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취향을 지키며 산다는 것 [영화]

영화 <소공녀> 칼럼
글 입력 2020.03.1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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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부터 내가 가장 자주 생각하는 토픽은 ‘취향을 지키며 살자’이다. 취향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사람마다 참 다양할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지금의 감정 상태와 날씨에 딱 맞는 영화를 고르는 것, 더 걸어서 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가는 것, 조금 비싸지만 만듦새가 나은 다이어리를 사는 것, 맘에 드는 스웨트셔츠를 사는 것 등등. 이 모든 예시를 요약해보자면 취향을 지키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범주를 좁혀볼 수 있다. 바로 아무거나 선택하지 않는 삶이다.

 

그러나 매 순간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는 아무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내 기분과 취향을 순간마다 파악하고 그에 맞는 재화를 고르는 일에는 아주 깊은 사고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만큼 시간도 걸릴뿐더러 맘에 쏙 들게 먹고, 입고 싶은 것들은 왜 이렇게 비싼 건지. 이처럼 우리가 취향을 지키는 순간에는 다소 현실적인 요소들이 대립한다. 바로 시간과 돈이다.

 

세간은 비교적 많은 시간에 적은 돈을 가지고 있는 청춘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 시간에 자격증을 따거나 인턴을 하면서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그래야 취업에 성공하여 집이나 차를 소유할 수 있고, 그게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나는 한국에 있는 여느 대학생들은 이 오만한 충고에 순응해왔다. 나 역시 1학년 겨울방학에 토익을 공부했고 2학년 1학기에는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나 남들이 행복해지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한다고 일컬어지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전혀 행복하지 못했다. 그런 순간들 틈에서 직접 탄 커피를 마실 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들이 더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행복의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 “선택의 주체는 대체 누구였던 걸까.” 다소 원론적인 이 물음에 파격적인 대답을 던진 영화가 있었다.

 

 

 

영화 <소공녀>,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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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미소는 3년 차 가사 도우미이다. 그녀가 사는 곳은 낡디낡아 어느덧 벽지가 회색으로 변해버린 단칸방이다. 집에 쌀이 떨어져 도우미 일을 해주는 동갑내기 친구에게 쌀을 빌려야 하는 처지인 그녀는, 누가 봐도 미소 짓지 못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미소의 삶을 지탱해주는 트라이앵글, 담배, 위스키, 남자친구 ‘한솔’ 덕분에 그녀는 웃을 수 있다.


겨울이면 웃풍이 들어 한솔과 스킨십을 하지 못할 정도로 춥지만, 그 대신 손바닥 게임을 하고 서로의 얼굴 그리는 등 미소가 보여주는 일상의 단면은 버틴다기보다, 성실하고 단출하다는 인상이 앞선다. 조실부모하여 어린 시절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그녀에게는 ‘가사 처리’라는 직업적 능력이 있으며, 그 덕에 담배와 위스키를 풍족하지 않아도 일정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한솔은 미소를 사랑했으며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만끽할 젊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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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울리는 것은 낡은 집이나 직업이 아니었다. 바로 물가상승률과 정책이었다. 위스키값과 월세가 올랐고 담배는 더 이상 천 원짜리 2장과 500원으로 사지 못했다. 한 달 수입 안에서 월세, 약값, 위스키, 담배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결단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위스키와 담배가 포기해야 할 1순위일 것이다. 아니 술과 담배 가격이 오르지 않았어도, 미소의 처지라면 일찍이 그것들을 참고 돈을 모아 더 나은 집으로 가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익히 알려진 행복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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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소가 포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월세, 바로 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소의 삶이 침잠하지 않도록 만드는 건 단칸방이 아니라 위스키 한 잔의 풍미와 온몸에 퍼지는 담배였기 때문이다. 그녀만의 취향과 생각이 너무 뚜렷했던 나머지 미소는 방을 빼고, 집이 없는 기나긴 여행을 시작한다. 아직은, 미소의 삶이 어떨지 단정 짓기 이르다.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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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미소의 처지는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향과 적확하게 어긋나 있다. 그렇다면 그런 그녀가 도움을 청할 곳은 바로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부합하거나 혹은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일 테다. 미소는 대학 시절 함께 밴드 활동을 했던 인연들을 찾아가 일시적인 숙박을 부탁하기 시작한다. 대기업에 취직한 문영,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며 사는 현정, 번듯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여 사는 대용, 부모님의 단독 주택에서 사는 록이, 부자인 남편과 결혼하여 고급스러운 집에서 귀여운 아기와 풍족하게 사는 정미. 대기업 취직, N포 세대에 성공한 결혼, 부유한 배우자 하다못해 나이먹은 자식을 거둬줄 수 있는 부모 등등 미소의 여정에서 만난 인물들을 수식하는 문구들은 솔직히 참 부럽다.

