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애틋함보다 원망이 커져버린 우리에게 [도서]

글 입력 2020.02.2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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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함보다 원망이 커져버린 우리에게

- 윤이형의 소설이 내게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


 

시공을 종횡무진하는 상상력, 사람 사이에 오가는 미약한 숨을 포착하는 관찰력, 정확하면서 아름다운 필치, 소수자에게 언제나 열려있는 따뜻한 지성. 누군가 내게 윤이형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이 주제라면 하루 종일을 얘기할 수 있어’하는 들뜬 표정과 함께 내가 말할 당위는 이토록 많다. 시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윤이형 작가의 소설은 이상과 이론에 그쳐있던 나의 페미니즘을 실제 삶의 장으로 옮긴다. 그의 최신작 『붕대 감기』는 우정이라는 아슬아슬하고도 견고한 관계에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적 논제를 더해, 갈등하고 와해되는 여성을, 나아가 이해하고 화해하는 여성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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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층위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붕대 감기』는 급변하는 페미니즘의 지면 위에서 흔들리는 여성들을 조망한다. 그곳에는 발 빠르게 흐름에 함께하는 여성이, 저마다의 이유로 제 자리에 머문 여성이, 웅크려 앉아 흐느끼는 여성이, 있는 힘껏 반대 방향으로 뛰어 가는 여성이, 그리고 발맞추어 함께 걸어가는 여성들이 있다. 우리의 차이가 어떻게 미움으로 번지는지, 그 미움이 어떻게 연대로 나아갈 수 있는지까지 보여주는 고마운 소설이다. 『붕대 감기』는 다름 아닌 같은 여성 때문에 상처받고 울었던 적이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설령 여자들에게 불필요하고 비싼 파마를 수시로 권하는 사람일지라도 지현은 자신이 왜 광장에 나가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광장에서 빨간 옷을 입고 탈코르셋을 외치는 여성들과 지현이 완전히 섞일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단절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지현의 직업이 여성 억압을 답습하는 그 자체의 모순이라고 해도, 그 간편한 단죄 아래에는 한 사람의 복잡다단한 삶이 있고, 하나로 특정할 수 없는 이유와 당위가 있다. 무엇보다 겨울날, 함께 부르짖던 분명한 외침이 있다.

 

세연의 눈에 ‘남자가 없으면 못 사는’, 그래서 ‘창피하게’ 보이는 진경이 자신의 딸 율아에게 속삭인 조용한 다짐이 어쩌면 이 소설을 가장 잘 표현해 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나는 이런데, 너는 왜 이렇지 못해’와 같은 비대한 자의식이 가려버린 태초의 친밀함을 잊지 않는 것, 정치적 온당성을 따지기 이전에 나와 같은 아픔과 고립을 겪은 여성을 존중하는 것, 그 고통을 상상하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금방 잊고 자주 원망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바라보는 것. ‘너의 단호함을, 너의 편협함까지도 이해하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연대의 시작이자 끝이며 비로소 우리를 자유로 이끌 것이라고, 윤이형의 소설은 내게 말해주는 것만 같다.

 


[곽성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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