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을 살아가는 힘은 다름 아닌 사랑 [도서]

글 입력 2020.04.1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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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해서 읽어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있다. 그런 책들은 굉장히 자주 누군가의 ‘인생책’이라는 수식어로 언급된다. 내겐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그랬다. 제목에 ‘생’이 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삶을 살면서 꼭 한 번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외국 문학은 인물의 이름이나 배경이 낯설기 때문에 적응할 시간이 조금 필요한데, 『자기 앞의 생』은 그렇지 않았다. 모모라는 어린 소년이 이야기의 화자인데, 주요 인물은 그와 로자 아줌마였기 때문에 이름도 간단하고 어린아이의 입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이해가 어렵지 않았다. 책은 어린아이와 가난을 그리고 있기에 어렸을 적 읽었던 『아홉 살 인생』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눈에서 가난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게 비슷한 느낌이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인물과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젊었을 때 매춘부였던 로자 아줌마가 매춘부들의 아이를 키우는데, 그중에 한 명이 10살 남짓한 모모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매춘부가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삶은 항상 감추고 속이고 쫓기는 삶이다. 이들의 삶은 화려한 중심거리가 아닌 어두운 골목길의 어디쯤에 있다.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책은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초반부의 묘사엔 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힘들게 말썽을 피우고, 로자 아줌마가 모모에게 정신병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도 가끔 가족이 미울 때가 있지 않은가.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가족이다. 가끔 미워질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랑으로 묶여있는 증오가 사랑보다 더 큰 애증의 관계.
 
로자 아줌마와 모모는 누구보다 서로에게 의지한다. 로자 아줌마가 점점 병에 들어 아파갈 때,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병원에 보내지 않으려 하고 끝까지 곁을 지켰으며, 로자 아줌마는 모모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그를 보내지 않으려 했다. 둘은 가족 같은 사랑으로 이어져있다.
 
책의 초반부에 모모는 존경하는 할아버지인 하밀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그에게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자 모모가 또 묻는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렇단다.”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뜻인가? 하지만 읽어갈수록 그렇지 않았다. 모모는 사랑을 필요로 했고, 사람에겐 사랑이 절실해 보였다.
 
책의 후반부에 모모는 할아버지에게 또 묻는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노망난 할아버지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모모는 이렇게 말한다. “하밀 할아버지, 제 말을 못 들으셨나 봐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 대답대로 책의 마지막 문장 또한, “사랑해야 한다.”이다. 책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초반부에 할아버지의 대답은 무슨 의미였을까?
 
사실 모모에게 대답을 들려준 후 다른 두 시간대 할아버지의 얼굴은 너무나도 다르다.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고 묘사되고,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할아버지는 ‘얼굴이 속에서부터 환하게 밝아졌다’고 묘사된다. 작가는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추구하는 바를 넌지시 암시한 것일까? 아니면 하밀 할아버지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모모를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일까? 마지막 문장에서까지 사랑의 필요를 강조했고, 사랑의 필요에 공감하기에, 초반부의 문장에 대한 의문은 계속 남는다.
 
 

종교를 넘어서는 인류애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종교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이들의 종교는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모모는 아랍인이고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로자 아줌마가 2차 세계대전을 살았던 유태인으로서 아우슈비츠의 공포를 겪고 그때를 떠올리기도 두려워하는 인물로 설정된 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 종교가 다르고, 프랑스 주류 사회에서 벗어난 인물들이지만 서로 의지를 하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종교 간 화해를 암시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또 하나의 사건은 모모의 아버지라 주장하는 남자가 14년 만에 로자 아줌마를 찾아와서는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모모가 아랍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 컸다는 거짓 소식을 듣고는 과하게 부정하고 결국 죽음을 맞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종교에 집착하는 남자의 반응을 과장되게 그리면서 그의 아집을 비꼬는 것 같았다. 이런 그와 비교되는 인물들이 바로 종교에 상관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로자 아줌마와 모모일 것이다.
 
배경은 프랑스이지만 프랑스 사회에서 아랍인과 유태인은 주류가 아니었다. 이외에도 주변의 이웃들은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웃의 매춘부 롤라 아줌마, 로자 아줌마의 병을 고쳐주려고 아프리카 종교의식을 펼치는 왈룸바 일행, 그 외의 외국인 노동자들.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지만 서로서로 도우며 산다.
 
모모가 존경하는 하밀 할아버지는 늘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는다. 레 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자기 앞의 생』의 인물들은 레 미제라블이지만, 모모가 언젠가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쓸 거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인류애적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 몫의 삶


『자기 앞의 생』의 원래 제목은 '여생'이었다고 한다. 여생, 그러니까 ‘남은 생애’. 로자 아줌마의 투병 생활을 생각하면 ‘여생’만큼 어울리는 제목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제목인 『자기 앞의 생』이 더 마음에 든다. 우선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을 너무 오래 들어와서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혀버린 것도 크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앞의 생’이라는 단어는 책에서 그려진 모든 인물, 인물 각자의 앞에 놓인 각자의 삶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삶’에 대한 생각을 내내 했다. 삶을 포기하는 안락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장면들도 계속 있었다. 삶은 우리를 탄생시켰지만 모모의 말마따나 우리를 파괴시키기도 한다. 모순적인 삶 속에서 우리가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아마 사랑 덕분일 것이다. 비록 사랑을 주고받는 상대가 떠난다 해도, 인연이 다한다 해도 함께 보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했던 시간은 모모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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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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