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결국은 사랑이 한다 - '샤갈'의 그림 이야기 [시각예술]

글 입력 2020.03.2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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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가렐 감독의 영화 〈질투〉는 예술의 유구한 주제, ‘사랑’을 탐구한다. 연극배우 루이는 역시 배우인 클로디아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어린 딸을 뒤로하고 집을 나간다. “영원히 사랑해”, “난 나 자신을 알아” 등등, 극중 루이의 대사는 대체로 못 미더운 것 투성이다. 절대 불가능까지는 아니어도 그는 인간이 좀처럼 도달할 수 없거나 유지하기 힘든 경지를 확신한다. ‘나 자신’도 ‘사랑’도 모두 완성형이 아니라 흐르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기에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에 빠진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루이 역시 간과한다.


이 굳은 사랑의 맹세가 얼마나 허무한지는 금세 드러난다. 루이는 클로디아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 무대 뒤에서 동료 배우와 몰래 키스를 하고 우울과 무력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클로디아와 갈등이 잦아지자 극장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자와 짧은 일탈을 즐기기도 한다. 클로디아 역시 루이를 두고 계속 새로운 남자를 찾아 나서는데, 그녀는 변치 않는 마음 혹은 단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랑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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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질투> 스틸컷, 루이와 클로디아


 

자신의 불륜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는 루이에게 클로디아가 하는 “우리가 함께일 땐 즐기고 아니면 잊어”라는 말은, 처음 들을 땐 너무나 잔인해 사무치다가 계속해 곱씹으면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루이와 클로디아는 정말로 ‘다른’ 사람인가? 어쩌면 이들은 ‘사랑이 이렇다’는 걸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 정도로만 구분될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는 이토록 비정한 사랑의 속성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루이와 클로디아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아이처럼 뛰며 깔깔대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몰두하는 장면은 그 끝이 어떠하든 더없이 벅찬 사랑의 순간들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감정을 느끼려고, 이런 찰나를 더 많이 경험하려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질투〉는 사랑을 회의하고 의문을 던지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서로에게서 서서히 고개를 돌리며 멀어져 갈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살아남는 뜨겁고 따뜻했던 순간을 이야기한다. 사랑보다 더 길게 지속되는 것은 사랑했던 기억이고 ‘적어도 그때는’ 그래주었던 상대에 대한 고마움이다. 사랑을 의미 있게 하는 건 영속성이 아니라 나의 지금을 특별한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현재성, 순간성인지도 모른다.

 
회화에서도 사랑의 순간을 형상화하는 데 유독 탁월했던 화가가 있다. 바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이다. 샤갈은 19세기 말 러시아의 비테프스크라는 번화한 상업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유대인 집안의 장남이었고 아버지는 청어 도매상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샤갈은 어린 시절부터 화가를 꿈꿨다. 그는 고향의 유대인 화가 예후다 펜에게 처음 미술 교육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스물셋에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파리에 입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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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스승이었던 '예후다 펜'이 그린

샤갈의 스물 여덟 살 무렵의 초상화, 1915



샤갈은 습작기를 포함해 70년 남짓 한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 회화는 물론이고 무대 디자인과 조각, 도예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었으며 말년에는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실상 그의 작품 중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10년대에 제작한 작품들이다. 1910년 파리로 근거지를 옮긴 샤갈은 젊은 예술가들의 성지와 같았던 몽파르나스에 둥지를 튼다. 사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한편 루브르와 각종 전시를 관람하며 그는 ‘위대한’ 서양 예술의 전통 앞에 전율한다. 고흐, 고갱, 르누아르, 모네, 마티스의 그림을 코앞에서 보면서 그는 한층 더 성장한다.


정작 샤갈은 평생 동안 특정 유파로 묶이는 것을 거부했고 자신을 다른 작가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천재로 포장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샤갈이 뭐라고 말하든 그의 작품이 이미 그가 여러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증명한다. 파리 시기 초반에 그린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 1911)〉, 〈세 시 반(The Poet or Half Past Three, 1911)〉과 같은 작품은 명백히 당시 화단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입체주의의 영향 하에 그려졌으며 여러 색채의 혼합은 야수파의 기법을 받아들인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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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나와 마을>, 1911


 

그러나 샤갈은 이류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이의 기법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종속되지는 않았다. 파리 시기를 거치며 샤갈은 그전까지의 작품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거나 기미가 보이더라도 미미한 조짐에 그쳤던 개성을 발전시켜 자신만의 혁신과 독창성을 구축해간다. 그는 기법에서는 파리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궤를 같이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유대 사회에 강력히 결속되어 있었다. 샤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너무나 ‘샤갈스러운’ 몇 가지 요소는 많은 경우 샤갈의 집안이 믿었던 하시디즘 유대교에 뿌리를 둔다.


