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부조리 속의 평범, 평범 속의 부조리 [도서]

시지프형 인간은 주체성을 가진 행복한 인간일 수도
글 입력 2020.02.22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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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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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여러 일상적인 일들은 소위 말하는 신화의 일부이다. 대부분은 신화라고 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하며 거창한 스토리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화는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형태가 없는 것에 형상을 부여한 것이다. 이야기로 표현된 신화는 사건과 사건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론적 힘을 가지고 있다.  결국 신화는 그 어원인 그리스어 muthos(이야기)가 지닌 의미를 내포하는 의사소통의 체계이며, 대화로 전달되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보일지라도 신화 속에 등장하는 것들은 전부 그것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 부조리 문학의 대표적인 신화로 알려진 시지프 신화 또한 그것의 내용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포함하며 독자들에게 생각의 거리들을 제공해준다.

카뮈의 사상이 담겨있는 『시지프 신화』(1943)는 ‘어떻게 삶을 살 것 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시론으로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다.”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시지프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기를 갈망한다. 그렇게 그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지만 이에 대한 죄로 거대한 돌덩이를 산 꼭대기 위로 올려 놓는 형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몇 번이고 산 꼭대기 위로 바위를 올려놓아도 그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에게 끊임 없이 찾아오는 하산의 시간은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불행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형벌을 계속해서 이행하는 시지프를 ‘부조리적 영웅’이라 칭한다.

 
 
카뮈가 바라본 시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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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부조리는 의미 없는 삶과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 경향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무능력을 논리적 불가능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불가능 한 것으로 여기며 삶과 죽음을 보는 관점에서는 살아간다는 것은 즉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 말한다. 부조리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실존문학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실존철학자는 아니지만 실존문학 속에서 실존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 정의를 만들어 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삶 속 부조리의 존재를 경험을 통하여 인식하였고,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 모랄(moral) 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을 거부하려 했던 인간인 ‘시지프(Sysiphe)’를 부조리한 모델로 제시하였다.  카뮈는 시지프를 부조리한 모델, 즉 부조리한 모순을 포기하지 않고 성공의 희망이 없더라도 끝없는 투쟁을 벌이는 부조리적 영웅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부조리적 영웅은 결국 그가 처한 삶을 받아들이며 그로 인해 그 속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카뮈의 입장이다. 여기서 부조리적 영웅이 처한 삶은 부조리적 모순을 직면하고 지속적으로 인식하는 삶이며, 그 삶을 포기하는 선택인 자살을 하지 않고 가능한 힘껏 살아가는 삶이다.

 
 
‘시지프형 인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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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 없이 거대한 돌덩이를 산 꼭대기 위로 올리는 시지프의 모습은 마치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은 한계와 장벽에 부딪힌다. 권력의 정도로, 학벌의 수준으로, 부의 크기로, 노동력의 유무로 사람들을 줄 세우고 등수를 매기는 현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밀어 올리고 있는 거대한 돌덩이이며, 그것을 끊임 없이 올리고 또 올리는 사람들은 시지프와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지프와 같은 인물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가로막는 장벽에 맞서지 않고 포기하기도 하며, 한 번 맞서 보았지만 안되는 것을 알고는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어떤 사람이라 칭하기 보다는 대부분의 사람이라 칭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 대부분의 유형에 벗어나는 사람들을 시지프형 인간이라 부르면 그럴 듯 하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점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끌어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바로 저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걸음, 잠시 동안 의 휴식 때문에 특히 시지프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p. 157)
 
위의 시지프 신화의 일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부조리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그 현실이 내어준 임무에 순응하고 해 나가는 인물이 바로 ‘시지프형 인간’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은 부조리하며, 현실의 부조리함을 인식하면서도 부조리한 생활을 이어 나가는 것이 더욱 더 부조리임을 철저하게 반증한다.
 
 
 
영화 <파수꾼>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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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수꾼>에서는 친구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곁에 있던 사람의 부재를 느낀 기태가 외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도 느끼지 못해 자살을 하는 모습이 표현된다. 영화 <파수꾼>에서 기태의 죽음이 묘사된 부분을 보면서 그의 죽음은 유일한 삶의 이유라고 할 수 있었던 친구들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가고 결국 사라지면서 기태는 결국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살 이유를 느끼지 못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결국 포기로 보았던 것이다. 『시지프 신화』에서 시지프는 더 이상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어떻게 보면 바위를 옮기는 형벌일 텐데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간다. 이 둘은 상반되면서도 닮아 있다. 더 이상 살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과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지금껏 말한 ‘더 이상 살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마 정말로 이유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더라도 ‘살아가는 그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이유가 아님’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 이제 다시 영화 <파수꾼>으로 돌아가보자. 기태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서 살아가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이유가 자신이 원하는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죽음도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관련된 의미의 죽음으로『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타난 베르테르의 자살 또한 언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베르테르가 결국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이루었다는 입장을 가지고 때문에 그의 죽음 또한 삶에 대한 포기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위한 선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영화 <파수꾼>과 『시지프 신화』, 더 나아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자살’이라는 것이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필자가 바라본 시지프

 

사람들은 『시지프 신화』 속에서 형벌을 받는 시지프를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시지프가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결코 고통의 시간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시지프가 바위를 올려놓기를 끝마치고 내려오는 시간에 중점을 두고 신화를 읽었다. 그러면서 시지프가 끊임 없이 바위를 올리는 이유가 바로 ‘내려가는 시간’의 절실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흔히 비극을 인식했을 때가 가장 비극적인 상황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에 그친다면 당연히 비극적인 상황에 머무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지프가 바위를 올려놓았지만 그것이 끊임없이 다시 내려올 것 이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바위를 올려놓는 행위를 멈추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시지프는 그것을 알고도 계속해서 형벌을 반복한다. 형벌이라고 표현이 되지만 올린 뒤,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사고’의 시간을 통해 시지프라는 인간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 ‘사고’의 시간이 시지프가 다시 거대한 돌덩이를 산 꼭대기 위로 올리는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거대한 돌덩이를 산 꼭대기 위로 올려놓는 시지프를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주체성을 가진 행복한 인간으로 보고 부러움과 선망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 상황 속 작은 일 하나하나에 얽매여 삶을 살아가는 것은 평범한 삶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부조리를 인식했지만 그 부조리에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못하고 주어진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며 살아가는 것도 평범한 삶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그 부조리에 맞서 할 수 있는 저항의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도 평범한 삶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이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에 그것이 부조리하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부조리함을 인식하지 못하기도 하고, 인식 하기도 하면서 부조리한 현실 속에 살아가지만, 그것이 부조리 하기에 우리는 더욱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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