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정말로 거의 떠나버릴 뻔했던,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도서]

레이어와 레이어의 충돌, 주파수와 주파수의 충돌, 월리스와 나의 충돌
글 입력 2020.05.2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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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태리에 거주하는 패션 유튜버 밀라 논나 씨와 배우 한예슬씨의 합방 <밀라노나 선생님과의 봄날의 데이트>가 있다. 두 유튜버는 영상 속에서 육아와 결혼, 유학과 이민, 패션과 컨셉, 정체성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한예슬 씨가 밀라 논나가 바라보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브랜드 이미지를 말해달라고 한다.


“사실은 그런데, 예슬씨 같은 경우에는 얼굴이 예쁘기 때문에, 몸매도 예쁘고, 나를 규정하고 싶지 않아. 어떤 날은 정말 팜므파탈같이 입었다가, 어떤 날은 정말 청초하게 입었다가, 그걸 다 연출할 수 있고, 그게 배우잖아, 얼마나 재밌어”

 

라고 하는 밀라 노나의 말에, 한예슬 씨는

 

“팔색조라는 것이잖아요. 어떤 브랜드에도 다 잘 어울리는. 최고의 찬사네요 선생님”

 

이라고 답한다. 한예슬 씨가 자신의 이미지를 특정한 브랜드나 스타일에 맞추지 말고 다양한 변화를 주는 것도 재밌을 거라는 의도로 밀라 논나 씨가 말한 것을 한예슬 씨는 약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였다. 대화의 맥락을 끊을 만큼 이상한 흐름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의 포인트가 약간은 다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분짜리 짧은 동영상일 뿐인데, 그런 부분을 여러 곳 발견할 수 있었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고, 윤리 도덕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게 주체적인 21세기의 젊은이들이지. 몫을 나누지 않을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게 내 지론이에요.”

 

하는 밀라노나 씨의 말씀에 한예슬 씨는 카메라를 향해

 

“너무 신선하지 않아요?”

 

라고 하는 모습에서도 약간의 괴리감을 느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냥 넘어갈 정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서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 내가 좋아하는 배우에게 악영향이 갈까 봐 걱정되긴 하면서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초점이 약간 다르다고 말을 하는 것이 그들을 싫어하거나, 좋아한다는 내 선호도의 판단 근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랬다는 사실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고, 일부 댓글에서 “텐션이 아예 따로 놀아서, 포토샵으로 치면 레이어가 다르다”고 하는 의견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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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살아가다 보면 그런 경험을 많이 한다. 내가 말하는 대화의 의미와 뉘앙스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굳이 한 번 더 같은 말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해도 내 의도가 전달이 잘못된다거나 혹시나 안 좋은 소문으로 변질한다면 그 사람과 나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어떤 사람과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로, 서로의 대화에서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우선순위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 차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 위의 언급한 이야기는 비단 대화에서만 통하는 상황인 것만은 아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언급했듯이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미국 최고’ 시리즈의 문집들을 마치 휘틀러 샘플러 초콜릿처럼 생각한다. 이것저것 아무렇게나 골라서 맛을 본다. 보통 책을 읽을 때처럼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다. 다시 말해 독자는 더 큰 선택의 자유를 가지며 그것은 매우 미국적인 정신에 속한다.”와 같은 맥락으로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책을 골라서 읽는다.

 

특히 나는 그 변덕이 심한 축에 속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내 손가락의 길이대로 적당한 페이지를 열어보고 문체나, 따옴표의 위치나,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말 따위가 얼마나 내 삶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판단하고,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책꽂이에 꽂아버린다.


그러나 학교에서 방학 숙제로 읽어야 하는 책이나, 대학교 기말과제 리포트에 참고해야 할 책, 또는 아트인사이트에서 문화초대를 받아서 의무적으로 리뷰를 작성해야 하는 책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면 정말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책을 빨리 읽는다고 생각하는 편인데도,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50페이지도 다 읽지 못한 기적을 맛보았고, 책을 읽어야 하는 기간 내내 책 제목처럼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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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의 문장에는 웬만하면 쉼표가 없다.

