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나만 보고 달리는 주인공들 - 도서 '티끌 같은 나'

글 입력 2020.04.21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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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은 거의 접해본 기억이 없다. 주변에서 얻은 인상만 있다. 우울하고, 차가우면서 유쾌할 것 같은 느낌. 전자의 느낌은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음악으로 생겼다. 그의 주위엔 죽음과 배신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그가 만든 음악에 우울의 정서가 담긴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마지막 인상은 친구의 여행 후기에서 비롯되었다.


친구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러했다. '장벽처럼 커다랗고 하얀 사람들이 정말 無표정한 얼굴로 다닌다.' 한국의 무표정은 비교도 안 된다며. 그러면서도 묘하게 정감이 갔다. 찌그러진 차 범퍼를 수리하지 않고 청테이프로 대강 붙여서 그냥저냥 산다니. 그 무표정한 사람들이 청테이프를 찍찍 붙인 차의 주인이라니. 물론 모두가 그러하지 않겠지만, 지독한 실용주의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어떤 이야기를, 어떤 관점에서 들려줄지.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 작가 빅토리아 토카레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193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 음악학교에서 피아노 교사로 일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63년 단편 <거짓 없는 하루>를 발표했다. 주로 대도시 여성의 심리, 일과 사생활, 여성의 꿈과 연약함을 이야기하는데, 수많은 단편과 시나리오가 영화로 제작되면서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존경징표훈장, 칸영화제 공로상을 받은 그는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라는 호칭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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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본 러시아 문학의 특징


 

한국이나 일본, 영미 문학보다 러시아 문학을 즐기는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적으리라 본다. 독서를 즐기는 편에 속하는 나 또한 그렇다. 그래서인지 다섯 가지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했다. 아주 대단한 것은 아니고, 작가의 독특한 특징은 아닐 수도 있는, 그런 발견.


첫째, 보드카가 자주 나온다. 한국 문학에서는 소주나 맥주가, 유럽권에서는 와인이 나오듯 러시아 문학에는 보드카가 자주 나온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보드카 한 잔은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는 우스갯소리가 정말인 것처럼. 그래서일까. 알코올중독인 캐릭터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두 번째, 속담이나 인용이 많다. 언젠가 넷플릭스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 러시아인 캐릭터가 '러시아는 속담을 아주 많이 쓴다'고 했던 장면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러시아 음악이나 문학 등이 자연스럽게 언급되었다. 옮긴 이의 각주가 아니었다면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겠다.

 

세 번째, 이동이 잦다. 이 점은 작가의 특징이라고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 여성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출발하고, 그 여성은 무언가를 열망하기에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때로 누군가에게 쫓겨나기도, 누군가를 쫓아내기도, 찾아가기도, 무시당하기도 하면서. 그만큼 만나는 사람도 많다.

 

네 번째, 전개가 아주 빠르다. 책이 지루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하나의 목표를 가진 주인공이 저돌적으로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역경을 겪는다. 특히 어렵게 모아둔 돈을 허무하게 날린 장면이 많다. 그러나 작가는 그 뼈아픈 상황을 강조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었다.' 정도의 언급을 한 후, 다음 이야기를 꺼낸다. 주인공도 덤덤하다. 책을 읽던 내가 가장 안타까워한다. 그 시점에서 주인공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

 

책에 담긴 다섯 개의 중단편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유'와 책 제목이기도 한 '티끌 같은 나'였다. 두 소설은 비슷한 캐릭터들이 있었다. 알코올 중독 상태로 그냥저냥 살아가는 '이유'의 류트카와 껍데기밖에 없던 '티끌 같은 나'의 레나. 두 사람의 남편은 그들이 가진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 그러니까 동정심에 그들을 놓지 못했다. 이제 두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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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유'


 

먼저 '이유'. 앞에 언급한 대로 러시아 문학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등장한다. 그중 주인공 마리나와 연이 닿았던 안나라는 캐릭터가 좋았다. 마리나는 강하다. 혼란스러운 시국에도 절대 주저앉지 않으며 어떻게든 살길을 마련한다. 제 몫은 물론 손녀 알랴까지 먹여 살리며. 워낙 마리나의 집념과 생활력이 뛰어나서 그에게 딸린 자식들이 다 짐처럼 보였다. 더 나은 곳에서 더 큰 꿈을 이루며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누군가를 보살피느라 할 수 있는 것의 일부,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했으니 말이다. 마리나는 알랴가 있었기에 자신이 열심히 살 수 있었다고 했지만, 그 말에 의심이 먼저 들었다. 현재 생활에 만족해 보려는 자기합리화는 아닐까, 하고.


