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 노년의 장르는 코미디가 될 수 있을까? [드라마]

글 입력 2020.02.28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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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40년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자신의 배우자가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을 속이고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그리고 그 상대가 동성이라는 걸,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성애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배우자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40년 만에 알게 된다면?


잠시만 생각해봐도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이 이야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설정이다. 나는 이 드라마의 설정을 알자마자 넷플릭스에 들어가 시청을 시작했다. 과감한 설정을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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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과 동시에 기대도 있었다. 나는 늘 그렇게까지 ‘애국자’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해외에 나가서도 어떻게든 한인마트를 찾아 불닭볶음면을 먹고, 김연아, 이상화, 김연경 같은 스포츠 영웅들이 태극기를 달고 보이는 화려한 활약에 심장이 뛰는 한국인이다. 그런 내가 이 드라마의 설정을 처음 들었을 때 기대한 건 배신당한 여성들의 통쾌한 복수장면이나, 얽히고설킨 감정들을 자극적으로 풀어내는 K-드라마식 치정극이었다.

 

내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이야기는 ‘배신당한 여성들’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배신당한 여성들이 살아나가는 ‘삶’에 방점을 두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로펌 파트너인 줄만 알았던 자신들의 남편들이 사실은 동성애자로, 20년 동안 자신들을 속이고 연인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걸 동시에 알게 된다. 그 후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함께 살게 되지만, 둘은 성격과 취향이 서로 너무 달라 이전부터 얼굴도 마주치기 싫어하던 사이다. 이 둘이 함께 아웅다웅 꾸려나가는 삶이 이야기의 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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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깨닫고 나자 드라마를 처음 접했을 때의 기대는 무너졌지만, 실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흥미로웠다. 이 드라마는 60~70대의 노년 여성들이 소위 ‘정상적인 가족’이라고 인식되는 핵가족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살아가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자신만의 신념과 취향을 고집하던 그레이스와 프랭키가 점차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모습, 신체적인 기능이 떨어져 온갖 고난에 부딫치면서도 자신들의 일상을 살아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도 언젠가는 저렇게 유쾌한 할머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된다.

 

물론 이 희망에는 굳건한 한계가 있다. 그레이스와 프랭키의 이야기가 쉽게 유쾌해질 수 있는 건 드라마 속 이들이 미국에 사는 중산층 백인이라는 사실과 아주 큰 연관이 있다. 이들이 만약 한국의 할머니들이면 어떨까. 2019년 12월 발표된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소득이 가장 적은 1분위 가구 평균연령은 67.1세다. 이처럼 노인 빈곤 문제가 심각하지만, 2013년 기준으로 한국이 국내총생산대비 노인에 대한 공적지출은 OECD 평균인 7.7%에 한참 못 미친 2.23%다. 다른 말로 하면 가난한 노인들은 많지만, 이런 노인들을 보호해 줄 사회적 시스템은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상당수는 자신의 일상이 아니라 생계를 더욱 걱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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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노인들의 모습도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2019년 주연인 김혜자가 백상예술대상 TV 부문을 시상하기도 했던 ‘눈이 부시게’는 노년 여성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감동적이고 유쾌한 드라마였지만 ‘치매’라는 질병을 겪는 여성 노인의 모습이 서사 진행의 중심이 되었다. 시트콤에 그려진 여성 노인의 모습조차 유쾌하게만 볼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한창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나문희는 아들과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시종일관 식구들의 눈치를 본다. 이제는 한국에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간첩으로 의심받는, 나문희가 억울한 표정으로 ‘호박고구마!’를 외치는 장면 역시 그동안 식구들에게 받아왔던 구박에 대한 설움을 터트리는 장면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되지 못할지라도, 아직 우리만의 희망을 꿈꿀 수는 있다. 2016년 방영된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나문희의 역할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이다. 하지만 디어마이프렌즈의 나문희는 델마와 루이스를 동경하며 세계여행을 꿈꾸고,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남편에게 골탕을 먹이기도 하는 등 자신의 욕구를 겉으로 표출하는 인물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나문희를 보면서는 앞으로 내 노년이 저렇지는 않을까, 가슴이 막막해지는 경우가 많다면, 디어마이프렌즈의 나문희를 보면서 앞으로 나도 저렇게는 살 수 있겠다. 저렇게만 살아도 좋겠다. 는 희망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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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곧 현실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 멋진 노년을 희망하며 열심히 살다 보면 속상할 때 비싼 스파에 가거나 호텔에 가지는 못할지언정, 스카프를 휘날리며 강릉 바다를 향해 언제든 드라이브를 떠날 준비는 되어 있는 할머니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청년으로 살기에도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유쾌하고 신나게 살아가고 싶다. 할머니가 되어도 내 일상에 코미디가 남아 있으면 좋겠다. 이런 희망을 계속 품을 수 있는 롤 모델이 미디어에 계속 나와주기를 바란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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