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사람]

글 입력 2020.05.28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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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1.jpg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라서다. 조기현 씨가 8년간 아버지를 돌본 이유다. 8년간의 돌봄 경험을 바탕으로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출판했다.

 

아빠가 쓰러지기 전까지 각자의 생계는 각자가 책임졌다. 1인분의 몫을 해내면 됐다. 아빠가 쓰러지고 감당해야할 몫은 2인분으로 늘었다. 어려웠다. 버거운 날들이 계속됐다.

 

아빠는 증상이 심해졌다. 외출하면 길을 잃었다. 수도꼭지 트는 방향을 헷갈려 했다. 양복 입은 남자가 자기를 감시한다며 집밖을 뛰쳐나간 때도 있었다. 어떻게든 아빠의 일상을 보존하려 했다. 잘 되지 않았다. 지불해야할 간병비와 수술비의 규모도 늘어갔다.

 

제도의 도움을 받기위해  방법을 알아보지만 잘 안됐다. 제도는 조기현 씨의 근로능력을 2인분의 몫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른 부양의무자인 동생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신청이 거부되는 때도 있었다. 아빠를 돌보면서 자기 삶을 꾸리고 싶었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국가는 포기를 종용했다. 제도는 아빠를 돌보는 일이 가족인 당신의 최우선이라고 규정했다. 동시에 가난을 무능으로 치부했다. 도움이 필요한 당사자가 아니라 복지제도의 수혜자라는 취급이었다. 이런 환경이면 꿈을 꾸는 것조차 포기해야 한다고. 가난하면 그에 걸맞는 삶을 꾸려야 한다고. 그런 목소리들이 들리는 듯 했다.

 

“아빠 정말 죽이고 싶다.” 진창에 빠진 것 같아 앞을 도모할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질 때 그는 거울 앞에다 대고 외쳤다. 정말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아빠가 죽으면 다 끝날 일이어서다. 죽음은 지금까지의 일이 끝났다는 선언인 셈이다. 아빠를 죽이고 싶다는 말은 끝이 있으니 더 용기를 가져도 된다는 맥락이었다. 그렇게 위악을 위안삼아 하루를 버티는 때가 있었다.

 

그는 자문했다. 왜 아빠를 돌볼까. 모멸을 감수하고 하고 싶은 일을 보류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 날이 지지부진 계속되는데  왜 나는 아빠를 돌볼까. 누군가는 그를 효자라고 불렀다. "효자"는 그 같은 자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돌봄을 집안 내 의무로 간주하는 의식이 ‘효자’라는 호명에 있었다. 효자란 호명은 그의 돌봄을 “집안일”로 만들었다. 그는 효자가 아니었다. 시민이라서 아빠를 돌봤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이 시민의 책무여서다.

 

조기현 씨는 돌봄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돌봄 행위에 시민적 덕목이 있고 가족에게 의존돼 있는 돌봄을 국가와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기현 작가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본 -아빠의 아빠가 됐다.jpg

 

 

- 돌봄을 수행하는 청년과 그 정책들에 대해 공론화하고 싶어 내 이야기를 썼는데 글을 쓴 본인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안타깝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개인적 경험을 발언하는 것에서부터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시나요.

 

한 사회의 빈틈을 제 경험을 발화해서 메울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화만으로 사회가 변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말하기, 그 다음을 고민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저에게 발화와 변화의 관계는 개인의 용기 있는 발화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다, 는 확정적인 답이라기보다 어떻게 개인의 발화로 사회적 변화까지 만들어나갈 수 있느냐, 는 진행 중인 실천 과제에 가깝습니다.

 


- 내 빈곤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서술이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가난을 타인에게 증명해야 하는 복지체계, 가난을 무능과 등치시키는 사회 인식 등이 지원이 필요한 당사자에게 어려움으로 작동합니다.

 

아픔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도 지속적으로 마주합니다. 몇 시간 만에 이뤄지는 의료진단은 돌봄 당사자들의 일상적 고통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로 하여금 “틀린 답을 쓰도록” 종용할까 고민했지만 “의지를 갖고 뭔가 해보려는 태도야말로 내가 바라던 회복된 아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여 어떤 관여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복지제도는 어려운 사람에게 적절한 지원을 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의료급여나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요양등급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을 무능으로 보는 건 구체적인 제도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저 생계비 같은 경우 정말 살아갈 수 있는 최저 생계비가 아닙니다. 19세기 구빈법을 기원으로 한 열등 처우 원칙을 기반으로 형성됩니다. 그러니까 가난하면 열등한 환경에 있어야 한다는 관점이고, 그래서 정말 죽지 않을 만큼만 주는 것이지요. 더불어 부양의무자 기준 같은 직계 혈족이 혈연의 빈곤을 다 떠맡는 제도도 정말 필요한 당사자에게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의료 중심의 지원 제도는 의사의 진단, 각종 제도의 의학적 판단을 심의하는 국민연금공단의 의사들의 판단이 모든 것의 최종심급이 됩니다. 하지만 질병이란 총체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지식만으로 확인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의학적 판단이 지금처럼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 국민 주치의 제도처럼 긴 시간 생애를 같이하는 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의학적 판단뿐만 아니라 필요를 증명하는 다른 여러 요소들을 고민해보는 것도 중요할 겁니다.

