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오랜 어릴적 친구가 새롭게 건네는 인사, 도서 '작은 아씨들'

글 입력 2020.03.02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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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 명작선 같은 데서 ‘작은 아씨들’을 읽었었다. 내로라하는 명작들만을 모아놨던 그 명작선 중에서도 나는 작은 아씨들을 가장 좋아했다. 조금 더 큰 후 집 정리를 위해 어머니께서 명작선 책을 버리라고 했을 때도 그 틈에서 작은 아씨들만큼은 사수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것도 다 옛날인지라, 20대 후반에 접어드는 나는 작은 아씨들의 내용 전반을 기억하지 못했었다. 단지 따스한 분위기였다는 것과 내가 그 중 ‘조’를 가장 좋아했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그러던 어느 날 다시금 작은 아씨들이 내게 왔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다시 책장을 펴 봤는데… 웬걸. 언제까지고 과거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오랜 친구는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왔었다. 다시 읽은 작은 아씨들은 내게 익숙함 보다는 새로움이었다.


 

걸클래식_작은 아씨들.jpg

 

 

 

따스한 기억으로 남은 어릴시절 친구



작은 아씨들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우선 1부는 little women이라는 영어 제목 그대로, 마치 가에 있는 4명의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다. 순서대로 메그, 조, 베스, 에이미. 각각의 개성이 무척이나 뛰어난 이 네명은 각기 다른 시련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헤쳐 나가며 성장해나간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작은 아씨들의 인물구성은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누구 하나에게는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나의 경우엔 조를 가장 좋아했지만 (아마 나를 국문과로 이끈 데에는 조의 역할도 있지 않았을까), 동생은 메그를 가장 좋아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선 첫째인 메그는 가장 ‘여성’이란 스테레오 타입에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새하얗고 고운 피부를 가진데다가, 교양이나 정숙함 따위를 높은 가치로 여기고 자신을 꾸미는 데 관심이 많다.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야무지다. 드레스나 장갑 등에 대한 허영심에 괴로워하고 그로 인해 경솔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곧바로 후회하고, 성장해 나가는 인물이다.


둘째인 조는 그 시절 쓰여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괄괄한 인물이다. 외모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은 물론, 용감하고 다혈질이다. 그의 손에 들어간 물건은 늘 성치 않게 될 정도로 덤벙거리며, 자신이 쓴 연극에서도 남성 역할을 자처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며 한번 몰두하면 열정적으로 파고드는 성향을 지녔다. 늘 모험을 꿈꾸는 이 소녀가 유일하게 꿈꾸지 않던 모험은 여자 아이라면 으레 꿈꾼다는 연애나 사랑이다. 활동 범위가 가장 큰 만큼 가장 많은 시련을 겪고, 가장 많이 성장해나가는 인물이다.


셋째인 베스는 가족 내에서 ‘천사’라고 불릴 정도로 순하고 착한 인물이다. 늘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하며, 장밋빛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사랑스런 소녀. 다른 자매들과 달리 수줍음이 많고 욕심이 별로 없다. 유일한 바람은 가족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음악에 재능과 열정이 있지만 이 마저도 가족들을 위해서 노래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넷째인 에이미는 가족 내에서 가장 잇속에 밝은 인물이다. 자신만의 고집이 뚜렷하고 조처럼 강경한 성격을 가졌지만 조보다는 훨씬 현실과 타협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기에 작중에서도 남성들에게 가장 인기 있다고 묘사된다.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에 조와 가장 많이 부딪힌다.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있고, 그림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한 가족에서 어쩜 이리 다양한 인물들이 나올 수 있는 지 궁금할 정도로 각자 다른 기질과 욕망을 가진 이 네 자매는, 그런 만큼 상호작용하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각자의 짐을 들고 집안 구석구석으로 모험을 떠나는 ‘순례자 놀이’나, 조의 대본에 맞춰 공들여 만든 연극들, 마치 신사들의 클럽에 들어간 양 말투까지 바꿔가며 매주 모이던 ‘픽윅 클럽’ 등. 1부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그 따스함을 담아낸 이야기들로 구성돼 있다.


