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어나는 삶들, 그 안을 거닐며 - 꽃을 기다리다 [도서]

글과 스케치를 통하여 꽃을, 식물을 느껴본다
글 입력 2020.05.0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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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지막 수요일, 어쩐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잠이 항상 아쉬운 나인데 어쩐 일일까,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포근하고 맑은 3월의 아침, 모두의 일상이 그 날씨를 맘껏 즐길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잠깐이나마 외출로 누리고 싶었다. 당시는 집에서 일하면서 지내던 차라 이미 직장인들의 출퇴근 행렬이 사라진 거리를, 광장과 빌딩 사이를 그저 마냥 걸었다. 평일 오전에 이렇게 여유를 즐기는 것도 언젠가 아쉬워질 때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거리의 요구르트 판매원과 소소한 덕담도 나누고, 오랜만에 요구르트를 마시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덕수궁 앞에 와 있었다. 궁 앞에 “오늘은 문화의 날로 입장료는 무료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거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궁은 어느 때보다도 고요해 보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무도 없는 고궁을 나 혼자 돌아다니는 모습을 떠올리곤 했는데 오늘이 그를 이룰 날인가 싶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만 가득하다. 궁을 관리하는 직원 몇 명만 자리하고 있으니 아주 오래전 이곳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감했던 사람들이 맞이한 아침이 이랬을까 하는 상상을 이어가며 천천히 걸었다. 그날, 머리 위와 발 디디는 곳 모두 자리한 만개한 벚꽃이 핀 곳을 따라 걷다가 처음으로 혼자 석조전을 마주하고, 사진 찍으려고 줄 서 있는 관광객들을 의식하지 않고 궁을 거닐 수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그런 순간들을 누릴 수 있던 것도 매우 좋았지만, 사실 그날의 덕수궁 방문에 가장 기억이 남는 순간은 뒤쪽 길을 걸을 때 마주한 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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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의 후문으로 이어지는 뒷길 중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정성스레 꽂아 둔 식물의 이름표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름이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의 외출 이후, 위의 사진을 바라보며 왜 그렇게 흐뭇한 감상을 받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식물이 싹 틔우는 모습이, 그 옆에 자리한 꽃과 나무가 다 같이 봄의 정경을 드러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시 돌아온 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건, 뻗어 나가는 생명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생각할 거리를 준다.
 
떠나가는 봄이 유난히 더 아쉬운 요즈음, 식물과 꽃을 기록하고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을 발견했다. 외출을 자제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에 좋은 소재라 여기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꽃과 새싹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일 것이라고 예상한 나의 섣부른 생각과는 달리 책에는 식물의 잎사귀와 뿌리, 사계절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와 스케치가 함께 담겨 있었다. 식물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의 나열이기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적어 내려간 감상이 담겨 있어 꼭 체험학습에서 재미있게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학생이 된 기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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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기다리다 겨울눈을 그렸습니다. 꽃을 기다리다 새 잎이 나는 것을 그렸습니다. 꽃을 기다리다, 꽃봉오리 맺히는 모양도 지켜보고 그 꽃에 날아오는 새와 곤충들도 만났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자연의 변화를 쫓아다니다가 결국 꽃을 보게 된 것일지도.

 

 
책의 저자, 황경택 작가는 만화가이자 숲 연구가, 생태 놀이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꽃과 나무, 곤충 등 생명이 깃든 곳에 관심이 많아 항상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관찰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저자는 “꽃을 기다리다”에 우리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는 식물들의 한 살이를 그렸으며 식물들이 살아가기 위해 거치는 모든 끈질긴 과정을 알아야 꽃의 진짜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꽃은 식물의 생애에서 한 단계일 뿐, 그것이 생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 기록된 글과 그림은 저자가 2년간 집중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일반적으로 계절의 시작과 만물이 깨어나는 순간은 봄으로 두지만, 저자는 식물과 꽃에 대한 이야기를 겨울의 모습에서부터 풀어간다. 씨앗은 조용히 땅속에서 머물다가 봄이 와야 싹을 틔우지만, 나무는 그 시작을 줄기에서 이어간다.

