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현대 역사 속, 발버둥 치며 살아갔던 흔한 여성들의 이야기 - 티끌 같은 나 [도서]

<티끌 같은 나> 리뷰
글 입력 2020.04.2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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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러시아 현대 여성의 야망과 사랑

 

《티끌 같은 나》는 현존하는 러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꼽히는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중단편 선집이다. 표제작 <티끌 같은 나>부터 <이유> <첫 번째 시도> <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어느 한가한 저녁>까지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섯 편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미래를 꿈꾸는 평범한 여성이 주인공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러시아 고전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며 현실적 야망과 사랑을 쫓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티끌같은나_표지+띠지_앞_도서출판잔.jpg

 


나는 역사를 좋아하고,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생소한 국가다. 황량한 겨울 벌판의 이미지 때문인지, 은근한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러시아 문학에 관심을 가졌을 리가 없다. 그나마 접해본 것을 고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러시아 문학의 거장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정도뿐이다.

 

작가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1937년생이다. 다른 나라와 만만찮게 피로 물들었던 러시아 역사의 격변기를 살아온 인물인 셈이다. 그 때문인지 표제작 ‘티끌 같은 나’를 포함한 ‘이유’, ‘첫 번째 시도’에는 러시아의 현대 역사가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가장 짧은 분량의 ‘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와 ‘어느 한가한 저녁’은 직접적으로 역사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기저에 깔린 사회문화적 분위기는 무시할 수 없다.

 

모든 작품에는 한 명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둘러싼 수많은 다른 인물들이 있고, 그들은 주인공을 그저 스쳐지나가기도, 오래도록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들에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면 모두는 다사다난했던 사회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설의 ‘주인공’ 이미지와는 달리 각 작품 속 여성 주인공들은 딱히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안젤라처럼 불륜을 저지르거나 마리나처럼 서슴없이 민폐를 끼치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하고, 그들은 그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임에도 그들에게 별로 정이 가지는 않았다.

 

다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그렇게 ‘부도덕’하다고 여겨지는 행위 또한 당시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택할 수밖에 없었던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일자리에서 쫓겨난 시골 출신 가수 지망생 안젤라가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돈이었고, 마침 그녀의 눈앞에 부호 니콜라이가 나타난다. 자식에게 버려지고 빈털터리가 되어 갈 곳이 없어진 마리나가 손녀를 데려오기 위해 취할 수 있었던 방법은 집주인 안나의 집에 기생하는 것밖에 없었다. 애정에 목말랐던 마라 또한 다르지 않았다.


 

티끌같은나_카드뉴스_5.jpg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행위를 옹호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비판의 잣대를 들이밀고 싶다. 그러나 러시아라는 국가를 잘 알지 못하지만 당시의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그 속의 여성이 살아남는 동시에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던 상황의 불가피성을 고려하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어찌 됐든 나는 그러한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언제든 또 낳을 수 있어요.”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이를 낳기 전에 먼저 나 스스로 다시 태어나야 해요.” p.104


 

니콜라이의 아이를 임신한 안젤라는 아이를 낳으면 평생 니콜라이에게 돈을 받을 수 있는, 즉 아이를 ‘연금’처럼 취급한 키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원한 것은 가수라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지, 안락한 삶이나 사치스러운 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꿈을 이루는 과정 속, 시골 여성 출신 안젤라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아무리 티끌을 모아도 불가능한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 필요했을 뿐이다.

 


“스탈린 때가 나았어요.” 마리나가 결론을 내렸다.

“스탈린 때는 강제수용소가 있었어요.” 안나는 마리나가 잊은 부분을 상기시켰다.

“난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거기에 수용되지 않았으니까요.” p.287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도 채우기 힘들 만큼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자신을 통제하는 거대권력은 어느덧 남의 일이 되고 만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 나 또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생존에만 급급해지고, 결국 똑같은 개인에게 의존하거나 폐를 끼치는 것이다. 어쩌면 마리나는 역사의 흔한 희생양 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

 

*

 

모든 이야기의 서술은 대체적으로 담백하며, 인물의 내면보다는 행동 묘사에 치우쳐 있다. 또한 완전한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인물을 관찰하기에-‘첫 번째 시도’는 라리사의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전지적 작가시점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인물에게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소설 속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결국 개인의 취향과 경험에 따라 갈릴 것이다. 나는 전반적으로 불호(不好)에 가까웠지만 다른 누군가는 완전한 호(好)일 수도 있다. 모든 사회역사적 맥락을 차치하고서라도 인물에 대한 호감은 정서적 교감으로부터 비롯될 테니 말이다.

 

 



 

티끌 같은 나

(One of many)

 

지은이: 빅토리아 토카레바

옮긴이: 승주연

출판사: 도서출판 잔

발행일: 2020년 3월 30일

판형: 130×195(mm) / 페이퍼백

페이지: 432쪽

정가: 14,500원

ISBN: 979-11-90234-05-4 03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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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혜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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