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맨덜리 저택 둘러보기 (3) [공연예술]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본 뮤지컬 <레베카>의 이모저모
글 입력 2020.03.09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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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작품의 직접적인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부유한 남성인 막심과 결혼하여 완전히 뒤바뀐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이다. 한국 프로덕션에서 '나'는 막심에게 극존칭을, 막심은 '나'에게 반말을 사용한다. ‘나’는 막심과 함께 두 사람에게 닥친 역경(막심의 범죄가 밝혀질까 봐 걱정하는 일)을 헤쳐 나가기로 마음먹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나’가 그러한 도전을 결심한 계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관객들이 소극적이고 (막심의 눈에) 순수했던 ‘나’가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의 대결을 결심하고 그러한 대결에 충실히 임하는 모습에서 ‘나’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가 모험을 결심한 순간이 막심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 받았을 때에 불과함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막심이 자신과 결혼한 후에도 전처인 레베카를 잊지 못한다고 오해했던 ‘나’는 레베카를 죽인 범인이 막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약속한다. 동시에 ‘나’는 사실 막심이 레베카를 증오했고, 막심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심한다.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막심을 감싸며 사랑하는 막심과의 행복을 찾기 위해 그의 범죄를 은폐하기로 결심한다. 작품은 결국 ‘나’를 살인을 저지른 남편에게도 변치 않는 사랑과 신뢰를 보여주는 여성 캐릭터로 설정한 것과 같다.


다음은 다분히 남성중심주의적인 시각에서 연출된 장면으로, ‘나’가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한 계기가 남성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자는 더 강한 존재야

사랑을 위해 싸울 때

세상 모든 역경 앞에서

바다를 갈라 산을 옮겨 


- 여자들만의 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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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MK 뮤지컬 컴퍼니

 

 

 

레베카



레베카는 뮤지컬 <레베카>의 숨은 주인공으로, 무대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작품의 등장인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캐릭터이다. 레베카는 죽은 막심의 전처인데, 작품에서 모든 이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던 완벽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막심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대외적으로는 맨덜리의 ‘안주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완벽한 안주인’의 이미지는 여성 캐릭터인 레베카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 그녀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의 일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은 막심이 드 윈터 가문의 명예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레베카와 이혼할 수 없었다고 설명하는데, 사실 이혼이 드 윈터 가문의 금기라는 사실은 레베카에게도 큰 억압이었을 것이다. 선망받는 귀족인 드 윈터 가문에게 이혼을 요구했을 때 사회적 비난의 화살은 막심이 아닌 레베카에게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레베카와 내연 관계에 있었던 잭 파벨이 극의 전면에 드러나 진취적인 야심가로 당당히 묘사되는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


그래서 레베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장무도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자신과 맨덜리의 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신변을 지키거나, 막심과 계약을 맺고 숨겨진 보트 보관소에서 애인을 만나는 일 따위였다. 이는 막심의 말대로 레베카가 정조 관념을 위반한, 겉과 속이 다른 교활한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맨덜리에 사는 동안 억압당해 온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레베카가 정말 한 가정의 불화를 초래한 악랄한 인물에 불과한지에 대해 재고해 보아야 한다.


 

3-2.jpg

 


 

그 외



또 작품에서 '아메리칸 우먼'으로 묘사되는 ‘나’의 고용주 반 호퍼 부인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 툭하면 면박을 주고 허영심으로 가득 찬 반 호퍼 부인이 막심에게 ‘들이대는’ 모습은 순수하고 얌전한 ‘나’의 모습과 대조된다. 그리고 막심은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왕자가 신데렐라의 언니들에게 그랬듯, ‘숙녀답지 못한’ 반 호퍼 부인에게 은근한 모욕을 준다.


그리고 그러한 반 호퍼 부인은 막심의 선택을 받은 ‘나’를 ‘천생 하녀’라며 무시하고, ‘나’가 최상류층인 막심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남성인 막심의 눈에 순수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나’가 바로 그 ‘순수함’ 때문에 그의 선택을 받는 데에 반해서 말이다. 이와 같은 인물 구도는 로맨스 장르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여성혐오적 레퍼토리다.


이외에도 뮤지컬 <레베카>에는 ‘겉모습 예쁜 여자 젊을 때야 좋지만’, ‘말 좀 해 봐 이 걸레같은 년아’와 같은 여성혐오적 발언이 종종 등장한다. 이는 <레베카>가 초연 이후 수차례 무대에 올려졌던 한국 뮤지컬 시장의 스테디셀러로서 분명 성찰해 보아야 할 지점이다. <레베카>가 뮤지컬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품인 만큼, 다음 프로덕션에서는 더 발전된 <레베카>의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 '맨덜리 저택 둘러보기 (1), (2), (3)'은 필자가 서울 YWCA 회보 3-4월호에 기고한 글 '여성의 내적 성장은 사랑에서만 비롯되는가'를 참조했습니다.

 


[이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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