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평양냉면을 맛있게 먹고서 지구를 지키자 [사람]

원래 좀 더 착한 사람이 조금 더 애쓰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어요
글 입력 2020.03.3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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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뒤에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알게 되는 것이라기 보다, 스스로 의미를 찾게 된 걸 수도 있겠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를 찾게 되는 이유야 그 때 그때 다르지만 의미를 찾게 된 후에는 이전과는 다른 여러 변화들이 따른다는 사실은 매한가지다.

 

지난 가을, 지금까지도 첫 번째로 꼽는 나의 인생작 <멜로가 체질>은 그렇게 올 봄의 내게 다시 왔다. 자칭 ‘수다 블록 버스터’ 멜로가 체질은 공감가면서도 말맛을 살린, 주인공들의 수다가 블록버스터급인 드라마다. 얼마나 재밌었는지, 그 드라마를 볼 당시의 난 이런 소감까지 남겨놓았다.

 


<멜로가 체질>. 누가 봐도 뻔한 로코물이 아니겠는가 싶지만, 사실은 ‘본격 수다 블록버스터’였다. 대사도 캐릭터도 장난 아니다. 그 중에 주인공인 진주(천우희)의 독백과 대사들이 정말 주옥같다. 아마 이런 친구 하나 있으면 내 술자리에는 무조건 필참시키고 싶을 정도로, 자칫 쓸모 없는 생각을 쓸모 있는 명언으로 만드는 데에 뭐가 있다.

 

사랑을 하고 싸우고 이별하고, 어느 드라마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장면들인데, 아무도 담아내지 못했던 부연 설명이 더해졌다. 내 눈 앞에 싸우는 두 남녀 주인공만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연과 생각, 감정, 가치관.. 우리 스스로도 쉽게 말로 정리 못했던 모든 것들이 드라마 속 캐릭터들에, 스토리에 녹여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이 드라마는 내게 재미 그 이상으로 사는 재미까지 느끼게 해주었던 작품이 되었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주인공들의 삶이 결국 남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사람’이 담긴 우리 이야기라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살맛이 났달까.

 

그렇게 5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 멜로가 체질을 꺼내 든 계기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정주행도, 혹은 급 봄바람에 진주와 범수 두 주인공처럼 ‘멜로가 체질’을 가지게 되어서도 아니었다.

 

 

 

#1 평양냉면을 먹다가



점심 메뉴를 고민 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슬며시 봄이 왔고, 나는 겨울에 먹던 깊고 진한 음식 말고 조금은 삼삼하고 깔끔한 것이 당겼다. 입가심으로는 물 한모금이면 될 법한 메뉴가 무엇이 있을까. 마침 회사 근처에 평양냉면집이 있었고, 또 그 곳이 <멜로가 체질>의 진주와 범수가 ‘삼삼한’ 평양냉면, 그리고 서로에게 끌리게 된 그 장소였던 것은 신기한 우연이었다.

 

올해 들어 가장 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하며 나누었던 이야기는 또 한번 신기하게도 ‘사람’이야기였다. 수다의 참여자는 이제 막 3주차 인턴생활을 하고 있는 나와 십 수년째에 접어든 직장생활을 하고 계신 나의 멘토(이자 선배)님. 최근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로 인해, 또 개인적인 사건들로 인해, 사람으로서 사람이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된 생활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처해진 상황은 서로 다르나 결국 수다의 끝자락은 “세상 좀 사람 답게 살아가보려는 사람들을 되려 의욕 잃게 만드는 세상 아니냐” 였고, 삼삼한 평양냉면을 잘 먹고선 씁쓸했던 것도 아마 그 수다에서 더 이상의 ‘살 맛’이 나질 않아서였을까, 유독 그 날의 대화를 쉬이 넘기지 못하였다.

 

 

 

#2 그 이야기 사실은


 

일요일마다 하는 모임이 있다. 모임의 목적은 ‘스터디’. 일면식도 없던 이들이 한 데 모여 비슷한 처지와 목표를 공유하고 함께하는 모임이다. 저녁즈음에 스터디를 끝내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중에, 메뉴 추천과는 별개로 마침 지난 날 평양냉면을 먹은 일이 생각났다.

 

“혹시 평양냉면 먹어보셨어요?”

 

평양냉면으로 시작하게 된 이 날의 수다는 확실히 멜로가 체질에 나온 그 집이 맛집이라는 후기와 함께 신기하게도 멜로가 체질로 이어졌는데, 수다 참여자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저는 그 드라마 보고 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드라마 우리 착하게 살자는 이야기거든요.”

 


범수 :

원래 세상은 조금 더 착한 사람들이 조금 더 애쓰고 살 수 밖에 없어요. 그게 막 엄청난 손해 같지만 나쁜 사람들한테 세상을 넘겨줄 순 없잖아. 그런 의미에서 우린 지구를 지키고 있는거야.

 

진주 :

어벤저스가 지구를 지키는 줄 알았는데..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마지막 화. 드라마 피디와 작가인 두 주인공이 그리던 결과와는 다른 결과를 마주하였을 때, 대박은 커녕 1%에 악플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받아들이며 나누던 대화다. 항상 시청률 고공행진을 달리던 스타PD 손범수도, 보조작가에서 야심차게 첫 데뷔작을 내놓은 임진주도, 어찌 손 쓰지 못한 시청률과 악플. 물론 둘 다 속상했겠지만, 좋은 사람 두 사람이서 서로를 다독이는 뒷 모습이 참 보기 좋았던 장면이다.

 

*

 

‘착한 사람이 손해보고 산다’ 까지는 나도 잘 아는데, 그 손해보는 착한 사람이 결국 지구를 구하는 사람이라는 범수. 그렇게 지구도 지키고, 서로를 지키는 일이 착하게 사는 것이라는 걸, 그러니까 우리는 지구도 서로도 함께 지키고 있는 거라고.

 

멜로가 체질은 알고 봤더니 사람, 그 중에서도 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다독여주는 드라마였다. 호구가 아니라, 지구를 지키는 용사들을 위한 이야기였다. 잃었던 의욕도 입맛도 다시 살았다. 살 맛이 났다. 평양냉면도 다시 먹을 맛이 날 것 같았다. 맛있게 먹고선 뭐든 잘 지켜내야겠다.

 

 



[권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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