니더래도 같은 길을 걷는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버스를 내려 걷는 길에서 나와 같은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해봤다.

 

나 도로명 주소가 아주 익숙해졌구나, 좋아졌구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익숙한 사직로를 걸으며 좋아하는 카페로 향하였다.

 


[권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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