 

 

- 돌봄은 언제 어디서나 닥칠 수 있는 필연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특히 생산 가능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형국에서 청년 세대의 목소리를 포함한 돌봄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만 쉽지 않아 보여요. 정부는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을 ‘청년’으로 간주합니다. 청년 정책역시 이들의 취업과 자립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돌봄’을 논의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 또한 크게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점점 일자리도 사라지는 와중에 노동가능인구와 돌봄, 늙음, 장애, 죽음의 관계를 파악하는 프레임이 얼마나 유효할지도 의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돈을 버는 인구와 돈을 쓰는 인구가 생애주기로 크게 나누는 것도 사실입니다. 점점 청년들의 미취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 공백을 채우고 있는 부모 세대는 앞으로 제도, 상품, 재산 등으로 자신의 노후를 보장받을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거기에 유례없는 장수의 시대에 진입할텐데 국가는 이 같은 고령화 사회를 다뤄본 경험이 전무합니다.(제가 인구관리적인 효율을 긍정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국가의 태도를 말하기 위해 쓰는 말입니다.) 베이비부머와 586세대 같은 수적으로 많은 인구집단의 노후를 책임질 제도도 부재한 상태입니다. 그런 고민을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쓴 것이고, 그 바톤을 성빈님도 이어받으신 거라고 느낍니다. 지금 청년들의 욕구와 미래에 예견된 사회 사이에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무언가 해보려는 바톤 말이지요. 저는 어떤 실천이 가능한지 아직 모색 중입니다.

 

 

- 돌봄 정책은 가족 재생산을 필두로 한 정상가족의 틀 안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돌봄 정책은 베이비붐 세대인 장년층에게 맞춰져 있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돌봄을 논의하기에 앞서 가족 정책에 대한 논의가 선행돼야 할까요. 우리나라 가족 정책엔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저는 아직 가족 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무언가 논의할 수 있는 실력이 못됩니다. 하지만 제도 곳곳에서 개인이 아니라 가구 혹은 가족이 대상인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근대화를 이루고 더 쉽게 통치하는데 개개인을 존중할 필요를 없게 하는 유효한 방법이 바로 가족이라는 단위를 기본 단위로 두는 것이었습니다.


가족 내에 생산과 분배, 남성 가장 중심의 소득 보장, 가족을 유지시키기 위한 복지정책 등 말이죠.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것입니다. 1인 가구 증가, 고독사 등이 그런 관점의 약한 지점이고, 가족 내 계급재생산 혹은 한국의 가족과 얽힌 교육/부동산 문제 등이 그런 관점의 강한 지점입니다.


하지만 가족 해체를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단어에 투영하는 긍정적인 것들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가족이라는 단위를 사회로 보고, 어떻게 민주화 시킬 것인가. 가족 내부는 어떻게 수리할 것이며, 가족 외부는 어떻게 외연을 확장할 것인가. 다시 말해 가족 리부트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 “아버지를 돌보는 이유는 가족이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약자라서다” 돌봄을 가족이라서 당연히 치러야하는 책임이나 희생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사회적 행위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돌봄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걸로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작가님을 효자라고 부르는 건, 책임과 의무를 지나치게 부과하는 우리나라의 가족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혈연과 관계라는 이유로 모든 의무를 져야하는 게 가족입니다. 사람들 역시 단지 가족이니까, 라는 이유로 돌봄에 매진합니다. 부양의무제 같은 제도도 이런 인식을 토대로 구성된 제도일 겁니다.

 

우선 돌봄 사회화는 시장에서 구매하거나 국가가 몇 시간 제공, 시설 확충, 혹은 지역사회에서 살기 같은 시간과 공간으로만 환산될 수 없는 성찰이 있어야 하고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도화, 국가화, 시장화가 아닌 사회화라는 말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압축적인 근대화를 이룬 동아시아 국가에서 국가의 마땅한, 당연한 의무라는 말이 사실 성립되지 않겠지요. 소위 세계대전 같은 위기 상황에서 큰 저항 없이 사회국가를 만들었던 유럽과는 다른 정서가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그 다른 정서의 지점이 가족이라고 봅니다. 위에서 가족의 민주화, 가족 리부트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뉴스에서 자주 가족 간 폭력, 위해, 다툼, 살인 등을 많이 보고, 일상에서 정서적 소통을 하지 못하는 상황도 자주 봅니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모종의 이데올로기가 가족이기에 만나고 나누는 행위를 만들어냅니다.


저는 그런 요소를 어떻게 사회화하느냐에 따라 돌봄의 사회화가 가능하다고 느낍니다. 돌봄을 노동으로 보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돌봄이 필요한 자가 존엄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제도적 아이디어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제도가 더 나은 관계 안에 안착하기 위해서 가족과 사회의 역학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립을 자처하는 이는 없다. 고립을 통해 성장하는 이도 없다. 내가 지금의 ‘나’로 자랄 수 있었던 건 누군가 나를 돌봐줘서다. 서로 돌보고 아끼는 경험을 통해 내 자아를 키웠다. 우리는 결혼이나 가족이 아니어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개인의 생애에서 ‘돌봄’은 필연이다. 어렸을 땐 돌봄의 대상이었고 커서는 돌봄의 주체가 된다. 그리하여 돌봄은 조기현 씨가 책에 썼던 것처럼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는 강력한 의지”다.

 

동시에 돌봄은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시민의 책무이며 정치행위의 일환이다. 약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윤리이여서다(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이매진, 2019, p207)  지금, 돌봄은 오롯이 가족의 책임이다. 정재훈 교수(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는 돌봄이 오롯이 가족에게 전담돼 있는 현상을 암묵적 가족주의의 일환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암묵적 가족주의의 국가다. 국가의 몫까지 가족이 대신해주고 있다. 가족의 몫으로 설정된 ‘돌봄’의 균형을 다시 맞춰야 하는 때가 아닐까.


 

 

박성빈.jpg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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