 

그러나 저 단편적인 수식구를 들춰낸 삶의 단면은 곪아 있었다. 현정은 시부모를 모시고 살며 남편의 등쌀에 밤마다 눈물을 삼켰고, 대용은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부인과 이혼했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건 신혼집 주택 담보 대출이었다. 문영은 회사 점심시간마다 숨어서 링겔을 맞아가며 회사생활을 버티고 있었으며, 록이는 마흔이 넘도록 부모님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미는 남편의 비위를 맞추며 하루하루 눈치만 보며 살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을 보살피는 건 집을 떠날 때마다 따뜻하고 정갈한 끼니를 대접하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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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번듯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행복한 삶을 살고자 희생한 결과가 이 4명의 사람을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줬는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이 명제를 뜯어보자면 첫 번째로 쓰인 ‘행복’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두 번째로 쓰인 ‘행복’이 의미하는 바는 다르다. 전자의 행복은 사회가 규정한 행복이며 후자의 행복은 사적인 행복, 다시 말해 마음속으로부터 차오르는 행복감을 뜻한다. 어느 행복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는 각자의 결정이나 단 한 가지만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회적인 행복은 사적인 행복의 바탕에 있을 때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랑 참 염치없다야."



 

정미 「요즘 담뱃값이 올랐다던데, 집이 없을 정도로 돈이 없으면 나같으면 독하게 끊었겠다.」

미소 「알잖아. 나 술담배 사랑하는 거.」

정미 「아이고, 그 사랑 참 염치없다야.」

미소 「뭐가 없어?」

정미 「(...)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술담배라는 것도 솔직히 진짜 한심하고. 그것 때문에 집도 하나 못 구해가지고 우리집에 와 지내면서 다 이해해주길 바라는 네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안 드니?」


 

자신을 행복을 좇는 미소는 지금 주거 문제, 즉 가장 기본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미의 대사를 듣고도 주인공인 미소를 감싸고 돌 수가 없다. 이 영화에 대한 평점이 극명히 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올곧이 취향을 고집하는 미소와 그녀를 주인공을 세운 <소공녀>를 두고, 혹자는 “끔찍하게 부족한 경제 관념과 상식을 마치 신세대의 매력적인 백치미인 것처럼 다뤄본 영화의 시도는 한편으로 실제 사회상과 그 평범함을 얕보는 감상이 아닌가 싶다”(출처: 왓챠 <소공녀> 페이지)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소공녀>에 감격한 누군가가 끔찍하게 부족한 경제 관념과 상식으로 무장한 채 미소처럼 살게 되리라는 상상은 하기 어렵다. 얼마 안 되는 인연들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갈 만한 각오를 평범한 일상인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미소를 가장 사랑했고 그렇기에 그녀를 이해하려 했던 남자친구 한솔마저 꿈인 웹툰 작가를 포기한 채, 생활비를 벌던 공장을 통해 외국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소공녀>의 미소는 판타지적 인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행복을 미친 듯이 추구하느라 지친 이들의 진심이 모아 만들어진, 사적인 행복을 좇고자 하는 열망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영화 결말부에서 미소는 한강 변에 텐트를 치며 살게 되고, 또 하나의 지출이었던 약값을 포기한 채 백발이 된다. 그녀를 멀리서 관조하는 시선으로, 영화는 끝난다. 겨우 텐트에 정착한 삶, 백발이 되는 병은 미소가 판타지적 인물이라는 것을 한층 짙게 암시하는 듯하다.

 

판타지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결코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숙명을 타고난 이상 미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잔존하여 숨 가쁘게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치열한 우리 삶에 가끔씩 브레이크를 거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하는 게 아닐까. 어린 시절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대했기에 12월 24일부터 25일 아침만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으로 지새웠던 것처럼. 사우디로 떠나는 한솔에게 미소는 드로잉 노트와 그림 그릴 펜을 쥐여준다. 그리고 웹툰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는 말라는 말을 남긴다. 한솔의 꿈을 미소가 이뤄줄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의 자신의 진심을 각성시켜주는 일. 그게 미소가, <소공녀>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임을 나는 안다.

 

*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늦은 새 학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에 발맞춰 강의 교재를 사고, 과제를 하고, 토익 스피킹을 딸 준비를 할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사회의 성원으로 살아왔으니 사회의 행복과 나의 행복이 일정부분 겹쳐 있기 때문에 성공적인 취업과 내 집 마련의 욕구에서 피할 수 없다. 대개 순종적인 학생으로 시간을 보내왔던 나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또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선택하기 위해 갈등하는 매 순간 미소를 한번 쯤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소'를 연기한 배우 이솜의 인터뷰처럼 '모두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요즘에 좋아하는 것을 지키고 살았으면' 한다. 이를테면 식사 메뉴를 고를 때, 봄옷을 살 때, 갈림길을 고를 때마저도 자신의 허용 가능한 수준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취향껏 누렸으면 하는 진심을 담아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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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의 출처는 영화 <소공녀>(2017)입니다.

 




[우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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