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봄에의 믿음 [도서]

글 입력 2020.04.07 00:2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봄에의 믿음


 

웬만하면 집밖에 나가지 않고, 친밀한 사람과의 접촉도 꺼리게 되는 '코로나 시대'. 길어지는 자가격리와 답답한 마스크 덕에 기분은 갈수록 우중충해지는데 거리의 나무들은 내 속도 모르고 온몸으로 봄을 알린다.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 무수한 나뭇가지들을 오롯이 관찰할 수 있는 겨울을 지나, 싹이 돋고 꽃이 만개하는 봄. 방 안에서도 봄의 정취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소설 『나목』을 소개한다.

 

 

893380174x_1.jpg

 


소설 『나목』은 박완서 작가의 등단작이다. 박수근 화백과의 실제 경험을 담은 작품으로 부각되는 면이 있지만, 내게는 작가의 자아가 깊이 투영된 인물 '이경'의 생존기로 읽힌다. 『나목』은 전쟁 직후 서울을 가감 없이 묘사함과 동시에 상처를 품은 채 꿈꾸기를 주저 않는 주인공 이경의 발자국을 쫓는 소설이다.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는 1950년의 서울, 옥희도는 텅 빈 눈으로 쇼윈도 안 돌아가는 침팬지 인형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옆에는 그를 갈망하는 이경이 우두커니 서있다. 세일즈걸들은 당장의 허기를 달래줄 누군가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태수는 단란한 가정을 꿈꾸며 오지 않는 이경을 기다린다. 저마다의 욕망이 피어나는 회색빛 명동 거리에서 얼마간 벗어나면 으스러진 고가가 나오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그저 가만히, 존재한다.


형제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죄책감과, 온몸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어머니를 향한 애증과, 난데없이 찾아온 새로운 이를 향한 호기심 섞인 사랑과, 여전한 꿈 사이에서 이경은 처절히 빛난다. 마음껏 죽고 싶어 하고 간절히 살고 싶어 하는, 열렬히 사랑하고 증오하는 이경의 모습은 전쟁이 가져온 파국과 그럼에도 불구한 삶의 희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경의 어머니는 상실이 가져온 무기력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어머니를 둘러싼 부연 회색빛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옆에서 사랑을 갈구한 적 있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느낄 수 있는 색조다.


그렇기에 나는 옥희도를 향한 이경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이경은 다만 넘치는 욕망을 풀 곳이 필요했고 옥희도처럼 어쩐지 다른 사람과 다를 것만 같은 사람에게 외로운 마음을 기댄 것이다. 마음이 약해진 사람은 곧잘 의지할 곳이 필요하니까.


내게 옥희도는 조금 우습게 다가왔지만 그가 이경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꽤 기억에 남는다. "자유롭게 용감한 고아가 되렴." 경아는 자유롭고 용감한 고아가 되었어야 했다. 처참한 과거를 마음 깊이 간직한 채, 위태로이 앞으로 나아가는.

끊임없이 생동하는 이경의 모습은 그럼에도 저버릴 수 없는 삶의 희망 같은, 허황되게 여겨졌던 것들을 믿게 한다. 아직 삶이 주는 파편을 정의하는 데에 조심스럽지만 『나목』을 읽을 때면 조금은 간단해진다. ‘나목’은 이경과 그에게 마음을 맡긴 수많은 이름들을 상징하는 단어일 것이다.


죽어가는 고목이 아닌, 봄에의 믿음을 품은 한 다발의 나목(裸木).

 


 

곽성하.jpg

 




[곽성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24763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