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가 요즘 시대에 라디오를 듣나요? [사람]

글 입력 2020.02.22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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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질을 할 때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하여 위에서 붓는 물을 가리켜 ‘마중물’이라고 한다. 오는 물을 맞이하는 한 바가지의 물이 마른 펌프를 촉촉하게 적셔주듯 우리의 건조한 일상 중에도 마중물 같은 사람들 또는 그런 순간들이 있으며,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한 바가지의 물이 되어주는 순간들도 있다. 서로에게 마중물일 수 있는 관계나 공동체에 속해있음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이따금 곱씹곤 한다.

그래서 종종 우울감에 빠져드는 날이면, 친구와 대화하며 털어버리는 것조차 힘이 드는 날이면, 목마른 사슴이 개울가를 찾듯 라디오를 켠다. 라디오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의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모르지만 오로지 ‘청취자’로서 서로에게 마중물이 되어준다.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소리에만 의존하여 위로의 말과 공감의 말을 건넨다. 라디오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낯설지 않은 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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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심야 시간의 라디오를 자주 듣는다. 심야 라디오를 들을 때면 밤늦게 손님들을 태우거나 야식을 싣고 움직이며 라디오로 졸음을 쫓는 분들이 많다.

제주에서 택시기사를 하고 있다는 청취자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눈길 위를 긴장하며 운전하다 잠시 멈춰서 보내는 문자 한 통에서는 갓 삶아낸 감자의 냄새가 난다. 제주도로 여행을 오면 제주의 향토 음식인 몸국, 제주육개장, 고기 국수는 꼭 먹고 올라가라는 ‘제주 특파원’ 청취자의 말소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12년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치킨집을 운영하는 청취자에게 취소하고 빨리 오라는 고객보다 ‘천천히, 조심히 오세요’라는 손님이 더 많기를 바란다며, ‘잘 될 겁니다’라고 말해주는 DJ의 다정한 말소리도 좋아한다. 라디오는 글과 음악과 사람과 이야기가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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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꿈이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한때 라디오 작가를 꿈꿨었다. 그리고 꿈의 찬란했던 시작부터 어영부영 시들해질 때까지를 함께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 강다솜 아나운서가 진행한 MBC 표준 FM <잠 못 드는 이유 강다솜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들었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종종 강다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틀어놓고는 한다.

‘막차 시간, 새벽의 골목길, 밤을 지새운 그 아이의 집 앞, 날짜 변경선, 그리고 음악이 흐르는 이곳, 자정과 새벽 2시 사이 잠 못 드는 이유 강다솜입니다.’ 가끔은 나도 강다솜 아나운서의 목소리 위로 오프닝멘트를 중얼거리고는 했다.

매일의 오프닝멘트와 클로징멘트엔 글자들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온도와, DJ 본인의 체온에 맞게 수정하여 읊어주는 그 온도가 함께 녹아있다. DJ의 다정한 목소리, 옅게 퍼지는 웃음소리, ‘전력질주!’하고 외치는 말 뒤의 느낌표를 여전히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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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들으며 하는 일들은 어느새 취미가 되었다. 보통 자기 전 눈을 감고 듣기는 하지만, 앉아서 라디오를 들을 땐 꽤 많은 일을 한다. 최근에는 걱정인형이라는 걸 자주 만든다. 내 걱정을 대신해줄 친구 몇 명을 만드는 일이다. 손재주는 없지만, 그렇게 2시간 정도에 걸쳐서 느릿느릿 실을 감고, 이쑤시개를 자르고, 단추를 붙이다 보면 이만한 심신 안정제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하나의 걱정인형을 완성해갈 때쯤이면 종종은 잊고 있던 이름들이 떠오른다. 그 이름들을 가만가만 생각한다. 아무래도 잊고 있던 것들이 떠오른다는 건 두근대는 일이다.

엄마 옆에 누워 듣는 것도 좋아한다.

엄마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엄마는 문자메시지 대신 엽서에 사연과 신청곡을 적어 빨간 우체통에 넣었다. 엄마는 매번 김승진의 <스잔>을 신청했다. 엄마는 사연을 보낸 날엔 공부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라디오 앞에 앉아 라디오가 끝날 때까지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렸다. 그리고 신청한 곡이 나오거나 사연이 뜨는 날에는 이불을 차댔다. 엄마가 살던 시골 동네는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았다. 카세트의 다이얼을 돌리고 돌려도 잡히는 라디오라고는 최수종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뿐이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매일 밤 카세트를 들고 좁은 방 안에서 전파가 잘 잡히는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누볐다.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전파가 잡히기를 기다렸다.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할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질 때면 불을 끄고 구석에서 작은 볼륨의 라디오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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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의 시작은 무선통신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이 처음 빛을 발한 건 타이타닉 침몰 사건이라고 한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무선통신을 통해 침몰을 최초로 알렸고, 덕분에 많은 사람을 구해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라디오 방송이 만들어졌고, 라디오 방송이 전성기를 보냈던 아날로그 시대를 지나 우리는 라디오를 틀기 위해 카세트 앞에 앉는 것보다 스마트폰을 꺼내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를 보내고 있다. 그렇기에 라디오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라디오의 전파가 수많은 이야기를 쏘아 올려 별을 만드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라디오는 멈추지 않는다. 새벽 2시에도, 3시에도 라디오는 잠들지 못한 누군가를 청취자 삼아 전파를 쏘아 올린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당시 라디오가 많은 사람을 구출했듯이, 방식은 달라도 여전히 라디오는 세상의 속도가 아닌 제 발걸음의 속도에 맞춰 걸어가는 사람들과 행복한 동행을 하는 느린 소리다.

 

[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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