안나와는 벤치에서 처음 만나 함께 집까지 살게 되었다. 물론 마리나 집은 아니고, 안나의 집. 안나는 유산 덕분에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도 껍데기 생활이다. 자신의 가족 누구도 안나를 반기지 않는다. 가족들이 드물게 놀러 올 때 안나는 기쁜 마음에 조잘조잘 떠들지만, 돌아오는 것은 시끄럽다는 반응뿐. 서러울 만큼 차가운 대답이다. 이런 안나에게 마리나는 따스하고 맛있는 밥,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마냥 행복하지 못하다. 마리나는 꽤 무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리나의 무례함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남 눈치 보며 부탁을 할까 말까 했다가는 살아남기조차 어려운 환경에 있던 사람이다. 어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잠시나마 안전한 둥지를 찾으면, 자신을 위해 그다음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손녀, 알랴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다만 마리나는 다른 사람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통보를 내린다는 점이 문제였다. 심지어 알랴는 집 주인 안나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안나는 당장에라도 그 둘을 내쫓을 수 있다.


그러나 안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 알랴와 마리나가 살기 위해 무례를 저지르는 것, 가족들이 냉담하게 구는 것, 마리나와 연인 관계였던 루스탐이마리나에 대한 이야기는커녕 안나에게 자신의 아이를 살려달라며 애걸복걸한 것까지. 그런데 누구도 안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안나는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타인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타인과 관계를 맺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주변에 썩은 동아줄 같은 인연밖에 없다면, 함부로 놓을 수 없다. 안나의 생존 법칙은 이해였다.




두 번째, '티끌 같은 나'


 

이번에는 '티끌 같은 나'이다. 사실 이 소설을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주인공 안젤라가 현실 속 인물 같다. 안젤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 사는 10대 후반의 어린애다.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 하나로 무작정 모스크바에 간다. 운 좋게도 키라의 도움으로 먹고살 공간은 물론 작곡가 소개까지 받았다. 그런데 웬걸, 돈이 필요하단다. 그것도 아주 많이. 노래는 립싱크로 때우면 되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가수한테 노래가 중요하지 않다니. 안젤라는 당신 같은 작곡가는 필요 없다고 뛰쳐나왔다. 현실의 장벽에 충격을 받고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차근차근히 모았다. 하지만 턱도 없다. 티끌은 모아도 태산이 아니라 티끌이었다.


이런 안젤라에게 거액의 돈이 생겼다. 늙고 돈 많은 부자 니콜라이 덕에. 그러나 안젤라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 척했을 뿐.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도주를 하고,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인생이 계획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젤라는 곧 돈을 몽땅 잃게 된다. 그런데도 안젤라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작곡가에게 다시 가서 그와 대화한다. 작곡가는 전과 다른 눈빛을 가진 안젤라를 마음에 들어 한다. 그러니까, 프로듀서로서 그의 능력에 투자하고자 한다. 안젤라는 자신이 태어난 그 동네가 사람들이 들끓는 곳으로 개발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이야기는 끝난다.


처음에 끝을 보았을 땐, 기쁨이 컸다. 갖은 고생을 하며 홀로 선 안젤라가 대견해서. 하지만 곧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안젤라는 과연 열정과 악이 가득할 그 동네에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며 행복할까. 그 길을 위해 자신이 걸어야 했던 일련의 과정들이 괴롭지는 않을까. 안젤라의 열정과 열의가 니콜라이가 가진 부 富라는 거대 자본 앞에서 무너졌다. 그렇게 자신을 돕던 니콜라이도 '남에게 노래를 파는 일'이라며 안젤라의 꿈을 무시했다. 순수한 애정으로 포장해봤자 니콜라이의 속내는 '내 것'을 타인에게 빼앗기기 싫다는 유약한 소유욕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능력을 상품 일부라고 취급하며,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평가해댈 입들을 상상하니 끔찍했다.


*


책에 담긴 다섯 가지 이야기는 한 개인의 꿈을 다룬다. 그의 바람, 열망, 노력을. 우리가 생존 때문에 잊고 살든 혹은 일부러 잊으려고 애쓰던 것들을 생존도 버거운 이들이 이루고자 한다. 물론 주인공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쉽게-예를 들자면, 인맥으로- 어려운 과정을 뚫고 지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노력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 꿈을 현실로 만드는 의지, 이건 어느 시대의 인간이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 아닐까.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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