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레이디 버드에게 바치는 러브레터 "레이디 버드" [영화]

영화 <레이디 버드>
글 입력 2020.03.06 04:4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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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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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기 가득한 새크라멘토의 여고생.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잔소리쟁이 엄마도, 구질구질한 집구석도 다 맘에 안 든다. 소원이 있다면 이곳을 떠나 동부의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 이 당찬 소녀는 언제쯤 최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부터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은 나에게 강렬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포스터에 칠해진 붉은 색채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냥 그 단어 자체에서 오는 느낌이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름이 좀 촌스럽고 유치하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피어슨. 새 학교, 새 학기, 새 친구들. 출석부에 적힌 크리스틴에 두 줄을 긋고 그 위에 ‘레이디 버드’를 덮어쓴다. 자신을 소개할 때는 레이디 버드라고 인사한다. 내가 나를 위해 나에게 붙여준 이름이니까.

 

그 시절엔 나를 위해 품어 두는 이름 하나쯤은 다들 있지 않았나. 그러니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름 말이다. 아무에게도 빼앗기기 싫어서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는 내 ‘영혼의 조각’ 같은 거랄까. 그렇게 해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다. 지금의 현실이 지루하고 끔찍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속엔 숨 쉴 꿈과 희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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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철로 변의 구린 쪽(Wrong side of the Tracks)’에 사는 레이디 버드는 좁고 답답한 새크라멘토가 지독하게 싫다. 문화가 있는, 예를 들면 뉴욕 같은 곳이면 좋겠다. 가톨릭 학교도 싫고,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부르는 엄마와 싸우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꼭 이곳을 벗어나고 말리라.

 

비싼 학비 때문에 동부에 있는 대학을 가지 못하게 하는 엄마가 미워서, 종이와 펜을 들고 소리를 지른다. 다 얼마냐고, 나 키우면서 들어간 돈 얼만지 다 말하라고. 죄다 기록해두겠다 다짐한다. 아빠가 부끄러워 학교에서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달라고 했고, ‘철로 변의 구린 쪽’이라는 농담으로 엄마 마음을 찔렀다.

 

이 영화는 내 삶의 압축판이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모두 우리 동네에서 버스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부모님은 학비가 저렴한 집 근처 국립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원했다. 물론 나는 졸업과 동시에 그곳을 벗어나겠다고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레이디 버드가 그랬듯, 엄마와 서로를 끊임없이 껴안았고 찔러댔다. 그땐 그곳의 지겹도록 똑같은 풍경이 내 영혼을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날 좋아해 주면 좋겠어.”

 

“너 사랑하는 거 알잖아.

난 네가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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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사랑에 빠진 레이디 버드는 들뜬 마음으로 집에 들어섰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의 입에서는 가시가 날아온다. 각자의 입장이란 게 있다. 아빠는 실직했고, 엄마는 혼자 직장 생활을 하며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하다고 느낀다. 자신의 딸이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란다. 진심으로 레이디 버드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레이디 버드는 그런 엄마가 야속하다. ‘엄마는 한 번도 침대 정리 안 하고 잠자리에 든 적 없어?’

 

새크라멘토를 떠날 즘에 비로소 그곳에도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는 걸 레이디 버드도, 나도 겨우 알아챈다. 엄마가 새크라멘토를 운전하며 느꼈을 감상을 머금어본다. 항상 밝게 웃어주실 것 같았던 연극부 선생님도 수업을 하다가 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엄마도 밤을 지새우며 나에게 수십 장의 편지를 썼다, 구겼다 한다. 그래서 레이디 버드는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엄마와 새크라멘토를 싫어하는 쪽도, 좋아하는 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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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버드는 그때의 내가 그랬듯, 귀여운 허세 가득하다. 쿨한 카일과 제나 앞에서 괜히 비속어 가득한 욕설을 쓰고, 집 주소를 거짓으로 알려준다. 18살이 되는 생일에는 담배와 플레이걸 잡지를 산다. 학교 수녀님 차에 ‘저는 방금 막 예수님이랑 결혼했어요!’라는 커다란 플랜카드를 붙인다. 레이디 버드가 카일에게 한눈에 반하는 순간을 그레타 거윅 감독은 “처음 그를 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R&B 음악을 이해하게 됐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했다.

 

영화는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할 만한 일화들, ‘철없었던 때’로 명명될 법한 이야기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것들을 깨닫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다던가 하는 결론을 내리지도 않는다. 그 시간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엮어내는 실의 역할만 할 뿐이다. <레이디 버드>는 지금의 ‘나’가 바라보는 그때의 ‘나’다. 촌스럽고 유치했던 ‘레이디 버드’는 그때 크리스틴의 최고의 모습(Best version of m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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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이다. <작은 아씨들>과 <레이디 버드>를 연달아 두 번씩 보면서, 나는 이 감독의 완전 팬이 됐다. <레이디 버드>에서 처음 감독을 맡은 그는 과감한 컷 전환을 시도한다. 영화에서 컷과 컷을 매끄럽게 잇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진다. 자칫 잘못하면 뚝 뚝 잘라내버린 화면들 때문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그레타의 컷 전환은 완벽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레이디 버드가 대니 그리고 카일과 사랑을 나눌 때 흘러나오던 사랑스러운 선율은 그야말로 갑자기 뚝 끊기는데, 사랑 속 환호성은 장면 전환과 함께 엄마를 향한 절규가 된다. 노래와 상황에 따라 장르는 로맨스, 성장, 가족, 스릴러, 코미디로 휙휙 넘어간다. 그레타 거윅은 그 간극 속에 유머를 발라뒀다. 그 위로 착 달라붙은 장면들은 어떤 영화보다 매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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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버드>는 가식 없다. 볼륨을 한껏 높인 이어폰 속에서 나는 햇볕이 내리쬐는 푸르고 멋진 야외 수영장에 있다가도, 뚝 꺼진 음악은 다시 나를 사람 가득한 지하철 속에 밀어 넣는다. <레이디 버드>는 이 음악도 틀고, 저 음악도 튼다. 음악이 꺼지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레이디 버드는 새크라멘토를 싫어하면서도 좋아하고,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어느 한 쪽만 선택할 수 없는 마음은 결국 그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크리스틴이야.’

 

‘아카데미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골든 글로브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는 건 싫지만, 어쨌든 내가 사랑하는 영화를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좋아하고 있다니. 이 사랑스러운 영화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싶다. 게다가 레이디 버드 역을 맡은 시얼샤 로넌의 연기는 유쾌함과 사랑스러움 그 자체다.

 

그레타 거윅은 이 영화를 ‘새크라멘토에 바치는 러브레터’라고 했다. 나는 이 러브레터를 레이디 버드와 그레타 거윅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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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사랑해, 고마워요.

 

두 분이 참 좋은 이름을 지어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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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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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엠케이
    • 저는 짱소에게 러브레터를 어홓ㅎ홓ㅎ
    • 0 0
  •  
  • D
    • 좋아하는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고 검색하던 중에 발견했는데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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