 


스쿠터는 일종의 범퍼카인데 빠르고 무자비하며 완충 장치가 부족해서 척추 지압사 방문을 보장하는 놀이 기구로서 담당 기사는 내가 볼 때마다 같은 의자에 같은 자세로 늘어져 있는데 미친 듯 움직이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사용된 티켓을 찢는 모습은 감금 병동에 있는 사람의 얼빠진 집중력을 느끼게 한다. 나는 승강장 난간에 자연스럽게 기대어 서서 기자 출입증이 잘 보이는 위치에서 대롱거리게 만든 다음 남자에게 일이 지루할 텐데 어떻게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는지 친근하게 다가가 묻는다. 남자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얼굴에 심각한 틱 증세가 있음이 드러난다. “그게 무슨 개소리에요?”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p.100



“그게 무슨 개소리에요?”를 제외하면 위의 문장은 단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간에 쉼표 하나 발견할 수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문장을 읽다가 주어를 까먹기 일쑤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어를 생각하다 보면 책 전체 내용을 잊어버리게 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책을 덮고 부족한 잠을 청하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간혹가다가 부사로 정말 강조하는 부분을 제외하고서는 쉼표를 쉽게 쓰지 않는 것이 그의 글의 특징이며, 어쩌면 그 사람 자체가 호흡을 쉽게 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은 그가 나와 다른 개성 중에 하나일 뿐이지, 그가 쓰는 글이 재미가 없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는 최종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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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그런데도 그의 묘사는 정말 생생하며, 지금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같고, 소설이 영화보다 가장 부족한 현실성을 제공한다.

 


사람 간의 순수한 폭력이 보고 싶다면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를 찾아보길 권한다. 성인 프로 선수들의 매끄러운 발놀림이나 로프에 몸을 기대는 식의 방어 따위는 여기서 찾아볼 수 없다.

(...)

코치들을 보니 내 어린 시절 다양한 친구들의 아버지들이 떠오른다. 혈색이 좋고, 시퍼런 턱, 황소 같은 목, 냉혹한 눈을 가진 남자들, 볼링을 치고, 속옷 바람으로 TV를 보고, 합법적인 싸움을 관장하는 남자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p.90

 


그동안 길가에 늘어선 융모에서 복잡한 현금과 에너지의 교환이 이루어지며, 마침내 채워진 동시에 고갈된 상태로, 대량 유출을 계산하고 설계된 출구로 배출된다. 뿐만 아니라 음식의 전시, 음식 생산의 전시, 끊이지 않는 음식 부스, 그리고 음식의 소요파적 소비가 있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p.94



묘사만 봐도 눈앞에서 어떤 생생한 현실이 그려진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단순하고 명료하게 처리해서 뇌 속에 입력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야말로 과부하로 느껴졌고, 왜 데이비드 월리스가 박물관 같은 공간에 갔을 때 과부하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을 간단하게 보는 사람에게, 너무 과한 설명과 누군가의 사고방식을 주입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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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월리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월리스는 십 대 때부터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았다. 스무 살 무렵 첫 자살 충동을 겪은 뒤 평생 항우울제를 복용했고, 항우울제가 잘 듣지 않으면 전기충격요법 같은 치료를 했다. 그로 인해 기억력 상실과 같은 후유증을 겪었다. 자살 충동 이외에도 그는 술, 마리화나, 텔레비전, 섹스, 설탕 중독이었고, 병균, 물, 비행기 등에 공포증이 있었다.


나는 사실 우울증을 겪지 않은 사람이고 어쩌면 우울증 번외의 자리에 위치한 사람이라, 함부로 말할 수는 없고, 그가 이런 섬세하고 상세한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근원에 우울증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세상을 너무 예민하게 바라본 나머지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지, 그 둘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내가 데이비드 월리스의 글을 너무나 어려워하고 있는 게 분명한 이유 중의 하나로 그의 우울증이 원인일 것 같긴 하다. 보통 나와는 다른 사람을 볼 때, 나와 다른 점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고, 흥미를 잃어버릴 수 있는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는데, 흥미를 줄 여지를 남길 정도의 수용 가능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과 감당하지 못할,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것과의 사소한 틈 때문은 아닐까.

 

*

 

셋째, 사고방식의 차이다.

 


한 가족이 로널드 풍선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아이들을 그 앞에 신중하게 세운다.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는다. 왜?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p.62

 


어떤 죄를 저질러야 남이 내 엉덩이를 붙잡고 저렇게 높은 곳으로 데려가 고공의 소고기처럼 매달아도 억울하지 않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그런 죄들의 목록을 만들고 있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p.104



정말 독특한 사고방식과 그 결과로 나온 문장들이다. 나는 데이비드 월리스처럼은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겠다. 그의 문장은 주관이 나중에 섞인 객관적인 문장을 서술하고 있지만, 그의 문장들은 하나같이 전부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저 문장을 서술하는 사람이라면, "한 가족이 로널드 풍선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아이들을 그 앞에 신중하게 세우는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라고 적었을 것이고, 두 번째 문장은 아예 떠올릴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나에겐 비현실적이고 시간낭비 항목에 넣어야 할 것 같은 의문이다.

