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안녕하세요. 애매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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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Mr. Myself.
설렘에 대하여 물어본다 하여도 쉬이 설명은 할 수가 없다. 나조차도 아직 설렘이라는 이에 대해 알아가고 있음과 더불어 내게 찾아온 설렘과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나와 다른 아무개에게 찾아온 설렘이 같을 거라는 확신도 없는 탓이다. 하여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금의 나에게 설렘이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대하여 구태연하게 늘어놓은 것뿐이다. 아직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기도 하다.
설렘이라는 대상은 꽤나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이 아닐까 싶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나는 다음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고 영문도 모른 체 그저 들떠있다. 설렘을 가져온 것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다시 또 만나고 싶어 지고 어떤 행동이라면 다음에 또 같은 일을 할 수 있음을 바라게 된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멈추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되려 그 날의 모든 시간이 온전히 행복하기만 하다. 장황하게 떠들었음에도 이런 것이 설렘 맞는지에 확실하지는 않다.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일이 그리 많지도 않고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어째서 그런 감정을 느꼈냐고 물어본다면 이에 대해서는 꽤 자세하게 대답할 수 있다.
새로움과 마주했을 때 설렘을 느꼈다. 그게 무엇이건 누구이건 간에 상관없이 그저 새롭다는 것이 좋았다. 내가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나에게 설렘은 안겨주었기에 무엇이라도 좋았다. 여지까지 모르고 있던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도 좋았다. 알아보고 싶었던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도 좋았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하는 것도 좋았다.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을 겪어 보는 것도 좋았다. 끝도 없이 늘어놓을지 모른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볍게 넘기기 어려운 것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음이 지나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새로움이라는 동일 선상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 성격이라 생각한다. 언제부터였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다지 알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눈을 돌리니 ‘나’씨는 무료하다, 반복적이다, 그저 그렇다, 또는 흔해 빠졌다 따위로 평가되는 행동, 경험, 시간 따위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인 듯 보였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인지 할 수 있도록 언제나 깨어있게 해주는 소위 ‘신선한 자극’을 찾는 갈증을 해소하지 못해 괴로운 듯했다. 혹은 후회나 아쉬움이 자신의 발치까지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 미친 듯이 도망치는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불 꺼진 방에 몸을 뉘이고 이불을 덮을 때마다 방 문을 두드리며 잠을 설치 게하는 불청객을 쫓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의 하루는 부질없었음. 오늘의 하루는 그저 그랬음. 매일 밤 이런 짐을 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려서 치우느라 애 먹는 게 싫은 ‘나’ 씨는 그 정체 모를 불청객을 잡고자 새로움이라는 무기를 찾아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는 것 같았다.
나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읊어주는 것과 마주할 때 설렘을 느꼈다. 나에게 이런 성향을 지녔다 알려주는 것. 나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 나에게 어떤 것으로부터 흥미를 알아갈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그저 나에 대해 끊임없이 조잘거리며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끔 이끌어주는 모든 것이 그토록 설렜다. 이 모든 이끌림으로 인해 남들로 인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이 아닌 보다 나다운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에 설렜다.
생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기 시작했을 무렵과 철들었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무렵부터 ‘나’씨는 뜨거움이 자라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삶을 살고자 하는 그 열망을 느껴버렸다. 한 번뿐인 인생임을 알기에 저 수없이 많은 이들과 별 다를 바 없는 게 아닌 확실하고도 뚜렷하게 자신의 색이 배어있는 자신만의 인생을 원하게 됐다. 그 후로 언제나 자신에 대해 배우고, 연구하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듯했다. 그런 나 씨를 보고 있자니 저렇게까지 남들과 다르고자 애써야 하는가 싶기도 했다. 자신을 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끝이 남들과 달라짐으로 이어진다면 올바른 것인지 잘 모르게 됐다. 하지만 그런 노력하는 삶은 동경했다. 결국 나 씨를 보는 나는 적절함씨가 어디쯤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돼버렸다.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과 마주쳤을 때 설렘을 느꼈다. 많다고는 못 할 나이라 해도 지금까지 이어진 인생의 필름이 그리 짧지는 않다. 그 모든 한 장 한 장의 컷에 담긴 그때의 감정, 그때의 경험, 그때의 나, 그때의 누군가, 그때의 순간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이 그토록 설렜다. 영화를 보며 비슷한 추억이 스며있는 장면에서 그때를 떠올리는 것도, 이어폰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노랫말이 내가 하고자 했거나 하지 못 해 아쉬웠던 말을 다시금 들려주는 것도, 어쩌면 나도 저랬을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하는 것도 그저 설렜다.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나’씨는 지난날과 지난 감정을 다시 꺼내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영화를 보던지 노래를 듣던지 책을 읽던지 간에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나 씨가 쌓아온 추억의 앨범에서 어떤 것이 그와 겹치는지를 하나하나 대어보며 가능한 많은 겹침을 찾았을 때마다 행복한 표정을 피웠다. 그게 그리도 즐거운 일인가 싶긴 했지만 추억을 다시 돌아보고, ‘공감’이라는 놈을 불러내는 것이 즐거운 듯했다. 달리 보자면 안심이 되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 수도 없이 많은 추억과의 비교 속에서 나 씨도 자신이 살아온 시간에 다시 한번 돌아볼 순간이 많았음을 되새기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씨도 다른 이들처럼 누군가와 감정적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임을 확인하며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Springtime Funeral, and I Don’t Really Know.