동물에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든다는 하시디즘의 믿음은 동물을 배려하고 그들과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문화를 낳았고, 사람들이 마치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공중제비를 돌고 방 안을 뛰어다니는 유대 축제는 그의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사람들, 염소와 나귀 등 동물 모티프, 주술적 분위기 등으로 형상화된다. 샤갈은 본인을 ‘유대인 화가’로 범주화하는 것을 불쾌해했고 보다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고자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건 그의 그림이 지닌 지역성, 문화적 특수성 덕분이었다.

 

파리를 경험한 것 외에도 이 시기 샤갈의 인생에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1915년, 일생의 사랑인 벨라와 드디어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벨라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진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1909년 당시 샤갈은 가난한 미술학도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 유대인이었으나 샤갈의 집안과는 경제적인 격차가 컸던, 부유한 상인 가문인 벨라의 집안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긴 건 당연했다. 샤갈은 연인을 러시아에 남겨두고 1910년 파리행을 택했고 그 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서신으로만 교류한다. 벨라를 향한 그리움과 점점 냉담해져가는 그녀의 반응에 조급함을 느낀 샤갈은 1914년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듬해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을 기점으로 샤갈의 작품은 온통 사랑, 사랑, 사랑으로 가득 찬다. 이 문장은 이렇게 바꿔도 무방하다. ‘온통 벨라, 벨라, 벨라였다.’ 샤갈에게 사랑과 벨라는 다른 단어가 아니었다. 행복한 연인이 등장하는 〈생일(The Birthday, 1915)〉, 〈산책(The Promenade, 1917~1918)〉, 〈도시 위에서(Over the Town, 1918)〉가 연달아 탄생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샤갈은 계획과 달리 고향에 오래 머물게 되지만, 파리에 남겨두고 온 작품들에 대한 걱정과 모든 일정이 틀어졌다는 불안은 벨라를 다시 만난 기쁨보다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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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셋 무렵의 샤갈


 

〈생일〉, 〈산책>, 〈도시 위에서〉는 연작은 아니지만 연작의 형태를 띤다. 연인들은 중력을 거스른 채 공중을 떠다니고 고향 비테프스크를 연상시키는 마을 풍경이 등장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공중부양 모티프는 샤갈에게 익숙했던 유대 문화에 뿌리를 둔 상상력이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적어도 연인을 그린 작품에 한해서는, 선행되는 지식보다 중요한 건 연인들의 황홀을 느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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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생일>,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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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산책>, 1918

 

 

목이 완전히 꺾인 채 땅에서 떠올라 연인에게 입을 맞추는 남자, 숄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배경, 사랑은 현실을 순식간에 논리가 없는 꿈의 세계로 탈바꿈시킨다. 남자는 땅에 발을 디디고 여자는 이미 하늘을 맴돌고 있는 〈산책〉은 어떤가. 남자가 여자를 안정적으로 붙들어주고 있는 건지, 아니면 곧 그도 여자를 따라 떠오르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어느 쪽이어도 좋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든 날아오르든,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맞잡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그 점이다.
 
샤갈은 이후에도 꾸준히 연인들을 그렸다. 그보다 조금 뒤인 1920~1930년대의 연인 그림은 색채가 한층 어두워지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짙어졌으며, 무엇보다 관능과 성적 긴장이 도드라진다. 전시 기획자이자 작가인 모니카 봄 두첸은 이 시기의 연인 그림이 개인 수집가들에게 주로 팔렸다는 점을 지적하며 애초부터 샤갈이 상업성을 고려해 작품을 제작했을 거라고 말한다.

 
1944년 벨라가 죽은 뒤 1년이 채 안 돼 새로 찾아온 사랑(벨라가 샤갈의 ‘마지막’ 사랑이었다고 말한 적은 없다) 바바 덕분에, 샤갈은 창작욕을 회복하고 다시 연인 모티프를 그렸는데 이 시기의 작품에는 기쁨과 두려움, 설렘과 그리움이 묘하게 뒤섞여 나타난다. 삶에 대한 긍정과 낙관으로 가득하고 사랑이 주는 환희를 오롯이 담아낸 걸로 치자면 1910년대에 그려진 그림을 따라올 수가 없는 것이다.


추락할 것을 알면서도 날아오르는 샤갈의 연인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 좋은 사랑을 못 혹은 안 하고 있는 이유는 뭔가. 마음의 빗장을 풀지 못하게, 사랑에 빠지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지난 실패. 이럴 때면 과거가 결코 과거가 아님을, 아직도 완전히 나를 지나가지 않았음을 느낀다.


이제 나는 사랑을 떠올리며 거창한 꿈을 꾸지 않는다. 지난 기억이 우리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굳이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매듭을 푸는 것도 묶는 것도, 빗장을 닫는 것도 여는 것도, 결국 모든 건 사랑이 한다. 어느 날 문득 닫혔듯 다시 또 그렇게 열리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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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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