어린 시절에 내가 사랑했던 이야기들. 1부를 읽으며 피식 웃음 지을 때면 이들을 부러워하고 나도 이들처럼 놀고 싶다며 놀이계획을 짜던 그 모습이 그려졌다. 특히나 공보경 옮긴이의 따스한 문체와 묘사력은 그 따스한 기분을 배로 만들어줬다. (궁금해서 다른 번역본도 찾아봤으나, 윌북의 작은아씨들의 문체가 월씬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렇게 1부는 추억과, 따스함을 선사해줬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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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현재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잘 맞는 친구



놀라웠던 것은 2부였다. 아마 어린이를 위한 책에는 2부가 수록되지 않았었나 보다. 내게 작은 아씨들은 정말 ‘작은’ 아씨들에서 멈춰있었고 이들만큼은 영원히 자라지 않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성장해서 성인이 됐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들이 시련을 마주하고, 고민하는 그 나이는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하다. 지금 이 시기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됐던 것은 운명일까. 어릴 적 친구를 다시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기분으로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마냥 따스하고 동화 같던 1부와 달리 2부는 조금쯤 음울하다. 성인이 되어버린 자매들은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어릴 적부터 그들을 괴롭혀오던 빈곤은 더욱 실질적인 문제가 되었고, 단지 사랑과 우정을 꿈꾸던 이들은 이제 결혼을 논하고, 심지어 출산까지 한다.


메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여전히 빈곤은 그를 힘겹게 한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집안엔 다툼이 생기며, 출산 후에도 육아는 쉽지 않다. 조는 돈과 글의 작품성을 두고 갈등하고, 그 과정에서 삼류소설을 연재하다 수치심을 느낀다. 혼자 살겠다고 외치고 다니던 어린시절과 달리 외로움을 느끼고 슬퍼하기도 한다. 베스의 성홍열은 치유됐음에도 그의 건강 상태는 시시각각 나빠진다. 에이미는 꿈꿔왔던 유럽여행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재능의 한계를 깨닫는다.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으며 돈이 많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남성과 결혼까지도 생각하게 된다.


각각의 자매들이 겪는 이 모든 일들이 현대의 나도 겪고 있는 문제들이라 무척이나 공감이 됐다.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메그가 겪는 문제들은 현대에도 익히 들어왔던 것들이며, 조나 에이미가 겪는 ‘꿈’과 ‘현실’에 관한 문제는 지금 당장 내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였다. 어린 시절 모습이 가장 비슷해서일까. 지금도 조의 상황과 고민들은 현재 나의 것과 가장 비슷했다. 그렇기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제발 조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래야만 나도 결국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까지나 공감할 수 있던 또 다른 이유는 1860년대에 쓰여 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네명의 여인들이 마주하는 문제나 해결해나가는 방식이 현재 페미니즘의 흐름과 맞닿아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삶은 수동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다. 메그는 남편에게도 육아를 맡기고 ‘누군가의 엄마’로서의 삶만을 사는 것을 택하지 않음으로써 가정의 평화를 되찾는다.


조는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사랑하는 이에게 먼저 키스할 정도의 대범함을 지녔으며, 연인이 생긴 이후에도 자신의 커리어를 지속해서 쌓아나간다. 심지어는 조의 주도로 학교를 열고 후에 남편과 함께 그를 꾸려나간다. 베스는 억지로 죽음에 끌려가기보다, 이를 의연히 받아들이고 담담하고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간다. 에이미는 결국 ‘돈에 팔려가듯’ 하는 결혼을 포기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택하고, 그와 함께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결혼 이후에 오히려 다시금 자신의 작품세계를 넓혀갈 용기를 얻고 꾸준히 작업을 이어간다.


물론 시대적 배경이 1860년대이니 만큼 한계는 있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이들의 삶의 모습은 무척이나 진취적이고 주체적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에게 동일시하고, 또 앞으로 이들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감히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


우연히 앨범에서 발견한 어릴적 친구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와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변하면서 변하지 않은 그 모습을 마주하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을 함께 회상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에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 현재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작은 아씨들을 읽는 내내 정말이지 친구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2부라는 복병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5년 전의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작은 아씨들이 당당히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이 놀랍기만 하다. 앞으로 10년 뒤에 읽을 '작은 아씨들'은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매번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하며 그때마다의 내 모습이 이 소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꿈 많던 어린 시절의 조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조의 모습을, 나의 모습을 다시금 마주하고서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어느 시점이건 나는 잘 살고있다는 것을 의미할테니 말이다.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오랜 친구들이 성장하면서도 변치 않는 '나'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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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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