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배가 고프면 외로웠고, 외로우면 허기가 졌다

잘 표현된 불행
글 입력 2020.02.29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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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그 아찔한 동거



나는 벌레가 싫다. 무섭냐고 물어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운동을 한동안 쉰 요즘이라도 아직은 벌레와 정정당당하게 맞붙어 이길 자신이 있다. 독만 없다면. 집 근처에 자주 출몰하는 바퀴벌레는 끈질기고 지저분하지만 한 방에 처리할 수 있다.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곱등이도 얼굴로 뛰어오를 일이 걱정될 뿐이다. 모기처럼 날아다니는 것들도 맘먹고 혈투를 벌이면 못 이길 것 없다.(모기는 왠지 혈투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런데, 이기고 싶지가 않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싫다. 우리는 더듬이도, 겹눈도, 많은 다리도 없으니까. 너무 다른 생김새에 대한 생리적인 혐오감 같은 것일까. 어릴 때부터 벌레는 위험하거나 더러운 것-지지라고 교육받은 탓일 수도 있겠다. 벌레를 싫어하는데 있어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내 가장 좋은 친구 중 하나는 개미였다.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서는 맞벌이 가정을 위해 오후까지 아이를 돌봐주는 종일반을 운영했는데 (하루 종일 유치원에 있어서 종일반이다.) 오후에는 종종 친구들과 개미를 잡고 놀았다. 놀이터와 운동장 근처에 서식하는 곤충을 잡아서 관찰하는게 그 때는 중요한 놀이였다.


초등학교때도 교실마다 파프르 곤충기가 하나씩은 있었고, 여름방학이면 잠자리채와 채집망을 들고 나비나 방아깨비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탑블레이드(팽이 장난감)이 나오기 전에는 친구와 사마귀를 한 마리씩 잡아 누구 사마귀가 더 강한지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서는 거미나 지네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어린 시절 벌레와 곤충은 혐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친구이자 장난감이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면서 벌레와 놀 시간은 없어졌고, 더 재미있는 놀이는 많아졌다. 그 무렵 곱등이나 사마귀에 기생하며 뇌를 파먹고 조종한다는 연가시가 유행하면서 곱등이에 관한 각종 혐오적인 이야기와 사진이 떠돌자 나에게도 벌레는 귀찮고 번거로운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집에도 곱등이가 나타났다. 곱등이는 화장실에서 산발적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는데, 마침 나는 볼일을 보는 중이라 지켜볼 뿐이었다.


곱등이는 한동안 뛰어다니다가 지쳤는지 멈춰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내 쪽을 한참 쳐다보더니, 내 얼굴위로 뛰어올랐다. 줄무늬가 그려진 오동통한 배와 가시가 달린 날카로운 다리, 그 위에 자라난 자잘한 솜털을 기억한다. 내 몸 위로 기어오르는 다리의 선연한 감각과 얼굴로 뛰어오르는 불쾌한 촉감. 나는 고개를 흔들어 떨어버린 후 휴지를 뜯어 손 안에 곱등이를 말아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톡- 하고 터졌다.


나에게 있어 벌레는 촉감이다. 곱등이의 바삭한 껍질이 터지며 내장이 흘러나오는 그 감각은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벌레를 마주할 때마다 재생반복된다. 언젠가 들었던 교양수업에서 교수님은 사람들이 바삭한 음식을 좋아하는 원인을 벌레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문명 발달 이전에 벌레는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단단한 곤충의 껍질의 식감이 기억되어 바삭함을 즐기는 거라고 했다.


나는 씨리얼을 먹을 때도 우유를 부어두고 바삭함이 사라지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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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니며 한동안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기숙사에서 자취방으로, 자취방에서 기숙사로 전전하며 지내야했던 날들이었다. 그마저도 정식 계약된 내 방은 아니었다. 방학 기간이나 일정 기간만 금액을 지불하고 빌려 사는 양도자취방에 불과했다. 몇 달에 한 번씩은 꼬박 짐을 챙겨야 하는 잦은 이사를 하다보면 언젠가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들을 조금 더 이해할 것만 같았다.


특히 조금 넓은 집에서 좁은 집으로, 후미진 동네의 허름한 방으로 옮길 때면 더욱 그랬다. 방을 옮긴지 한두 달 만에 다음 살아야 할 방을 고민해야하고 방세와 공과금의 압박에 시달리다 보면 중심으로부터 떨어져나와 끊임없이 정착과 안정을 바라는 삶의 기분을 감히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러다 여름에 조금 큰 아파트 방을 빌린 적이 있다. 학교와는 꽤 멀었지만 명색이 아파트여서 방이 그나마 크고 관리도 잘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커다란 베란다 창문 너머에는 건물이 없었고, 14층이라 탁 트인 경치도 좋았다. 사정이 있어서 방학동안 방을 비우는데, 빈 방으로 놀리기 아까워서 싸게 내놓았다는 말에 얼른 방세를 입금했다.