 

객관성과 주관성 둘 중의 하나의 태도를 취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죄의 목록을 상세하게 서술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글은 늘 이런 식이다. 현실에서 공상으로 이동했다가, 그 공상은 어떤 논리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바로 맥락이 사라진다. 그러다가 나중에 뒤늦게서야 다 잊어갈때쯤에 나타나거나, 아니면 전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포인트를 다시 언급해서 읽는 속도를 느리게 만들고,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이야기에 빠져들려고 하면, 그 특유의 사고 회로로 다시 끄집어낸다.

 


사람 간의 순수한 폭력이 보고 싶다면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를 찾아보길 권한다. 성인 프로 선수들의 매끄러운 발놀림이나 로프에 몸을 기대는 식의 방어 따위는 여기서 찾아볼 수 없다.

(...)

코치들을 보니 내 어린 시절 다양한 친구들의 아버지들이 떠오른다. 혈색이 좋고, 시퍼런 턱, 황소 같은 목, 냉혹한 눈을 가진 남자들, 볼링을 치고, 속옷 바람으로 TV를 보고, 합법적인 싸움을 관장하는 남자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p.90



그의 문장은 과거와 현재가 마음껏 뒤섞여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재 모든 것을 충실히 서술하다가도 자신의 과거로 흘러가 있으며, 이해하지 못할 미국식 농담을 하기도 한다. 에세이를 읽고 있다 보면, 전혀 개인 사정을 알고 싶지 않을 대학교수님이 학생들을 점심시간에 불러모아 굳이 밥을 사주면서 과거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자리를 만들어서 체했던 경험이 되살아나서 너무나 불쾌해진다.

 

심지어 데이비드 월리스는 그런 까다로운 단어와 문장과 문단과 페이지 사이에 수도 없이 많은 괄호와 각주를 넣는데, 간혹 어떤 페이지는 본문과 각주의 비율이 1:3이나 되는, 배보다 배꼽이 커져 버린 경험을 하게 된다. 책의 내용에 집중하기보다는 옮긴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만다.

 

책 뒤의 평론 "그의 정신은 남들과는 다른 주파수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로버트 매크럼 <가디언>)의 문장이 묘하게, 밀라 논나 씨와 한예슬 씨의 유튜브 합방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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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월리스의 글은 분명 접근성이 떨어지고, 가독성이 떨어지지만, 흥미가 없는 글인 것은 아니다. 특히 하나의 이야기 안에 그의 생각이 드러나는 수십가지의 주제가 담겨 있고, 일상 생활에서 그러한 생각들이 들어가있다는 것은 분명 읽는 사람들에게 큰 재미를 준다. 또한 주제를 선정할 때 정말 참신하고, 그의 유아독존적인 성향을 분명히 솔직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다시 첫째, 어린 시절의 허황됨과 자기 중심적인 상황을 이렇게 명쾌하게 표현하기도 힘들다.

 


내가 아직도 그리워하는 몇 안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내가 중서부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이상하고 망령된, 그러나 굳은 확신으로서 내 주변의 모든 게 다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확신이며 상당히 편집증적이다. 아마도 내가 정말 그리워하는 것은 아이의 지나치고 망령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어떤 갈등이나 고통도 불러오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어린아이가 깜깜한 곳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어둠 속에 송곳니가 날카로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지워버린 모든 것의 부재 그 자체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p.20



눈을 감으면 세상이 멈춰버리고, 내가 눈을 뜬 순간 그때부터 다시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 즉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으로 반박할 수 있는 생각이다. 내가 상자 안을 보지 못한다면 상자 속 고양이는 전기충격을 받고 죽었을 수도 있고, 살아있을 수도 있다. 그 확률은 절반이다. 따라서 상자 속 고양이는 삶과 죽음 두 개의 상태가 중첩된 상태에서 존재하며, 관측으로 생과 사를 결정할 수 있다.


