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 [도서]

함부로 책임감이라 하지 마세요.
글 입력 2020.03.0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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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기가 여든살이 됐을 때의 얼굴을 내게서 본다.

나는 내가 서른넷이 됐을 때의 얼굴을 아버지에게서 본다.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


<김애란-두근두근 내 인생, 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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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만 보았을 때는 사랑스러운 연애소설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사랑스러운 단어들로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필체를 통해 <두근 두근 내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화자인 아름이는 누구보다 빨리 나이를 먹는 조로증을 앓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아픈 기억밖에 없는 아름이는 누구보다 세상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둥글게 바라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름이의 예쁘고 성숙한 말 솜씨가 어쩌면 너무 모든 것을 빨리 배워버린 탓에 생긴 것은 아닌지, 조금은 더 속상하게 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가 대단한 점은,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 아름이가 어린 환자가 아닌 '아름이' 자체로서 다가온다는 것이다. 책을 덮으면 아름이라는 친구 한 명이 생긴 기분이 든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한없이 따뜻한 아름이가 끝없이 냉정한 현실을 사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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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


 

또래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는 아름이가 유일하게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웃집 장 씨 할아버지다. 길가는 젊은이들을 욕하면서도 당신이 그 때로 돌아간다면 그들처럼 버릇없게 살 것이라고 껄껄 웃는 장 씨 할아버지는 철없는 센스쟁이이다. 아름이는 세상 다 산 듯한 말투로 장 씨 할아버지를 훈계하지만, 할아버지가 누구보다 믿음직한 어른이라는 것을 제일 잘 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서로의 주름을 보고 있노라면 굳이 말하지 않는 상대방의 근심이 세어지는 걸까. 아름이의 진지한 물음과 담담한 감정에 언제나 호쾌한 답변을 보내는 장 씨 할아버지는 아름이의 아픔보다는 웃음을 보는 것 같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기에 숨길 것도, 거리낄 것도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세대를 넘어선 우정이 우리에게 말한다. 친구가 되는 것은 살아온 인생의 시간보다 살아갈 인생에 대한 공감의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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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할지라도 기대해야 하는 이유


 

어느 날, 병원에서 매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아름이를 환하게 비추는 메일 한 통이 찾아온다. '서하'라는 또래 여자아이가 보낸 것이다. 서하는 아름이처럼 병원 신세를 지고 있고, 아름이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온 것을 본 후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처음 느껴보는 설렘을 감당하지 못한 아름이는 며칠간 고민 끝에 담백한 답장을 한다.


이 날 이후, 아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메일을 기다리게 된다. 서하라는 아이의 답장에 따라 하루 기분이 좌우되고, 어떨 때는 일부러 한동안 메일을 읽지 않기도 한다. 아름이는 그런 자신이 한심하다 싶으면서도 "또래 친구를 사귀어라"던 장 씨 할아버지의 말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아름이의 낯선 기대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름이의 이야기를 듣고 서하를 수소문한 어른들이 '서하'는 한 시나리오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아내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이 대화를 들은 아름이는 서하를 알기 전보다 더 불행해져 버린다.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온 행복은 우리를 다시 불현듯 더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는 매번 속으면서도 가망 없는 희망에 기대고,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 실망의 크기가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지금을 견뎌내기 위해 또 다시 다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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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과 사랑의 반비례 관계


 

"가끔 궁금했어요. 엄마랑 아빠랑...... 내가 병들어서 무서운 게 아니라, 그런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봐 두려우시진 않았을까(321p)."

 

통상적으로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책임지려하고, 대신 힘듦을 견뎌내려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름이의 위 대사를 읽고 조금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책임감과 사랑이 반비례 관계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진정한 사랑은 대상을 향한 책임감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막중한 책임감에 무리하고, 대신 견뎌내는 것이 상대방에게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부담일 수도 있다.


17살에 아름이를 낳은 엄마 아빠는 책임감의 "책" 자도 어울리지 않는 어린 소년, 소녀였다. 어느 소년과 소녀가 갑자기 찾아온 아이와 함께 성장하면서 책임감과 사랑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진실한 사랑에 도달했을 때, 과거의 이들의 노력을 "책임감"이라 칭하는 것은 제3자의 차갑고 무례한 태도일지 모른다. 일에 관한 것이 아닌 사람에 대한 책임감을 논할 때, 앞으로는 다시 한번 생각하고 이야기하게 될 것 같다.

 

 

"나는 그냥 작게 웃었다.

그러곤 속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했다.

어리고 철없고 어여쁜 내 부모.

몇십년 후 나와 같은 얼굴을 가지게 될 내 부모를"


<김애란-두근두근 내 인생, 7p>



남들보다 수십 배는 빠른 시간을 사는 아름이가 수만 가지 인내심과 이해심을 가지기 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지는 가늠할 수 없다. 성숙한 글 솜씨로 "두근두근 그 여름"이라는 어린 부모의 이야기를 선물로 남기며, 아름이는 다음 생에 아버지로 태어나길 소원한다.

 

 

[추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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