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국적 변경 하겠습니다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

우당탕탕 호랑 공주의 대일상!
글 입력 2020.02.2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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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즐겨 읽었던 일상 만화에 꼭 한 번씩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나는 이 집 아이가 아닌데 병원에서 바꿔치기 당해 이 집에 온 거라는 상상. 부모님이 아이에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거나 다른 집 아이라고 농담 삼아 말하는 것도 이런 상상을 키워준 원인일 것이다. 조금 발전된 이야기가 소공녀, 소공자다. 부모님을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알고 보니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라거나 평범하게 살았던 내가 알고 보니 한 나라의 공주라는 식의 이야기는 제법 보편적이다. 평범한 일상, 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노력 유무와 관계없이 유복하고 돈도 많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들어간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00년대, 뭇 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만화 “궁”도 이와 비슷한 배경 아래 이야기를 펼친다. 입헌군주제 사회, 세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주인공과 당시 표현을 적절히 사용하자면 싸가지 바가지인 ㅡ.,ㅡ... (꼭 왕재수 설명 뒤에는 이런 이모티콘이 붙더라) 세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궁 안에서 평생 서민적으로 살아왔던 주인공의 행동은 눈에 띄다 못해 때론 독자까지 부끄러워지곤 했다. 한편으로는 모두의 배척에 상처 입은 주인공이 안타깝고 엇갈리는 사랑이 흥미진진했던 거 같다. 읽은 지 오래되어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감정을 울린 만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대체 역사라는 점에서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은 “궁”을 연상시킨다. “궁”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만일 입헌군주제라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에 대해 풀어나가고,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에서는 대한제국에서부터 줄기를 달리하여 입헌군주제 국가 제2 대한제국을 만들어낸다.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동일한 점도 존재한다. 재미있다. 대체 역사 장르가 재미없다면 대체 역사 장르가 아니라는 듯이 재미있다. 만약이라는 가정에서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그렇다고 현실에만 몰두해 픽션으로써의 재미를 놓치지도 않은 대체 역사 소설과 만화는 입헌군주제인 대한민국, 대한제국의 세계에서 생활해보고 싶은 욕구를 생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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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일까. “겨울왕국”의 엘사가 나올 때부터,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 수 세기 전부터 여성은 왕비가 아닌 왕이 되길 갈망했다. 왕비는 기존 왕가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지만, 왕은 지지를 받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력이 있고 힘이 있는데 누군가의 옆에서만 사는 건 좀스럽다. 이전의 많은 이야기와 상상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가 지금 와서는 유치하게 보이거나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시도가 지금은 다소 진부해지는 것처럼, 과거의 이야기가 쌓여 지금의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 테다. 게다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갈망하는 이야기가 변한다. 말하자면, 많은 소공녀와 신데렐라 이야기의 반복 끝에, 사람들은 더 새로운 무언가를 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현대적인 소설이다.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은 보편적인 출생의 비밀 형식을 취하면서도 형식에 숨겨진 욕망을 모두 부순다. 18살 생일에 처음으로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호랑은 이 사실을 결코 기뻐하거나 달가워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입헌군주제란 유물은 구시대적이라고 비판하던 마당에 자신이 그 비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가구 주민을 몰아내고 궁궐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대원군 이익태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황위를 이어받기로 다짐한다.
 
보통 서민이 궁이나 황실에 들어가게 되는 이야기에 필수적으로 나오는 상황이 있다. 바로 궁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장면이다. 문화에 다소 차이가 있는 타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 그들의 문화를 배울 필요가 있는 데다가 한 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전통적이고 커다란 집단에 합류하게 되니 예절 교육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왕실에서의 생활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서민의 행동에 당황하거나 비웃거나 괴롭히며 배척하며 사건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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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창천동 뉴클리어펀치, 현 타이거릴리 프로젝트 보컬 및 기타를 맡은, 종가구 궁궐 프로젝트 반대 시위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건강한 18세 학생이 얌전히 궁궐의 예의 법도를 지킬 리 없다. 소리를 치고,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바닥에 굴러 떼를 쓰고는 오열하는 척하고, 도자기나 그림처럼 값진 물건을 부수겠다고 협박하고, 되지도 않은 애교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한다. 이 모든 일을 황제 예법 수업 약 일주일 만에 모두 클리어한 호랑 공주는 그 외에도 다양한 파격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며 황제의 비서 겸 황제 예법 수업 선생님인 유나에게 고통을 준다.
 