그의 문장에서 인상 깊은 구절은 “아마도 내가 정말 그리워하는 것은 아이의 지나치고 망령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어떤 갈등이나 고통도 불러오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다. 아이의 자기 중심성은 당연한 사실로 여겨지고, 몇몇 정신병을 앓는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아이의 미성숙함을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으로 너그럽게 바라본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돼서, 자유로워서, 같은 단순한 이유에 앞서서 그렇게까지 어린아이의 자유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린아이의 자유로움을 이보다 더 어른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가. 데이비드 월리스만이 가능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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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인생 목표 중 하나가 공포의 최소화라니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매달리고 떨어지고 고속으로 이리저리 던져지고 토할 때까지 거꾸로 걸려 있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마치 돈을 내고 교통사고를 당하려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이 세상에는 관리된 조건 아래의 공포 체험에서 흥분을 느끼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나의 기본적인 인생 목표 가운데 하나는 나의 신경계가 노출되는 총 공포의 양을 가능한 한 최소로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잔인한 역설이 자리하고 있는데 나 같은 신경 체질을 가진 사람은 대개 공포에 휩싸이기 매우 쉬운 예민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p.96

 


놀이기구가 안전한 환경이 뒷받침되고, 그걸 믿는 사람들이라서 스릴을 즐길 수 있다는 표현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구나! 새삼 느꼈던 문장이다. 그러는 한편 자신의 인생 목표가 ‘공포의 최소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흔한가, 하는 고뇌에 빠졌다. 정말 이색적인 인생 목표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서구적인 사고방식인가 의문에도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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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해

 


“동부에서는 성 정치적 분노 그 자체가 재미거든. 뉴욕 여자가 거꾸로 매달려 더러운 시선을 받았다면 그 여자는 다른 여자들을 불러 모은 다음 다들 성 정치적 분노를 발산하지. 시선을 보낸 사람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가처분 명령을 신청하겠지. 주최 측은 엄청난 돈을 들여 법정에서 다툴거야. 희롱받지 않고 재미를 추구할 여성의 권리가 침해된 거지.”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p.41



사실 이 부분은 정말 흥미로웠다. 놀이기구에서 여성의 치마 속을 한시라도 더 많이 들여다보려고 일부러 더 거세게 하려는 진행자들의 욕구를 주인공의 ‘토박이 친구’는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의 자유로울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는 주인공 남성이 토박이 친구의 ‘성적 자존심’을 자극한다.

 


“네 치마 속을 보고 있었어. 너는 안 보였겠지만, 널 저 높이 거꾸로 매달아서 네 치마가 올라가게 한 다음에 껄떡대며 봤다니까. 손으로 볕을 가리고 둘이 농담하면서. 내가 다 봤어.”

“염병한다.”

“불편하지 않아? 중서부 사람은 불편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감이 안 오는 거야?”

“내가 눈치를 챘든 못 챘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세상에 개새끼들이 많다고 해서 지퍼도 못 타? 실컷 돌지도 못해? 수영장도 못 가고 예쁘게 꾸미지도 못해? 개새끼들 무서워서?”



사실 내 생각은 주인공 남성보다는 토박이 친구의 생각과 더 닮았다. 단순히 ‘개새끼들’의 웃음거리라고만 하기에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바라보는 것이 개인의 문제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은 그저 타인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라고 여기고 그저 생산적인 일에 내 시간을 소비할 것. 이미 일어난 일이고, 신경을 쓰고 화를 내 봐야 내 발전적인 시간을 허튼일에 쓰는 시간 낭비와 감정 소모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어쩌면, 자신의 시간을 바쳐서 여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리고 현재도 노력하고 있는 여성들의 희생 덕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고려하면 함부로 내뱉지 못할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어쩌면 데이비드 월리스 역시 동부의 사건을 앵무새처럼 전달하기만 하는 주인공 남성보다, 토박이 친구라는 여성 화자를 빌려서, ‘여성들이 성 정치적 문제로 들고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은 사실 개인적인 문제이며, 여성들이 그저 무시하고 살면 되는 건데 괜히 여자들을 불러모아서 일을 크게 벌인다’라는 비판과 경멸 섞인 감정이 들어갔을지도 모를 문장이라 생각하면 좀 불쾌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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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어 사전을 든 페니스에 불과할 뿐이야.”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문학 독자들은 대부분 40세 이하이고 상당수가 여성이며 단 한 명도 전후GMN을 크게 동경하지 않는다. 업다이크의 책뿐만 아니라 어쩐지 업다이크라는 사람을 언급하기만 해도 깜짝 놀랄만한 반응이 돌아온다.

