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시국에 공부하는 오타쿠론 Part 3 - 오타쿠와 에반게리온 [문화 전반]

에반게리온의 엔딩에 대해
글 입력 2020.03.2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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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와 에반게리온


 

지금까지 아즈마 히로키의 책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통해서 오타쿠계 문화의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살폈다. Part 1 에서는 포스트모던과 일본의 전후 배경을 통해서 오타쿠들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 알아봤다.  (참고 - 이 시국에 공부하는 오타쿠론 Part 1)

 


“오타쿠들이 취미공동체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허구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들이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여서가 아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주체성이나 가치규범이 무너진 상태에서 오히려 인간관계와 유효한 전략으로써 오타구 문화에 빠져들기를 택하는 것이다. 사회적 현실을 택하지 않는게 오히려 사회적으로 현실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Part 2에서는 오타쿠계 문화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데이터베이스 소비 경향을 이야기 소비론과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을 통해서 살펴봤다. (참고 - 이 시국에 공부하는 오타쿠론 Part 2)

 


“이제 이 구조에서는 '시뮬라크르가 깃드는 표층과 설정이라는 데이터베이스가 깃드는 심층'이 명확히 구분된다. 즉 원작도 사람들이 향유하는 데이터베이스에 정리되어 있는 데이터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설정에 불과하며, 그 데이터베이스 아래에서 얼마든지 2차 창작이 만들어지거나 향유될 수 있으므로 사실상 시뮬라크르와 원작의 경계는 불분명해져가는 것이다. 작품은 더 이상 개별적으로 평가되지 않고, 그 뒤에 있는 데이터베이스에 따라 측정된다.“


 

Part 3에서는 지난 논의를 기반으로 <에반게리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에반게리온은 1995년 10월 4일에 방영을 시작해,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혐한 논란이나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인해 많은 팬들이 보이콧 운동을 펼치기도 했었다.


여러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에반게리온>은 한 번쯤 살피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작품임은 분명해보인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TV판의 엔딩을 중점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에반게리온, 그 모호한 엔딩



창작은 의도를 가진다. 어떤 선택을 했을 때는 반드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어떤 의도에 기반하고,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뒀는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창작자는 서사나 메시지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실험적인 형식을 선택하기도 한다. <에반게리온>의 경우도 그렇다. <에반게리온 TV판>은 총 26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엔딩부분인 25, 26편에서는 기존에 진행되던 서사가 갑자기 멈추고, 인물의 내면을 펼쳐보며 해부하는 방식으로 작품의 엔딩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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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 또 수정.jpg

 


이 엔딩은 에반게리온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주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팬들에게 일명 ‘축하해 엔딩’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면은 다소 당혹스럽다. <에반게리온>은 왜 이런 형식의 엔딩을 선택했을까?


에반게리온에서는 ‘인류보완계획’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지는 다음과 같은데 우리의 '상실한 마음', 인간으로써 가지는 근원적 외로움으로 요약되는 존재론적인 한계를 보완한다는 것이다. 서사에서의 그 방식은 모두의 마음을 강제로 하나로 만들어 서로를 메꿔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서사적 보충은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확인할 수 있다.)

 

TV판의 내면을 묘사하는 엔딩이 보여주는 것은 주인공 신지와 인물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다. 세상 속에서 나의 위치를 찾는 과정으로 내가 있고 싶고 있어도 되는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가는 것이다. 또한 남을 기쁘게 하는 일(신지의 경우 에바를 타는 일)을 통해 행위로써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로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끊임없는 자기 질문을 통해 배워나간다. 누구나 겪는 사춘기 소년의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내면묘사가 시작되기 전인 24화를 참고하면 주인공 신지는 카오루에게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민하다 결국 몸을 터뜨려버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지는 깊은 트라우마를 겪고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 내면에서 ‘나’를 발견해내는 엔딩이 당황스럽다고 보는 이유는 서사적 측면에서 ‘인류보완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하는 일반적인 엔딩 장면이 TV판에 미리 등장했다면, 에반게리온을 내면의 묘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방법으로 마무리했다면 어땠을까. 신지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인류보완계획이 아닌 종말적인 상상력의 인류보완계획이 엔딩이 진행됐다면 사람들은 에반게리온을 단순한 종말의 이야기로 기억하게 되었을까? 안노 히데야키는 그 때문에 의도했던 메세지를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설명하듯 이야기를 풀어놓은 걸까.


그렇다면 26화로 계획되어 있던 TV판에서 24화 까지 달려왔는데도 그 주제의식을 제대로 남아내지 못한것같아 불안했던 창작자가 급하게 내용을 수정한 것일까. 볼수록 묘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창작하기 전 임상우울증으로 고통받았던 감독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엔딩의 평가에 대해서는 작품을 향유하는 각자에게 맡긴다.


 

에반게리온 배경 수정.jpg

 

 

이 글에서 주목하고싶은 지점은 적어도 <에반게리온>이 큰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오타쿠계 문화의 특징인 ‘데이터적 소비’와 연관지어 읽어내면 보다 설득력 있게 해석할 수 있다.


에반게리온의 모호한 엔딩에 대해 일부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었지만, 결국 에반게리온의 향유 형태는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큰 이야기가 아니라,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향유층에게는 이야기 차원에서 약간 모호하고 불분명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부분은 아즈마 히로키의 책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TV시리즈 마지막 회에 전혀 다른 성격의 아야나미 레이가 사는 전혀 다른 역사의 에반게리온 세계가 삽입되는데 이것을 오리지널이 시뮬라크르를 미리 시뮬레이트하는 왜곡된 관계가 있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에반게리온의 2차 창작으로 등장할 법한 이야기가 이미 본편에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리지널의 권위가 사라지고 시뮬라크르와의 경계가 희미해져가는 현상 아래에서 TV판 원작은 인류보완계획을 신지의 마음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하나의 버전‘에 불과하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주는 종말적인 상상력도, TV판의 전혀 다른 세계도 하나의 버전에 불과하다. 데이터베이스적으로 소비하는 가운데 이러한 순서나 우열은 의미없는 것이 되고만다.


오히려 TV판이 일반적인 형태의 엔딩으로 마치지 않고 내면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사람들에게 ’다른 버전의 이야기(일반적으로 등장했어야 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에서의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보다 효과적으로 자아냈을 것이다. <에반게리온>의 흥행 요인 중 하나는 독특한 방식의 형식과 독특한 향유방식이 결합된 결과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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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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