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의 일기] 02.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글 입력 2020.05.0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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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남동생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애틋했다. 동생이 어릴 때 자기 장래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커피 바리스타와 헤어 디자이너를 말했었는데, 엄마는 남자애가 무슨 그런 꿈을 꾸냐며 싫어했다.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학과를 선택할 때 엄마와 아빠는 동생이 취직 잘 되는 공대를 가기를 바랐다. 동생도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서 빨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서 남들보다 많은 월급을 받을 거라고 했다.

 

동생이 자신이 가진 ‘성별’이라는 것에 관계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를 바랐다. 물론 공대 진학이라는 것이 자신이 원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만, 빠른 졸업과 많은 월급은 삶을 지탱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선택하게 그냥 두면 안돼?”라는 나의 말에 엄마는 “쟤는 남자잖아. 너랑 달라. 쟤는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애야”라고 했다. 동생에게는 책임질 가정이 있었고, 나는 책임질 가정이 없었다. 그건 곧 우리 모두에 대한 폭력이었다. 동생은 책임이라는 이유로 더욱 권력과 힘을 쫓으며 남자답지 못한 위협에서 벗어나야 할 운명이었고, 나는 책임이라는 이유로 그 권력관계의 아래에 위치할 운명이었다.



2.

어릴 때 나는 아빠를 좋아했다. 가끔씩 폭발해 무섭게 돌변할 때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평상시에는 다정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관계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 군림하고 있던 권력을 내가 알아채면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나에게는 문과, 이과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아빠는 취직을 위해 무조건 이과를 선택하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따랐다. 1년을 공부하고 나니 영 내 적성과 맞지 않았다. 문과로 전향하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여자애가 멍청해서 그거 하나 못하냐, 너는 여자니까 이과 공부를 계속해서 취직 잘 되는 간호학과를 가라”고 했다.


그 후에 내가 예술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는데, “너는 내 말 안 듣고 나중에 무조건 후회하는 날이 올 거다” “그 공부 해서 잘 먹고 사는 사람 한 명도 없다” 등등의 말들이었다. 아빠는 평상시에도 “내 말만 믿으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말을 자주 했는데,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가장이라는 자신의 권위를 다시금 되새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빠는 여전히 그것이 내 앞날을 걱정한 일종의 걱정과 염려가 듬뿍 담긴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 번은 남동생이 가족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아주 심한 욕을 했다. 뜨거운 것이 밀고 올라오더니 눈에서는 타오르며 흘러내렸고,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끓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아빠는 동생에게 안경을 벗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금방이라도 굵은 손가락이 동생 뺨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아빠는 ‘감히 내 앞에서 누나한테 뭐 하는 짓이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건 최고 권력자인 ‘아빠 앞에서’ 했기 때문에 더욱 용인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이 지나고 그 일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모두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폭력 속에 갈기 갈기 찢긴 내가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은 그들 모두를 증오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두려움을 숨기기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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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남성다움’에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 그것에 동참하고 있었다. 증오를 통해 나는 다시 권위를 찾고 있었다. 내 숨을 끊어버리듯 울컥거리는 것에 그들이 잠겨버렸으면 했다. 내가 권력과 폭력으로 그들을 다시금 짓누르는 상상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가부장제의 그것을 되풀이했고, 제일 위쪽에 군림함으로써 결국 이 고통을 끊어내는 방식은 폭력과 권력뿐이라고 스스로를 부추겼다.


내 몸 깊은 곳에서 들끓는 뜨거운 것에 스스로 타 버리지 않으려면 그 온도를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무언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이 웃음으로 가볍게 소비하는 것은 아니길 바랐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해소하고 싶었다. 더 이상 폭력과 억압이 없는 방식으로. 증오는 결국 나에게도 상처만 남겼다.


책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에서 조이 저스티스는 성차별주의의 피해자를 밝히는 문제에 대한 두 가지 시각, ‘남성이 여성을 억압한다는 시각’과 ‘인간은 인간일 뿐이며 우리 모두 고정된 성역할로 상처를 입는다는 시각’이 공존한다고 말한다. 벨 훅스는 이 책에서, 인간 모두가 고정된 성역할로 고통받으며, 그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이 용서될 수 있다는 말과 동일시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성의 고통을 인정한다고 해서 절대 여성들에게 가한 억압과 그에 따른 책임이 가벼워질 수 없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그는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남동생 그리고 아빠가 나에게 가했던 폭력과 분노 뒤에 숨겨진 것은 두려움이었을 거다. 남자답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의 권위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내가 터트렸던 분노와 증오는 그 폭력에 잠식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페미니스트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이 곧 가부장제와 그에 따른 남성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니까.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이제 나는 두려움과 분노의 편지가 아닌, 동참과 악수의 편지를 쓴다. 우리가 손잡을 때 자유는 한 발자국 더 다가올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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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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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2eon
    • 예전에 페미니즘을 주제로 교내 학보사에서 서평 기사를 작성하면서,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간의 첨예한 대립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다움의 일환이라 여겨졌던 것들과 여성다움의 일환으로 여겨졌던 것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각자가 겪어왔던 불합리함을 폭로하는 데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책의 주장들이 그러하기도 했고요. 우리는 언제쯤 그렇게 당연시 여겨지는 굴레들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장소현 님이 말씀해주신 대로 우리는 언제나 '남자다운 것', '여자다운 것'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히려 그런 굴레들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고 있을 때도 많죠. 저 역시도 여성에게 꾸밈이 필수에 가까운 노동으로 다가온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런 꾸밈을 스스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하거든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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