실수였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좁은 방에 한 면이 베란다 유리라는건 직사광선이 방으로 그대로 들어온다는 걸 의미했다. 방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한 낮이면 방 온도는 41도까지 올라갔고, 환기가 안 돼서 밤에도 38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집주인이 말했던 사정이라는 것은 방이 너무 더웠던 것이겠지. 아이스팩을 여러개 얼려둬도 한 시간이면 땀에 젖은 채로 잠에서 깼다.


그런 더위에서도 잘 살 수 있는 것은 바퀴벌레 뿐이다. 벌레가 없다는 집주인의 장담과는 달리 하루에도 스무마리가 넘는 바퀴벌레가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화장실에는 바퀴벌레가 먼저 씻고 있을지 모르니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날도 있었고, 신발을 신기전에 벗어서 털어내지 않으면 바삭한 발바닥의 촉감을 느껴야했다. 집에 돌아와 불을 키면 사사삭- 소리를 내며 구석으로 숨어들어갈 시간도 충분히 줘야했다.


그 계절에는 공과금을 집주인에게 보내놓고 바퀴벌레와 나란히 앉아 집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잘 표현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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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에는 심한 다이어트도 했다.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도 했고, 체력이 떨어져 그 근래 꽤 아팠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다. 운동 조금 한다고 해서 삶이 금방 나아질리 없는걸 알면서도 그랬다. 밥 먹는 돈도 아까워 닭가슴살이나 바나나를 먹었고 종종 굶었다.


그 즈음에 어렴풋이 짐작했던 집의 형편을 알게 됐고, 내가 별로 좋은 대학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으며, 내가 그다지 똑똑(특별)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일상의 권태와 현실의 갈등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불안에 쫓겨 사는 매일이었다.


퍽퍽한 닭가슴살을 씹다보면 목이 메여왔다. 하루 동안 겨우 바나나 두어 개와 닭가슴살 조각을 먹고 40도에 가까운 집에서 바퀴벌레와 함께 누워있으면 허기가 졌다. 이번엔 아무것도 씹지 않는데도 목이 메여왔다.


나는 정말 소중한 사람을 대할 때는 나에게 하듯 했다. 그래서 스스로가 미웠던 날들에는 오히려 그들을 미워하고 상처 입혔다. 물론 돌아보니 그랬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잃고 나서야 소중‘했었다’고 추억하곤 하니까. 만날 사람이 없어진 밤에는 읽고 쓰는 일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밤마다 ‘어떤’ 삶을 상상하며 소설을 읽었다. 주로 잘못도 없이 비참한 결말을 맞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런 이야기들은 잘못이 없어도 얼마든지 비참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그건 결국 내 모습을 거기서 찾고 싶어서였다. 나는 그 주인공처럼 별다른 잘못 없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뿐인 불쌍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고 믿으며 스스로 위로받곤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와 영영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실은 어린 시절 긴 밤을 지나 크리스마스 아침에 머리맡에 놓여있는 선물을 열어보니 빈 상자였다는 이야기 같아서 언제나 기대를 배신하고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비어있는 허무함뿐 이라면 좋겠지만 그 상자는 사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어서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원했던 것은 거기 없고, 도리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진실이 물밀 듯 밀려온다. 그럼에도 언제나 희망만은 우리 곁에 남는 것이어서 나는 읽고 또 쓴다.”



“요즘 나에게 소설 읽는 일은 그렇다.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마주하고,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나도 따라 망연한 표정을 짓는 일. 그리고는 하릴없이 또 다른 표정을 찾아나서는 일. 더 읽다보면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사실을 믿지도 않으면서 계속 읽어나간다. 내가 소설을 읽으며 지었던 표정을 이제 당신이 내 글을 읽으며 짓게 되길 가만히 바라본다.”



[Opinion] 기대했던 세상은 거기에 없고 [도서] 라는 제목으로 기고된 글의 일부다.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청춘의 이야기를 바라셨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이야기를 난 쓸 수가 없다.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집에서 웅크리고 앉아 책을 읽던 나날. 스스로와 화해하지 못하고 소설로 허기를 달래던 밤. 더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사실을 믿지도 않으면서 한 자라도 적어볼 수밖에 없는 시간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체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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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에 관한 질문과 마음에 드는 글을 소개하는 내용을 함께 담았음을 밝힙니다.

* 소제목 ‘잘 표현된 불행’은 황현산 선생님의 책 제목에서 빌려왔음을 밝힙니다.

* 사용된 그림은 Tim Eitel의 그림임을 밝힙니다.

 

 



[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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