20대 중반이라는 역에서 잠시 쉬어가는 중이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숨을 돌리고 있자니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청춘이라는 역이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언제나 내가 서 있는 그 자리를 기점으로 위치를 바꿔대는 탓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보다 어린 곳에 내린 이들에게 나는 곧 다가 올 청춘을 먼저 가진 사람이기도 하면서 턱없이 먼 곳으로 가버린 어른이기도 하다. 보다 어른인 곳에 내린 이들에게는 열심히 쫓아오고는 있으나 아직 한참이나 남은 아이이기도 하고 어느덧 격차가 얼마 벌어지지 않은 이제 곧 어른이 될 젊은이이기도 하다. 이런 이상한 위치에 있다 보니 이 청춘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지우고 애매함이라고 이름을 다시 붙여주고 싶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중간도 아니니 그 편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런 것이 더 매력적이다 싶어서이기도 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그 애매함이 지닌 모순이 청춘의 매력이 아닌가. 아직 어떤 그림도 그리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인 탓에 어떤 것도 그릴 수 있어 어떤 그림으로도 변할 수 있는 그 애매함이 청춘이 아닌가.
지나온 시간을 청춘이라는 안경을 쓰고 바라보니 형체도 없이 흐릿 하기만 하던 것이 덮개를 씌운 전구로 보인다. 너무 밝다 싶어 덮개로 가려 한 구석에 치워두고는 잊어버린 전구 같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러 필라멘트가 끊어지기 직전이 될 무렵에야 뒤늦게 떠올리고서 이제는 또 왜 이리도 어둡냐 한탄하며 그제야 덮개를 벗긴다. 조금만 더 빨리 벗길걸 하며 후회한다.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돌아보며 가장 빛나던 시절로 회상하고 정작 청춘의 순간에 머무는 시절에는 무엇이 이리도 힘들고 제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없는지 한탄하느라 그 빛을 잊어버린다.
덮개를 씌운 것은 분명함에도 누가 씌운 것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생긴 덮개를 씌웠는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한 청춘에 잠시 정차하여 숨을 돌리는 모든 이들이 들었을지 모르는 그 말이 곧 덮개인가 싶다. 내가 아무개에게 했을지도 모르는, 이 곳에 함께 내린 이들이나 혹은 어쩌다 스쳐지니깐 누군가에게 했을지도 모를 그 말이 곧 덮개인가 싶기도 하다. 싫증이 날 정도로 수도 없이 들었던 청춘과 젊음은 언제라도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시절이라는 그 형식적인 한 마디가 덮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를 말이지만 보통의 청춘과 젊음에 내린 이들은 들고 내린 현실이라는 짐이 너무나도 무거워 이 짐짝을 내려놓고 쉴 곳을 찾기 급급하다. 한 손에는 졸업과 취업이라는 짐이 들려있다. 반대 손을 보니 당장의 내일은 어찌해야 하나 하는 짐이 들려있다. 아려오는 어깨에 무엇을 메고 있었나 생각해보니 스펙은 언제 하고 돈은 언제 모으나 하는 짐이 담긴 가방도 메고 있다. 이 짐들을 주렁주렁 달고도 굳건하게 도전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도 드문드문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보통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역에 발이 묶인 체로 당장을 걱정하기에도 벅차다.
인생이라는 번호판을 단 버스가 배차 간격에 맞춰 다시 도착할 때쯤에 짐을 줄였을지 늘였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떻게든 다시 버스에 올라 요금을 찍을 때쯤에 들려오는 특유의 그 무미건조한 톤으로 내 귀를 자극하는 ‘환승입니다’ 한 마디에 나는 놀랄 것이라는 점이다. 그토록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아직 환승이 만료도 안 될 정도로 짧았음에 덤덤히 놀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얼마 되지 않아 중년이라는 역에 도착하고 나는 다시 내릴 것이다. 다시 한번 숨을 돌리면서 형태만 달라진 짐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을 했다면 가정과 가장이라는 짐을 들고 있겠지 싶다. 다른 한 손에는 책임감과 어른이라는 짐이 들려 있겠지 싶다.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이 이상해 바닥을 보니 덜 마른 시멘트를 밟았음을 깨달을 것만 같다.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주의 표식을 미처 발견하지 못 한 내 실수임을 자각하고 한숨만 뱉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아마 그 주의라는 커다란 글자 밑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겨진 이제는 너무 나이가 들었어라는 그 글귀가 그토록 마음이 쓰릴 것임을 지레짐작할 것이다. 저 너머로 보이는 청춘 역의 표지판이 그렇게나 아련할 것만 같다. 왜 나는 저기서 더 도전을 못 했을까. 왜 나는 저기서 더 다양한 미래를 그리지 못했을까. 왜 나는 저 표지판을 그대로 하얗게 남겨두고 여기로 왔을까. 그 모든 아련함이 싫기에 나는 아직 붓을 놓지는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길고도 장황하지만 실속은 없고, 그럼에도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지금의 내가 느끼는 청춘이다. 청춘을 살아갈 때는 정작 아무런 가치도 보지 못 하고 한탄하느라 바쁘면서 지나고 나서야 시리도록 그 소중함이 느껴지는 시기를 청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에게는 어른으로 어른들에게는 아이로 불리는 그 애매함에 물들어 있는 것이 나를 포함한 내 또래의 청춘이다. 도무지 인생의 어느 선상에 있는 건지 갈피조차 잡기 힘든 이 시기가 청춘이다. 아무 그림도 없지만 무엇을 그릴지도 모르겠는 지금이 청춘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애매함이 좋아 이 애매함을 미친 듯이 즐기고자 한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그려야 할지도 모르는 불안감과 불안정에서 오는 자유를 즐기고자 한다. 그 자유에 잠겨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휘갈겨지는 대로 붓은 무엇이건 그려 놓을 것이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딘가에는 도착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만 머무르기 위해 애쓰고 현실을 외면하다 의미 없이 날려 보내는 것보다는 적어도 그 애매함과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 것이 내가 즐기고자 하는 청춘이다.
[김상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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