 


가령 존 업다이크는 수십 년 동안 근본적으로 같은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았고, 이들은 모두 업다이크 자신의 대역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항상 펜실베이니아 아니면 뉴잉글랜드에 살고 있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거나 이혼했으며 업다이크와 나이가 비슷하다. 언제나 화자 자신이거나 시점 인물로 작가처럼 놀랍고 천잭적인 지각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업다이크와 마찬가지로 호화롭고 공감각적인 언어로 어려움 없이 생각하고 말한다. 또한 구제불능의 나르시시스트이자 바람둥이이며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에 빠져있다. 그리고 매우 고독한데 정서적 유아론자에게만 가능한 방식으로 고독하다. 그들은 어떤 커다란 단위나 집단, 대의에 속하지 않는 듯하다. 대체로 가정적이지만 누군가를, 특히 여성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남자색정증 수준의 이성애를 추구하지만 여성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극히 아름답게 바라보고 묘사하는 주변 세계는 그들의 위대한 자아 내부에 인상과 연상, 감정과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 종말일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종말일 것은 분명한> p.216



그가 업다이크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주 날카롭지만, 옮긴이는 업다이크에 대한 데이비드 월리스의 평가 “성찰이 결여된, 때로는 병적인, 가끔은 비겁한 자기중심적 남성으로서 그 모습이 숨김없이, 그대로, 반복해서 드러” 난다고 하는 한 문장으로 요약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 떳떳하기에 타인을 비판하는 글을 썼을까. 타인의 결점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은 그런 결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마음이었던가. 그건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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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조화와 체계화에 능숙하지 못하다. 같은 일을 해도 어떤 날에는 운이 좋아서 잘 했다가, 어떤 날에는 또 운이 없어서 못 한다. 학교과제로 나가는 팀플이라거나, 아르바이트에서 내가 매일같이 해야하는 일에는 상대방에게 단기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예외를 발휘하지만, 피해를 보는 대상이 나에게 국한되면 특유의 게으름이 발동된다. 어떻게 했더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더니 자연스럽게 됐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했고, 지금도 잘 살아있다는 낙관적인 인생 탓이다.

 

그 게으름은 섬세하지 못한 성격과도 끝이 맞닿아 있어서, 지나치는 거리의 자세한 풍경도 기억하지 못하고, 누군가 넌지시 말한 것은 절대 기억하는 법이 없다. 이른바 나는 내 눈에 들어온 것들만 기억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며, 솔직하게 말하면 머리가 나빠서 그것만 기억하기에도 벅차다. 그 덕분에 자기합리화의 측면에서는 거의 최상의 점수를 받을 정도로, 그저 게으르고 대충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요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은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게 마음 편하고, 굳이 세상을 자세히 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런 면에서 데이비드 월리스의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는 도대체 제목부터 뭐라고 형용해야 할 지 모를 느낌을 주었고, 그의 글자들로 내 머리는 며칠째 과부하 상태에 이르렀다. 보통은 책에 있는 글을 노트북으로 쓰려고 하면 웬만해서는 잘 써지는데,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는 내가 기억하는 글자들과 책에 실제로 적힌 글자들이 너무 다른 부분이 많아 오타가 많이 나고, 버벅거렸다.

 


여기서 ‘가치’가 무슨 뜻이며 이것이 표지에 있는 ‘최고’라는 말보다 그 구체성과 매력에서 더 개선된 것인지 묻고 싶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최고’보다 더 좋거나 덜 모호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가치’는 일단 순수 미학을 그토록 골치 아프게 만드는 형이상학을 피해간다. 또한 더욱 공공연하고 솔직하게 주관적이다. 가치는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므로 어떤 한계를 가진, 주관적인 인간이 가치를 매긴다는 사실이 그 말 속에 이미 들어가있다. 여기까지는 말끔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한계를 가진 이 인간이 잣대로서 ‘가치’를 말할 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결정권자가 된다는 것> p.274



그런데, 마침 가치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기가 망설여지는 것은 그의 책에 있던 위의 글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한, 가치라는 단어에 그런 한계를 부여해버릴 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내가 흔한 단어를 쉽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하며, 나르시즘에 빠져있기도 했지만, 그가 '가치'라는 한 단어에 부여한 문장을 보고 나니 또 대충 넘어가려는 내 습관을 깨달아서 눈치가 보인다.

 

어쨌든 현실을 너무 충실히 묘사한 나머지, 읽는 사람에게마저 피로함을 제공할 정도지만, 그의 글은 분명 기존에 존재하던 사물들을 다시 한번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주기도 하고, "모든 읽기는 글의 주제에 대한 깨달음과 글쓴이에 대한 깨달음을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글을 읽는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활동임"(*)을 깨닫는다. (* 옮긴이의 말)

 




[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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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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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선하고 날카로운 비평에 새로운 시각의 힘을 느낍니다. 구조화에 능숙치 않다해주셨지만, 에디터님이 어떤 것을 읽었는지 독자로서는 정말 충실히 읽혔습니다.월리스의 특성상 작가의 의식을 숨가쁘게 쫓다보니 에디터님이 지적한 문체와 시각의 한 부분은 생각치도 못했네요. 감상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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