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을 깨우는 피리 소리, '피리 부는 여자들' [도서]

그 소리의 끝을 따라가자 감춰진 가능성이 자리했다.
글 입력 2020.05.2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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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선별적으로 기억된다. 합리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떠올리기에 향긋한 것은 뚜렷하고, 불편한 것은 어렴풋하다. 그러다 깊이 숨겨진 어떤 기억이 오랜 시간을 지나 문득 떠오르는 때가 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기억인지라, 자신에게도 놀라운 어떤 기억. 이 기억은 복잡한 상황에 대한, 아니면 잊고 지내던 관계에 대한, 혹은 지나가던 생각에 대한 이미지다.


회상이 시작되면 멈추어 있던 이미지에 나름대로 어울릴 것이라 예상되는 색을 칠해보지만 조화롭지가 않다. 저편에 던져두었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어딘가 불편한 이미지였다는 사실의 증거이므로, 다시금 꺼내어 현실감을 더하려는 시도가 어색함은 당연하다. 근데 이렇게 어색하고 어렴풋하던 기억은, 그 이미지가 왜 불편했는지 파고드는 순간부터 다시 뚜렷해진다.

 

책 ‘피리 부는 여자들’은 가부장제와 이성애 규범성에서 벗어난 여성 간의 생활, 섹슈얼리티, 친밀성을 이야기하며, 이것을 읽는 여성들이 각자 보이지 않는 곳에 묻어둔 기억들을 불러낸다. 책에서 회상되는 기억은 여성이 남성과 가정을 이루지 않는, 어렴풋하고 어색하기만 하던 삶과 사랑의 형태이다. 누군가는 아직 향을 맡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기억을 현실로 꺼낸 권사랑, 서한나, 이민경 작가는 쉬이 그려지지 않던 여성 간 여러 관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책을 읽으며, 그동안 상상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묻어둔 기억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실 그간의 기억은 향긋해서 뚜렷했던 것이 아니라, 뚜렷하다는 이유만으로 허상의 향기를 풍기던 것 아닐까. 존재도 불투명한 향기를 고집하는 규범 밖에서 세 명의 작가가 이야기하는 여성 간 관계는 확실한 향기를 내뿜는다.

 

‘피리 부는 여자들’의 첫 번째 장,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는 여성 간의 생활에 대한 권사랑 작가의 글이다. 비혼 여성들의 공동주거. 생각은 해보았지만 먼 이야기 같고, 깊이 들어가면 어딘가 위태롭진 않을까 하고 각오를 요하던 상상이다. 각오가 필요한 걱정들에 권사랑 작가는 경험에 기반하여 명쾌히 대답한다.

 

돈은 어떻게 마련하지? 정책과 대출 프로그램을 알아 두자. 동거인과 생활 방식이 심하게 어긋나면?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일단 ‘한번 살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돈은 어떻게 나누지? 각자의 성향을 고려해서 개인 지출과 공동 지출을 나누는 방법도 있다. 비혼 여성들의 주거가 수십 년 후에도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있다. 비혼 여성들의 존재감은 확실해질 것이며, 그 규모는 지금도 불어나고 있다.

 

잘 정돈된 대답 너머에는, 걱정에 가려 보이지 않던 양지바른 터가 자리 잡는다. 여성들의 확장되는 사회자본과 활동력의 터. 비혼 여성들이 모여 주거공간을 이루고, 이웃이 되어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관계망을 넓히는 것. 서로의 안위를 보살펴 각자의 육체와 정신을 질 높게 유지하는 것. 권사랑 작가가, 그의 주변인들이 공동주거를 통해 경험하는 환경의 변화는 이야기되지 않던 환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장,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의 저자 서한나는 여성 간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수학학원의 소음을 배경으로 키운 앳된 사랑부터 눈물과 땀을 머금은 습한 사랑까지.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과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다.

 

글은 연신 감정의 기억을 툭툭 건드린다. 모두 다른 사랑을 하지만, 비슷하게 지나가는 순간들이 분명 있다. 서한나 작가는 이런 포인트를 기가 막히게 잡는다. 예컨대 긴 통화 후 패어 있는 흙바닥, 의미심장한 상대의 행동을 되새길 때 ‘기억이 펑펑 튀어’ 불쑥 솟는 자신감, 눈길 가던 사람이 꿈에 나온 후의 복합적인 감정 따위 말이다. 하나하나 꼽자면 글을 줄줄 읊어야 할 만큼 생생한 묘사로 가득 차 있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저자의 사랑 이야기에, 그의 친구들은 열광하면서도 신기해한다. 잘 모르겠다. 진짜 신기한 존재는 사랑을 주고받는 여자들의 관계가 아니라, 환상동물 같고 끌리지 않는 이성이라도 그럭저럭 때에 맞춰 만나려는 관계 아닐지.

 

마지막 장을 쓴 이민경 작가는 ‘긴 행렬을 부르는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여성 간 친밀성에 대한 글을 쓴다. 여자들은 서로와 연결되는 것을 갈망하면서도 한계를 설정한다. 여성 간 친밀성이 주는 안정적인 느낌을 알면서도, 그런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민경 작가는 그 이유를 오래된 신화에 둔다. ‘여자들이 여자를 믿고 끝까지 남으면 바보가 된다는 신화’. 이 신화는 여성 간 관계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선을 정한다. 그 선을 넘은 관계, 예를 들어 여성들의 공동 주거나 비혼을 대상으로는 ‘걔가 배신하면 어쩔래 너?’, ‘꼭 그런 애들이 먼저 결혼하더라’ 등과 같이 충고인지 주문인지 모를 말들이 쏟아진다.

 

여성들이 맺는 관계의 지속성이 습관적으로 의심받는 세상에서 우린, 머리가 아닌 몸을 따르면 된다. 머리에서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라고 해서 몸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머리를 비우고 몸을 따라가자. 머리가 완성하기엔 벅찬 그림을 현실에서 마주할 테니.

 

책 속 모든 단어에 담긴 깊은 무게감은 상대적으로 도달한다. 고로 누군가는 피리 소리를 듣지못할 것이고, 누군가는 소리를 따르는 행렬의 뒤를 이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직접 피리를 불 것이다. 확실한 것은 소리를 듣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소리는 날아가지 않고 사람이 되어, 현실이 되어, 현상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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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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