그래서 가지 끝에 생장점을 만들었고, 그를 우리는 겨울눈이라고 부른다. 잎과 줄기와 꽃이 나오는, 나무에 따라 제각각의 모습을 가진 겨울눈에 대한 스케치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전에는 황량하게 여겼던 겨울나무를 올해부터는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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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계절”이라고 하면 대부분 자연스레 봄을 떠올리지만, 꽃은 본래 사계절 내내 피어나고 제주와 같이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는 겨울에도 꽃이 핀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겨울에 피어나는 꽃 중 하나인 동백을 시작으로 나무 꽃과 여름, 가을의 꽃들까지, 저자는 각 꽃이 피어나기 전, 피어난 후의 모습을 스케치로 책에 담는다.

꽃의 외향에 대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벌 또는 다른 곤충과 꽃의 상생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간결한 문체로 담백하게 적어간 설명을 읽고 있자면 내게 익숙했던, 또 익숙하지 않았던 것들의 생을 자연히 머릿속에서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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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풀이 사람에게 이름을 얻은 풀보다 더 많지 않을까. 이름 없는 풀을 사람들은 주로 잡초라고 묶어서 표현한다. 쓸모없다고 여겨지거나 상대적으로 꽃이나 나무보다 주목받지 못하지만 이런 풀들을 함부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풀꽃, 우리말로는 방석 식물이라고 하는 로제트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스케치와 함께 책에 담아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뻗어 나가는 뿌리의 존재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책 속에 담긴 식물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와 그 모습은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잘 드러나지 않음을, 그렇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종종 떠올려 보아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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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비해 풀들이 조금 더 빨리 꽃을 피우고 씨앗도 빨리 만들어 세상에 내보낸다. 저마다 인생 시간표가 다르다.”

     

“뿌리 한 올 한 올에도 저마다 사연이 있을 텐데 그림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 시간이 흐르며 더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격언이다. 그 말처럼, 알았다면 또 다르게 바라보았을 수 있던,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었을 순간들을 떠올린다. 저자의 식물에 대한 애정과 그로 인한 공부를 통해 쌓은 지식과 스케치로 새로이 모습을 남기게 된 식물들을 살펴보니 모르기에 마음 쓰지 않고 지나쳤던, 잠시 눈길을 주다가도 다시 고개를 돌리고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식물에 대한 새로운 견문을 넓힌 것과 더불어, 책에 저자가 서술한 자연 스케치법에 관한 부분은 내가 미술을, 스케치를 시도해보게끔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 가족 중에 그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내게 미술은 너무나도 머나먼, 다시 태어나도 얻기 힘든 재능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식물을 잘 그리려면 많이 관찰하고, 많이 시도해보는 것이 답이라는 저자의 말에 스스로 마음에 쌓았던 한계의 벽을 조금 허문 듯하다.
 
저자의 관찰과 기록을 통해 이전에는 돌아보지 못했던 생명이 뻗어 나가는 삶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발을 디딘 기분이다. 어제보다 더 섬세한 관찰자가 될 수 있기를 그렇게 내 인생에 자리하는 수많은 생명의 삶에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그런 내 모습을 기대하며 올봄을 보내본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식물들은 추운 겨울에도 씨앗에 에너지를 끌어 모으고, 싹을 틔우고, 땅속 깊숙이 모세혈관 같은 뿌리를 뻗어 내리고, 그 뿌리로 물과 양분을 모아 새잎과 줄기를 만들고, 찾아오는 천적들을 막기 위해 갖가지 작전을 펴가며 안간힘을 쓴다. 저 혼자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들이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과정의 치열함을 알아야 꽃의 진짜 아름다움을 보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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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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