그렇다면 유나나 황실 사람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 기존 교과서같은 클리셰대로면 호랑을 혼내거나 억압하거나 조롱해야 마땅할 것이다. 셋 다 할 수도 있고. 유나는 말한다. 자신과 황실의 모든 사람이 호랑 공주님 편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당신의 고민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연대.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책임을 짐,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소설은 연대에 대한 이야기다. 호랑과 그의 친구이자 밴드 멤버인 라라와 해민은 한순간에 터전을 빼앗기게 생긴 종가구 사람들과 연대해 궁궐 복원 반대 프로젝트에 앞장선다. 황실은 무법자 호랑이를 황족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황자로써의 자질을 논하거나 조롱하는 대신, 어떤 모습의 호랑이라도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 사랑하고 지지한다. 연대의 힘 아래서, 호랑은 이리 흉내를 내지도 토끼 흉내를 내지도 않고 호랑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혼자서는 아주 미약한 물방울도 모이면 거대한 파도를 만든다. 이호랑이라면 어느 자리에서도 분명 원하는 일을 끝까지 해냈겠지만, 든든한 지원군 아래에 또 누군가의 지원군이 되어준다.
 

 

호랑은 아줌마라는 단어를 내뱉은 순간 그 즉시 후회했다. 평소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단어였다. 기선제압을 해보려고 꺼낸 한마디였지만 상대는 고작 이 정도 비난에 흔들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이 정도 비난에 흔들릴 만한 사람이라고, 해도 될 공격은 아니었다.

(중략)
호랑은 나름대로 호칭 문제에 있어서 타협안을 내놓았다. 방금처럼 아줌마라고 부른 것은 민망하기 짝이 없는 큰 실수였다.

 

 
오랜 친구인 라라와 해민조차도 쉽게 다룰 수 없다고 단언하는 고집불통 이호랑은 그럼에도 불량 인간은 아니다. 확실하게 불량 학생이긴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불량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타인에게 할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을 확실히 알고 있다.
 
아줌마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상황은 매우 드물다. 드라마에 수시로 나오는 아줌마란 호칭 또한 보통 예의 없고 기 세고 자기주장만 밀어붙이는 사람을 지칭하는, 혹은 네가 그렇게 보인다고 말함으로써 정신적 승리를 얻기 위한 의미로 쓰인다. 누군가는 아줌마라서 아줌마라고 말했을 뿐이라 하겠지만, 단어에 담긴 비하, 깔보는 시선이 분명 존재한다. 호랑은 이 점을 스스로 인지하고 부끄러워한다. 어린 여자의 말이라면 칭찬이든 조언이든 욕이든 결코 들리지 않는 철없는 대원군 이익태와 정반대다. 소설은 현실에 존재하는 혐오를 호랑 주변에는 배제해 깔끔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익태 주변에는 그대로 넣어 나이와 상관없이 누가 더 성숙한 인간인지 한눈에 보여준다.
 
호랑의 여자친구 라라, 해민의 남자친구 상윤. 어떤 설명도 없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성 소수자는 오히려 지금 이 말을 적고 있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무슨 특별한 일도 아닌데 왜 굳이 설명이 필요하며 왜 이 말을 또 적고 있는지. 호랑이와 해민이가 어떤 부가적인 설명이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누군가 반대하는 스토리 없이 연애한다고 해서 (아무리 예시라지만 해민아 미안!) 자연스럽게 남녀의 로맨스가 진행된다며 신기해하거나 칭찬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이런 점을 칭찬하게 되면 차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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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1억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에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설명하지 않고 그 1억의 출처가 어떻게 되는지, 횡령일 가능성이 있는지, 세금이라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한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호랑과 라라, 해민은 그런 친구들이다. 고등학생이 뭘 할 수 있겠느냐고 꼰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들은 충분히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성숙과 체력은 나이에서 오지 않으니까. 이런 타이거릴리 멤버들의 행보를 지켜보노라면 나까지 기대하게 된다. 다음에는 이들이 무엇을 할지. 어떻게 대한제국을 어지럽히고 정리할지.
 
소설의 끝 장을 덮을 때는 항상 아쉽지만, 이번은 더욱 더 그렇다. 호랑의 당돌한 성격이나 해민의 깊은 생각, 연우의 도덕심과 라라의 체력, 유나의 사회성 등 닮고 싶은 장점으로 가득한 캐릭터를 만날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입헌군주제를 반대하는 차기 황제는 모두가 가장 사랑하는, 그런데도 입헌군주제는 바보 같은 일이니까 폐지되어야 한다고 서로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호랑의 파격적인 행보가 궁금한데 내가 볼 수 있는 대한제국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게 아쉽다. 황실에 내는 세금을 줄이고 정원에선 유기 동물을 기를 황제를 사랑하는 나라는 분명 자신보다 타인을 배려하고, 잘못된 것에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곳일 테니까.
 
왜 나는 대한제국 사람이 아닌거람? 아니, 대한제국은 왜 존재하지 않는 걸까? 국적 변경도 생각하고 있는데. 그나마 책에서라도 만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

- 안전가옥 오리지널 3 -

 


지은이 : 홍지운


출판사 : 안전가옥


분야

장르소설

역사소설, 팩션


규격

128X200mm


쪽 수 : 284쪽


발행일

2020년 02월 03일


정가 : 15,000원


ISBN

979-11-90174-66-4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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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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